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우헌수필

사월이 갔다

이청산 2011. 5. 5. 17:41

사월이 갔다



사월은 찬란했다. 어딜 둘러봐도 산꽃이 만발했다. 생강나무꽃, 산수유꽃, 산벚꽃, 산복숭아꽃, 산매실, 진달래, 개나리, 이팝나무꽃, 조팝나무꽃……. 붉고 희고 희붉은 빛, 진분홍 연분홍, 연두빛 유록빛, 연녹색, 진녹색……. 산은 현란한 빛의 잔치를 벌이고 있었다.

꽃은 산만이 아니었다. 푸른 물이 흐르는 강둑 위에 늘어선 벚나무들은 가지마다 하얀 눈꽃을 피워냈다. 바람이 잎새를 간질이자 유쾌하고 즐거운 듯 꽃비를 뿌려댔다. 꽃은 물에 흘러 떠다녔다. 푸른 하늘 위에 얹혀 또 한 판 꽃 그림을 그려내었다.

어쩌면 좋아, 어찌 하면 좋아! 딱히 어떻게 할 수도 없는 가슴이 오히려 답답했다. 정다운 친구와 함께 꽃 그늘에 앉았다. 꽃 이파리가 술잔에 떨어졌다. 꽃잎 채 마셨다. 나의 살던 고향은 꽃피는 산골을 흥얼거렸다.

사람들은 꽃길을 걸었다. 건강 걷기라 했던가, 이름은 무어라도 좋았다. 꽃비를 맞으며 걸음도 가볍게 강둑 길을 걸었다. 그 길을 돌려오는 곳에서 누가 행운권을 나누어주었다. 이 꽃길을 걷는 게 바로 행운인 걸! 꽃길 걷기를 마친 사람들은 그 강기슭 숲 속에 모였다. 색소폰 가락이 꽃잎 따라 허공을 정겹게 돌고, 꽃잎 빛깔을 닮은 막걸리 잔이 꽃핀 가슴들을 적셨다. 꽃잎들의 춤사위 같은 춤판이 벌어졌다. 밤이 깊어갔다. 불빛에 비친 꽃잎은 또 다른 빛깔로 사람들을 설레게 했다. 흥성한 잔치 판이 낭자해져도 빛이 된 꽃잎들은 여전히 밤하늘을 하얗게 수놓고 있었다. 이대도록 아름다운 저 꽃들-.

그 어느 날, 한촌의 꽃 소식을 들은 화가 친구가 캔버스를 들고 달려왔다. 친구와 함께 이젤과 화구통을 들고 사월, 그 봄빛이 무르녹은 길을 한참 걸었다. 친구는 이 사월을 모두 캔버스에 담고 싶다고 했다. 연둣빛 이파리들 속에 조팝나무,

개나리, 진달래가 만발한 산자락 아래 개울가에 앉았다. 캔버스를 이젤에 걸었다.

가느다란 붓이 경쾌한 사위를 그리며 춤을 추기 시작했다. 친구는 봄 속으로 꽃 속으로 사월 속으로 깊게 아주 깊게 빨려 들고 있었다. 친구가 꽃 속으로 침잠해 들어가자 꽃이며 나무들은 친구의 캔버스 속으로 다투어 빨려 들어왔다. 맑게 흐르는 개울물이며 바위들도 캔버스에 떡하니 자리를 차지하고 앉았다. 사월이 온통 캔버스 속에 다 들어와 버렸다.

또 그 사월 어느 날, 창연한 빛 속의 어느 유적지를 거닐고 있었다. 더께 낀 고색의 향기에 젖고 싶었다. 그 날 우리를 적신 것은 고풍의 향취를 담고 있는 유적보다 오래 된 나무에서 찬연히 피어난 꽃들이었다. 고색 짙은 우람한 가지들 위에 흐드러져 있는 목련이며 벚꽃, 사월은 그 꽃잎을 타고 찬란히 피어나고 있었다. 그 그늘 아래서 정말 베르테르의 편지를 읽어도 좋겠고, 그리운 사람에게로 긴 사연의 편지를 써도 좋을 것 같았다.

그 사월이 갔다. 불꽃놀이 같은 사월이 갔다. 찬란한 꽃의 기억을 남기고 갔다. 아, 그 꽃은 생명이었다. 꽃이 진 자리에 푸른 잎을 남기고 간 사월-. 사월이 머물던 자리에 푸른 생명 빛이 약동했다. 논들의 검은흙이 속살을 드러냈다. 사월의 꽃이 피어날 때까지 비어있던 수로에 맑은 물이 흐르기 시작했다. 그 물은 논들로 흘러들고 농군의 손길이 분주해졌다. 모판에 파릇파릇 어린 싹들이 고개를 들어 세상의 빛을 쪼이기 시작했다. 종달새가 날아오르고 뻐꾸기 소리가 산골짝을 깨운다.

이 생명들을 잉태하기 위하여 사월의 꽃이 그리도 찬란했던가. 이 푸름을 위하여 꽃잎 뜬 술잔을 들고, 꽃길을 그리 유쾌하게 걸었던가. 화가가 달려와 사월을 담고, 창연한 유적보다 더 그윽한 향기를 날렸던가. 그 사랑을 남겼던가. 이 푸름을, 이 생명을 위하여-.

그렇게 사월이 갔다.

 

돌아온 사월은

생명의 등불을 밝혀 든다

빛나던 꿈의 계절아

눈물 어린 무지개 계절아
 

               -박목월, 사월의 노래 ♣(2010.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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