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우헌수필

이사하던 날

이청산 2011. 3. 3. 15:05

이사하던 날



이사를 한다. 제1막의 삶을 접고 제2막의 삶을 지어나갈 새집으로 이사를 한다.

이삿날을 주말로 잡고 이사 업체와 계약을 했다. 그런데 주말에는 전국적으로 비가 많이 올 것이라는 일기예보가 나왔다. 이사를 하는데 비가 오면 어쩌나, 걱정이 깊어졌다. 업체에 연락하여 짐을 싣는 시간을 조금이라도 당겨 달라고 했다. 오전에는 강수 확률이 낮다가 오후로 갈수록 높아진다고 했기 때문이다.

이삿날이 왔다. 하늘은 맑고 푸르렀다. 다행이었다. 짐을 실을 차도 일찍 도착했다. 언제 하늘이 흐려지고 비가 올지 몰라 서둘러 짐을 실었다. 상자에 담은 일상용품들을 하나하나 실었다. 장롱이며 탁자며 소파며 식탁은 그대로 두었다. 사택의 비품이기 때문이다. 마감하는 제1막의 삶과 함께 새 주인에게 사택을 비워 주고 떠난다.

이삿짐 속에는 귀중한 선물이 들어 있었다. 화가 친구가 그려준 두 점의 그림이다. 하나는 새 삶의 자리에서 늘 볼 수 있는 산과 내를 그린 풍경화이고, 또 하나는 미소를 짓듯 피어나고 있는 장미꽃을 그린 것이다. 어디를 가서 살더라도 산과 내처럼 변치 않는 영원한 마음으로, 미소짓는 장미처럼 따뜻한 마음으로 살라고 그려준 것 같았다. 행여나 다칠까봐 두꺼운 상자로 고이 싸서 차의 가장 안전한 자리에 실었다.

짐을 다 싣고 떠나려는 순간, 지난날들이 주마등처럼 뇌리를 스쳐갔다. 2년 반 전에 내 생애의 마지막 일터를 찾아 이곳에 왔었다. 마지막 일터의 일을 멋지게 해내고 싶었다. 동료들과도 화기롭게 지내고 싶었다. 마음먹은 모든 일들을 다 이루어내지는 못했지만, 어느 정도의 성과는 없지 않았다. 동료들과 화목하게 지낼 수 있었던 것이 제일 큰 보람이라 할 수 있을 것 같다. 동료들의 우정어린 배웅을 받으며 일터를 나설 때, 일터에서의 행복했던 지난날이 다시 돌아 보였다.

그 행복한 나날을 잘 건사해 주었던 사택을 비우고 떠난다. 그 날들 속에서 아내도 나도 병원 신세를 지는 신고를 겪기도 했지만, 어디에선들 그런 어려움이 없으랴. 건강을 다시 찾아 한 생애를 마감하고 떠날 수 있어 여간 다행스럽지 않았다. 그 사이에 한적한 어느 시골에 은퇴 생활을 꾸려나갈 조그마한 집도 지어 놓았다. 그 새집으로 달려간다. 제2막의 새로운 삶을 찾아간다.

종일을 두고 비는 오지 않았다. 날은 화창하고 볕도 따스했다. 일기예보가 틀렸다. 아니, 하늘이 나의 새로운 삶을 축복해 주는 것 같았다. 하늘처럼 밝고 맑은 마음으로 새 삶의 터에 당도했다. 하늘의 축복을 받으며 짐을 내린다. 내 새로운 삶을 하나하나 내린다. 새집에 새 삶을 차곡차곡 들인다.

짐을 다 내려 갈 무렵 옆집에서 부른다. 점심을 준비해 놓았다는 것이다. 이사 업체 인부들 점심까지도 다 마련했다고 한다. 갖가지 나물로 비빔밥 상을 차려 놓았다. 이웃의 인심을 감탄하며 맛있게 먹었다. 인정이 오늘 햇살처럼 따스했다. 그 따사로운 인정은 새 삶의 터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를 가르쳐 주는 것 같기도 했다.

짐을 다 내리고 이삿짐 차는 떠나갔다. 인부들도 다 돌아갔다. 옷장이며 냉장고며, 책상과 책장은 제 자리에 들여 놓아주고 갔다. 책장과 책상은 서재로 쓸 이층 방에 올렸다. 동쪽에도 창이 있고, 남쪽에도 창이 있는 방이다. 책상은 남창 앞에 놓고 책장은 북쪽 벽에 기대어 놓았다. 책상에 앉아 동쪽으로 고개를 돌리면 산과 내와 들이 보이고, 남쪽으로 향하면 정원 같은 동산이 다가선다. 새 삶을 이루어나갈 공간들이요, 풍경들이다.

벽에 시계와 액자들을 걸었다. 친구가 그려준 풍경화는 서재 방의 서쪽 벽에 걸고 장미꽃은 계단 벽에 걸어 서재에 있을 때나 서재를 오르내릴 때면 늘 보이도록 했다. 애써 그림을 그려준 정성과 그 그림에 깃든 친구의 마음을 언제나 새기고 싶었다.

이사의 날이 저물었다. 거실에 널브러져 있는 짐 상자들은 차차 정리하기로 하고, 옷을 털고 저녁 먹을 준비를 하려는데, 이웃에서 또 불렀다. 저녁을 차려 놓았다는 것이다. 이웃 서너 집이 함께 모였다. 이사를 환영하고 축하한다고 했다. 오늘의 이사 이야기를 화제 삼으며 술잔을 주고받았다. 옆집 성 선생이 웃으며 말했다.

"이 선생 새로운 삶을 축복한다고 날씨도 그리 좋았지요, 이웃들도 이리 좋아하지요. 다 이 선생 복이지요.!"

"고맙습니다. 이 축복에 보답하기 위해서라도 서로 정답게 살 수 있도록 애쓰겠습니다."

술이 몇 순배 돌고, 함께 힘을 모아 동네를 더욱 화목하게 가꾸어 나가자는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에 이삿날의 밤이 이슥해져 갔다.

집에 돌아와 자리에 누우니 '영원한 마음'을 그린 친구의 풍경화가 내려다보고 있었다.♣(2011.3.1)

 


'청우헌수필' 카테고리의 다른 글

텃밭이 좋다  (0) 2011.06.23
주지봉 당신  (0) 2011.06.12
사월이 갔다  (0) 2011.05.05
생의 한 막을 종업하며  (0) 2011.03.03
퇴임식에서  (0) 2011.03.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