청우헌수필

여름이 가다

이청산 2011. 9. 7. 10:15

여름이 가다


한촌 살이를 시작하고는 처음 맞는 여름이었다. 그 여름이 가고 있다.

한촌의 여름은 논들의 모내기로부터 시작되었다. 물을 가득 안은 논이 새파란 초원으로 바뀌면서 여름의 걸음이 빨라졌다. 모가 하루가 다르게 부쩍부쩍 자라 오르고, 매미는 점점 목청을 돋우어갔다. 마당 텃밭에 심은 고추 모종은 어느 새 쑥쑥 커 올라 손가락만한 고추를 달기 시작하고, 상추는 잎사귀를 넓적하게 벌려갔다. 텃밭 가에 서있는 앵두도 붉은 열매를 앙증맞게 달아냈다.

잎을 달기 시작한 마을 숲의 우람한 나무들은 잎을 조금씩 크게 피워내더니 어느새 싱그러운 그늘을 이루고, 그 그늘을 품 삼아 색색의 텐트들이 모여 들었다. 텐트의 사람들은 마을 앞의 강으로 뛰어 들기도 하고, 밤에는 모여 앉아 노래를 부르기도 했다.

보를 넘치며 흐르기도 하고, 잔잔한 물살로 흐르기도 하는 마을 앞의 강물은 사람들의 놀이터가 되기도 하고, 어장이 되기도 하면서 푸른 하늘을 담고 유유히 흘러갔다.

앞에는 논들이 펼쳐져 있고, 뒤에는 산이 서 있는 우리 집에 손님이 찾아들었다. 깊고 외진 시골에 발을 내리고 살고 있으니 무슨 별종의 삶이라도 사는가 싶어 신기한 모양이었다. 모두 여름이 불러온 손님들이다.

 

아들, 딸 식구가 어린것들을 데리고 와 논들을 거닐기도 하고 강물을 첨벙이기도 하며 휴가의 날들을 보내고 갔다. 칠순 넘은 형님 내외가 슬하를 데리고 와 은퇴자의 삶을 살고 있는 동생이 공기 좋고 경관 좋은데 사는 것을 기뻐하며 하루를 즐기고 갔다. 꿈 푸르던 청년시절 초임의 근무지를 함께 했던 사람들 부부 몇 쌍이 와서 마당 한 자리에 둘러앉아 지난날을 회고하며 감회에 젖기도 했고, 학창의 동기들이 찾아와 텃밭의 고추를 따서 된장에 찍어 먹으며 삶의 일선을 물러나야 할 만큼 깊어져 버린 세월을 함께 돌아보기도 했다.

여름이 무성해지면서 태양이 작열해 가는 사이에 산에는 딸기가 익어 가고, 수풀이며 길가에는 여름 꽃들이 피고 지기를 거듭했다.

수풀 어느 한 곳에 대궁을 먼저 밀어올린 상사화가 애달픈 사랑의 전설을 간직한 채 연분홍 꽃송이를 피워 가슴속에 잠긴 그리움을 불러냈다. 고샅목에는 마치 눈을 덮어쓴 듯한 설악초와 귀여운 짐승의 꼬리 같은 꽃범의꼬리가 그들의 꽃말처럼 축복과 추억이 되어 어여쁜 꽃들을 피워내고, 강둑에는 분홍빛 메꽃이며, 붉은 둥근잎유홍초, 남빛 닭의장풀이 잔잔하게 피어 여름 아침을 정감에 젖게 했다. 달빛을 닮은 달맞이꽃이 달빛 맑은 여름밤을 지키더니, 태양빛을 닮은 샛노란 금불초는 달아오른 여름 한낮을 지켰다.

그 여름이 꼬리를 끌기 시작했다. 세상으로 고개를 내민 벼 이삭의 힘에 밀려 쫓겨 가는 것 같았다. 벼가 하늘을 향해 치솟다가 어느 날부터 통통한 알곡을 단 이삭을 내밀자 여름은 슬금슬금 물러나고 있었다.

여름이 그냥 물러나지는 않았다. 한 때의 뜨거웠던 양광을 과원의 사과 알 위에 담뿍 남겨놓았다. 어떤 열매에는 마치 무엇을 향해 절규라도 하듯 새빨간 핏빛을 뿌려 놓기도 했다. 여름의 유산은 또 있었다. 눈만 뜨면 텃밭에서 살던 아내의 얼굴이며 팔다리에 온통 검은 흙빛을 칠해 놓았다.

매미는 아직도 높은 목청을 거두려하지 않고 있지만, 푸른 논들이 보이는 창을 열고 있으면 제법 삽상한 바람이 불어와 여름날의 진득한 기운들을 걷어낸다. 이 바람은 마침내 저 들판의 푸른빛도 걷어 낼 것이다. 더욱 성숙하고 찬란한 빛을 몰고 오려는 몸짓인지도 모른다.

여름이 물러가고 있다. 가을이 오고 있다. 계절이 바뀌고 있다. 세월이 간다. 여름 한 철 잘 살았다. 싱그러운 푸름이 적적한 한촌 살이를 위무해 주던 여름, 텃밭의 온갖 푸성귀들이 삶의 미각을 돋구어주던 여름, 정다운 사람들이 찾아와 청량한 삶의 정을 일게 했던 여름, 태양을 배경으로 하고 피어난 난 꽃들이 그리움과 아름다움에 젖게 했던 여름-.

그 여름이 가고 난 자리에 계절은 또 어떤 모습으로 올까.

세월은 빠져 나가는 것일까, 오는 것일까.(2011.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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