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우헌수필

마른 감나무에 촉 나다

이청산 2011. 8. 1. 12:35

마른 감나무에 촉 나다



몇 달만인가? 죽은 줄만 알았던 감나무에 촉이 났다. 그 조그만 것이 투박한 표피를 뚫고 앙증스럽게 고개를 내밀고 있다. 봄 다 지나고 여름도 대서, 중복을 넘어서서야 세상으로 뛰쳐나왔다.

겨울의 냉기가 채 가시지 않았던 삼월 중순에 이웃에게 얻어 과원에서 캐어 온 것이다. 캐내기 쉽고 옮기기 쉬우라고 잔뿌리며 길게 뻗은 뿌리는 잘라내었다. 모두 세 그루를 얻어서 마당의 북쪽 담장 앞에 심었다.

삼월이 지나고 사월 중순으로 접어들면서 마당 텃밭을 갈고, 모종을 심을 것은 심고, 씨를 뿌릴 것은 뿌렸다. 사월이 지나 오월 들면서 텃밭이 조금씩 푸르러 갔다. 상추며 부추가 제법 자랐다.

감나무와 비슷한 시기에 심은 앵두나무며 매실나무는 잎도 피고 꽃도 피는데 감나무는 감감하기만 했다. 뿌리를 너무 많이 잘라내었는가, 거름을 주어 북돋우기도 하고, 사랑을 느끼면 살아날까 하여 가끔씩 쓰다듬어 주기도 했다.

드디어 오월 중순이 지난 어느 날, 중간에 서 있던 나무에서 파란 움이 뾰족이 돋아났다. 박수를 쳤다. 그 움이 자라 작은 가지를 만들어내고 잎도 피워 냈다. 제일 가에 서있던 나무도 밑동에서 조그만 싹을 피워내었는데, 그건 감나무 싹이 아니라 접을 붙인 고욤나무 싹이란다.

다른 것이 그리할 때도 맨 앞에 서 있는 것은 움을 틔워내기는커녕 가지가 말라 가기만 했다. 체념하고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캐내기는 아까워 밭을 매던 호미도 걸어두고, 땀 젖은 수건이며, 옷가지를 걸어두기도 했다. 봄이 가고 여름이 와도, 계절조차도 까마득히 잊고 있는 것 같았다. 계절을 느낄 감각조차도 잃어버린 것 같았다. 가지를 만져 보면 딱딱하고 메마른 느낌만 손끝을 움츠리게 할 뿐이었다.

그렇던 그것이, , 그것이 촉을 내밀었다. 논들의 벼가 성큼 자라 싱그러운 초록빛을 한껏 내뿜고 있던 칠월 하순 어느 날이었다. 살아 있었구나, 살기 위해 무진장 애를 써 왔구나, 그렇게 기특하고 대견하고 신기할 수가 없었다.

묵내뢰(黙內雷)’라는 말이 있다. 겉으로는 침묵을 지키고 있지만 속으로는 우레와 같다는 말이다. 우레와 같은 폭발력은 갖지 못했을지언정, 물 위에 고요하게 떠있는 오리의 두 발이 물 아래서는 끊임없이 자맥질을 하듯, 땅 속에서, 수피 안에서 끊임없는 생명 작용을 해 온 것이다. 저 촉의 끈질긴 생명력이 피부에 와 닿는 듯했다. 내 핏줄을 타고 흐르는 듯이도 느껴졌다.

저 작은 촉이 또 무엇을 이루어낼 것인가. ‘의 힘을 경탄한 어느 시인의 시가 떠오른다.

 

무심히 지나치는/ 골목길//

무겁고 단단한/ 아스팔트 각질을 비집고/ 솟아오르는/ 새싹의 촉을 본다.//

얼랄라/ 저 여리고/ 부드러운 것이//

한 개의 촉 끝에/ 지구를 들어 올리는 힘이 숨어 있다.

                                                                                        -‘’, 나태주

 

새싹은 비록 여리고 부드러운 존재지만 무겁고 단단한 아스팔트 각질을 뚫을 뿐만 아니라, 그 안에 우주를 들어 올리는 힘이 숨어 있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제 저 조그만 것이 튼실한 가지를 죽죽 뻗게 하고, 푸른 잎을 달게 하고, 노란 꽃을 피게 하고, 붉은 열매를 달게 할 것이다. 모두가 체념해버린 망각의 늪 속에서 저 작은 것 하나를 틔워내기 위하여 딴은 있는 힘을 다해 안간힘을 써 왔으리라 생각하면, 신선한 경외감이 느껴지기도 하고, 쉽사리 한 체념이 민망스러워지기도 한다.

촉이 난 감나무를 다시 본다. 그 생명 작용이 너무나 대견하다. 아무도 보아주지 않는 곳에서 저 촉을 밀어내기 위하여 쉼 없이 움직여 왔을 나무의 속을 그려본다. 그 끈질긴 생명력을 생각하면 우리가 무엇의 생명인들 가볍게 여길 수 있을 것인가. 생명의 신성함이여-.

고추가 크고 있는 텃밭에서 풀을 뽑던 아내가 소리친다.

이 놈의 바랭이 때문에 못 살겠어. 이런 건 가꾸지 않아도 왜 이리 잘 짙어져! 당신 감나무만 보지 말고 풀 좀 뽑아욧!”

……!”(2011.7.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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