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우헌수필

텃밭이 좋다

이청산 2011. 6. 23. 11:42

텃밭이 좋다


상추, 적상추, 고추, 초당고추, 부추, 피망, 치커리, 들깨, 청경채, 복분자. 케일, 샐러리, 취나물, 곰취, 토마토, 돌나물, 방울토마토, 실파, 대파, 조선오이, 가시오이, 가지, 감자, 강낭콩, 옥수수, 녹두, 호박, 목화……. 모두 텃밭에 살고 있는 식구들이다.

아내가 장에 가서 또 모종을 사왔다. 오이고추와 토마토 몇 포기를 샀는데 조선고추 몇 포기는 끼워 주더란다. 그렇게 많이 심어 놓고도 모종 욕심은 그치지 않는다. 한 가지를 많이 심은 것이 아니라 조금 조금씩 여러 가지를 심었다. 상추, , 부추, 고추, 감자는 몇 고랑을 심었지만 어떤 것은 한두 포기를 심은 것도 있다. 여기저기 올망졸망 심고 가꾸고 하는 데서 재미를 느끼는 것 같다.

왜 한촌에 사느냐 물으면 푸성귀를 가꿀 수 있는 텃밭이 있어 살고, 언제나 오를 수 있는 산이 있어 산다고 말해야 할 것 같다. 몇 년을 두고 그려왔던 꿈의 삶이었다. 한촌에 이삿짐을 푼 것은 생애의 한 막을 끝낸 이월 말이었다. 삼월에는 언 땅이 녹기를 기다리면서 마당을 꾸몄다. 마당의 절반 이상을 텃밭으로 삼았다.

사월이 오고 봄이 익어갔다. 이웃이 기계를 가져와 밭을 갈아 주었다. 그 때부터 아내가 바빠졌다. 아내는 텃밭에 신명을 거는 재미로, 나는 산에 오르는 재미로 한촌을 사는 것처럼 되어 갔다. 나는 산을 오르내릴 때 아내는 텃밭에 시간을 쏟아 넣었다. 나는, 아내가 필요하다면 손을 좀 보태 줄 뿐이지만, 아내는 온통 이것저것 심고 가꾸는 재미로 사는 것 같았다.

아내는 둥근 체를 사 와서 흙을 쳐서 돌을 골라냈다. 동네 사람들이 보고 밭에 돌이 좀 있어도 괜찮다고, 오히려 물 빠짐이 좋다고 해도 막무가내다. 돌에 어떻게 가녀린 뿌리를 닿게 하겠느냐는 것이다. 따는 텃밭에 쏟는 애정인 것 같았다. 흙을 골라 골을 지었다.

강둑길의 벚꽃이며 온갖 산꽃들이 찬란하던 사월이 가고 오월이 왔다. 텃밭이 점점 푸르러져 갔다. 골을 덮어씌운 비닐 안의 씨감자에서 촉이 올라와 제법 자랐다. 옥수수가 성큼 올라왔다. 손가락 길이 만하던 고추 모종이 제법 자랐다. 고추가 달리기 시작했다. 상추도 솎아 먹을 수 있을 만큼 자랐다. 파 심어 둔 것은 조금씩 뽑아 찬거리로 쓴다. 가지도 쑥쑥 자라고 있다. 이웃에게 얻어다 심은 돌나물도 뜯어서 무쳐 먹을 수 있게 되었다.

고추가 제법 굵어져 뚝 따내어 된장에 쿡 찍어 먹을 수 있게 되었다. 밭고랑의 풀을 뽑는데 이랑에서 계란 같은 것이 툭 튀어 나왔다. 감자였다. 어느새 이렇게 자라다니! 아내가 탄성을 질렀다. 그런 것들이 자랄수록 아내의 손길은 더욱 분주해졌다.

아내가 달라졌다. 사람이 변했다. 이곳에 오기 전엔 아프다는 말을 자주 했었다. 손발도 잘 저리고, 심장도 좋지 않고, 까닭 없이 체중이 줄면서 여위어 가기도 했다. 그래서 병원에도 자주 갔었다. 뚜렷한 병명도 나오지 않고, 두드러진 증세도 별로 없으면서 아내는 힘들어 했었다. 사는 일이 힘들어서든지, 함께 사는 사람이 힘들게 해서든지 그 원인이야 있을 수 있겠지만, 여러 가지 약을 쓰고, 갖은 섭생을 해도 회복이 쉽지 않았었다.

한촌에 삶의 터를 잡고 두어 달을 사는 사이에 아내에게서 아프다는 말이 사라져 갔다. 여윈 몸이 크게 일지는 않았지만, 핏기가 좋아지고 검게 그은 살갗이 탄력을 더해가는 것 같았다. 무슨 치료를 특별히 한 것도 아니었다. 아내가 어떻게 아픔을 잊을 수 있었을까. 혹 텃밭에 여러 가지 것들을 심고 가꾸고, 가꾼 것들이 자라나고, 싱그럽게 자라나는 그 모습들을 보고 하는 사이에 아내가 아픔을 잊어버리게 된 건 아닐까. 지금으로 보아서는 원인을 거기에서밖에 찾을 수가 없을 것 같다.

한촌 생활이란 불편한 게 참 많다. 생필품 가게도 멀고, 병원도 약국도 멀다. 무엇 하나 구하려 해도, 용전이 필요해 농협엘 가려 해도 읍내까지 나가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나 한촌엔 좋은 것도 참 많다. 공해에 찌들지 않은 깨끗한 공기가 좋고, 푸르고 맑은 산천이 좋고, 그 속을 사는 사람들의 인심이 좋다.

무엇보다 좋은 것은 싱싱한 생명력을 얻을 수 있는 텃밭인 것 같다. 정성을 다해 가꾸는 재미도 좋지만, 내 땀의 결실을 내가 섭취하는 희열감도 텃밭이 주는 커다란 혜택이다. 거기에다가 텃밭이 육신의 고통까지도 다스려 주는 것이라면, 세상에 이 보다 더 좋은 게 또 있을까. 사람살이에 없어서는 안 될 사랑하는 일말고는 텃밭 가꾸는 일이 제일 좋은 것 같다.

이 한촌, 그리고 마당 텃밭이 좋다.(2011.6.22.)


'청우헌수필' 카테고리의 다른 글

큰일 났습니다  (0) 2011.07.11
대문을 괜히 달았다  (0) 2011.07.06
주지봉 당신  (0) 2011.06.12
사월이 갔다  (0) 2011.05.05
이사하던 날  (0) 2011.03.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