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우헌수필

승민이의 백일

이청산 2011. 7. 23. 10:58

승민이의 백일



승민이가 왔다. 제가 태어나고는 처음으로 오는 할아버지, 할머니 집이다. 백일을 쇠러 왔다. 외할아버지, 외할머니도 백일을 축하해 주기 위해 함께 왔다.

승민이는 온갖 봄꽃들이 한창 피어날 무렵인 사월에 태어났다. 참으로 기다린 아이였다. 첫 손녀 승윤이가 태어난 것은 5년 전이었다. 승윤이는 참 예뻤다. 조상 눈에 안 예뻐 보이는 자손이 있을까만, 승윤이는 이목구비가 아주 반듯하고, 자라면서 하는 행동거지 하나하나가 그리 귀여울 수가 없었다. 사는 곳이 달라 자주 볼 수는 없었지만, 찾아가거나 찾아와서 서로 만나는 날이면 할아버지, 할머니 좋다며 덥석 안기는 것이 여간 사랑스럽지 않았다.

승윤이가 세 살이 지나고 네 살이 되었다. 승윤이의 재롱에 빠져 잊고 있던 게 있었다. 둘째를 보는 일이다. 아들, 며느리에게 둘째를 가질 때도 되지 않았느냐고 떠보았더니, 저들도 공을 들이고 있는 중이라 했다. 저들이 들이는 공이 잘 이루지기를 빌면서 기다렸다. 절에라도 가면 부처님께 둘째를 잘 보게 해 달라고 빌었다. 첫째가 손녀이니, 둘째는 손자로 점지해 주십사 하고도 빌었다.

승윤이가 다섯 살이 되던 해 봄이 지나고 여름이 들 무렵 며느리에게 태기가 비친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저들이 사는 서울로 달려갔다. 섭생을 잘하여 튼실한 놈을 낳을 수 있도록 하라고 격려해 주었다.

가을이 가고 겨울이 들면서 며느리의 배가 점점 일어갔다. 설이라고 아비, 어미 집을 찾아 왔을 때는 배가 제법 불렀다. 좋은 소리 듣고, 좋은 생각하고, 좋은 것 먹으며 태교를 잘 하라고 당부하면서도 아들이랴, 딸이랴 하는 말은 하지 않았다. 그런 걸 알아보지 말라고도 했다. 아들이기를 간절히 바라긴 하지만, 딸이라도 하릴없지 않느냐는 생각에서다.

해산을 앞두고 며느리가 병원을 찾은 것은 사월 초순이 지나갈 무렵이었다. 강둑에 늘어선 벚나무는 바야흐로 다롱다롱 꽃봉오리를 맺어 사나흘 후면 활짝 꽃을 터뜨릴 품을 잡고 있었다. 그 벚나무를 눈질하며 서울로 올라갔다.

우리 내외가 저들의 집에 이른 이튿날, 승민이가 고고성을 울리며 우리에게로 왔다. 병원 유리창 너머로 첫 대면을 했다. 강보에 싸인 채 세상이 신기한 듯 살포시 눈을 뜨고 있었다. 아직 배냇물도 채 마르지 않았으련만 발그레한 살결에 안온한 표정이 맑고 고왔다.

며느리의 손을 잡고, 애 많이 썼다며 위로하고 축하해 주었다.

외조부모도 달려와 어린 것의 탄생을 축복했다.

아들이었으면 좋을 텐데…….” 사돈이 겸연쩍어 하며 말했다.

딸이면 어때요. 다음엔 아들 낳겠지요.”

태연한 척하면서도 은연중에 드러나는 아쉬움은 어쩔 수 없었다. 꼭 아들을 바랐다기보다는 첫째가 손녀니까, 둘째는 손자였으면 좋겠다는 바람이 더 컸다. 집안에 딸만 있거나, 아들만 있어도 바람직하지 않다는 생각을 늘 해왔다. 아내와 가끔 그런 이야기를 하면서도 그 게 어디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일이냐.’고 서로 말하기도 했다.

승민이가 태어난 며칠 후에 우리 마을 강둑의 벚꽃이 활짝 피어 온 강이며 산이 꽃 천지라고 옆집 친구가 꽃소식을 알려왔다. 나는 첫이레를 보고 집으로 돌아오고, 아내는 세이레까지 아들네 집을 돌보다가 내려왔다.

승민이가 태어난 봄이 지나고 여름이 왔다. 여름도 초복을 지나 논들의 벼가 아기 팔 길이만큼은 자라 나날이 푸름을 더해갔다. 승민이도 무럭무럭 자라고 있다고 했다. 눈동자를 또랑또랑 굴리며 고개도 살며시 돌린다고 했다.

어느 날 제 애비가 전화를 했다. 백일을 할아버지, 할머니 앞에서 맞게 하고 싶다는 것이다. 그리하라 했다. 딴은 아비 어미를 좀 즐겁게 해주려는 생각인 것 같았다.

백일을 앞둔 주말에 승민이가 제 아비, 어미와 함께 왔다. 듣던 대로 승민이가 많이 컸다. 며느리는 차에서 내리자마자 승민이를 내 품에 안겼다. 승민이가 반짝이는 눈동자를 들어 할아비를 쳐다보았다. 이 놈이 할아비를 알아볼까. 살구빛 얼굴이 갓 피어난 꽃잎 같았다.

우리의 시골 살이 모습을 처음 본 사돈 내외는 주위 환경도 깨끗하고 경치도 아름답다며, 할아버지, 할머니가 좋은 곳에 사셔서 승윤이, 승민이는 좋겠다고 했다.

갖은 과일과 백설기며 수수팥떡으로 백일 상을 차렸다. 과일은 사돈네가 마련해 왔다. 소파 위에 좌대를 놓고 승민이를 앉혔다. 제법 의젓하게 몸을 가누어 앉았다. , 이놈이 무얼 안다고 슬쩍 미소를 짓는다. 모두들 박수를 치며 환호했다. 아무 탈 없이 무럭무럭 잘 자라 몸도 마음도 건강한 사람, 남과 더불어 따뜻하게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이 되기를 빌었다. 다시 박수를 치며 어린것의 앞날을 축복했다.

그 날 신문에는 소금 장수, 택시 기사, 국숫집 주인, 일식집 사장, 간호, 안경점 사장, 트럭 운전사, 주부, 성직자 등 세상의 온기를 지켜온 아름다운 사람들이라며 가슴에 훈장을 단 스물네 명의 모습이 어딘가 닮은 이 사람들'착한 사람들'의 얼굴입니다라는 제목과 함께 커다랗게 나 있었다.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봉사와 선행을 실천해 온 숨은 공로자에 대해 국민의 직접 추천을 받아 나라에서 훈장을 달아주었다고 한다.

승민이가 앞으로 살아갈 세상이 이런 사람들만 사는 세상이 되면 좋겠다고 했다. 착한 사람들 속에서 착한 사람 되어 살기를 빌었다.

오늘 이 좋은 소식이 나있는 걸 보니 승민이 앞날에 좋은 일 많을 것 같네.”

승민이가 세상 햇빛을 받은 지 백일을 기념하는 밤이 환호와 축복 속으로 새록새록 깊어갔다.(2011.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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