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우헌수필

생의 한 막을 종업하며

이청산 2011. 3. 3. 15:01

 [퇴임사]                                                        
생의 한 막을 종업하며



바쁘신 일 많으실 터인데도 불구하고 우리 학생들의 학년 종업식과 저의 퇴임식에 참석해 주신 내빈 여러분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사랑하는 인동고 재학생 여러분!

어제 선배들의 졸업에 이어 오늘은 여러분들이 학년을 종업하고, 나도 오늘 교직 인생을 종업합니다. 한 학년을 마치면서 여러분도 지난날과 미래에 대한 많은 생각을 하고 있을 줄압니다만, 인생의 한 막을 종업하는 나도 오늘 이 자리에 서니 만감이 교차합니다.

여러분은 지난 한 해 동안 열심히 공부하여 어제 졸업한 선배들은 양재원 군이 서울대학교에 당당히 합격한 쾌거를 비롯하여 각자 원하는 대학에 다들 영광스런 합격을 하였고, 여러분도 성실하게 면학 정진한 성적을 가지고 한 학년을 오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저는 오늘 퇴임식을 거행하는 문제를 두고 조금 고민을 했습니다. 남들이 퇴임할 때 오늘 같은 퇴임식장에 가족과 친지, 친구, 지역 인사들을 초청하여 성대한 퇴임식을 거행하는 것을 보았습니다만, 저는 도저히 그렇게 할 자신이 없었습니다. 운영위원님들이나 학부모님들 그리고 발전추진위원님은 학교 가족이니까 모시게 되었습니다만, 저는 다른 분들을 모셔서 내 교직 평생을 이렇게 살았노라 하고 내놓을 게 없는 것이 참 부끄럽게 생각되었습니다.

제 자식들을 불러 놓고 '아비는 이렇게 살았노라'라고 말할 것도 없고, 친척, 친지, 지역 인사님들께도 '이런 일을 하고 교직 한 평생을 마칩니다.'하고 내 놓을 게 없는 것이 여간 부끄럽지가 않습니다. 그래도 저의 떠남을 학교 가족들에게조차 알리지 않는 것 또한 예의가 아닐 듯하여 이렇게 조촐한 자리에서 저의 떠나는 인사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조선 정조 때의 실학자 다산 정약용(丁若鏞, 1762∼1836)이 오랜 유배생활을 마치고 고향에 돌아와 1822년 회갑을 맞이하여 자신의 삶과 학문적 업적을 정리한 '묘지명'을 스스로 지으면서 자신을 향해 "네가 너의 잘한 일을 적는다면 몇 편 되겠지만, 너의 숨겨진 허물을 기록하면 책은 끝이 없으리. 너는 사서(四書)와 육경(六經)을 안다고 말하지만 그 행실을 살핀다면 부끄럽지 않을 수 있겠는가?"라고 치열하게 자기 반성을 하고 있습니다.

대학자인 다산 선생마저도 지나온 자신의 생애를 이렇게 말하고 있는데 하물며 저야 무엇을 말할 수 있겠습니까? 저의 37년 교직 평생을 돌아보아 잘 한 일을 적는다면 몇 편은커녕 몇 줄도 적을 수 없을 것 같고, 사서와 육경을 알기는커녕 그럴 듯한 일 하나 해 놓은 것이 없는 것 같습니다.

 

돌이켜보면 지금 각계 각층에서 자신의 역할을 성실하게 수행하고 있는 제자들은 없지 아니합니다만, 저들이 성실한 사람이 된 것이 어찌 저 혼자만의 자랑이겠습니까? 제가 잘 가르쳐서라기보다는 저들이 열심히 노력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근년을 돌아보면 교장이 된 이후 마성중학교에서 한·일 교류를 추진하여 학생들과 선생님들로 하여금 국제 이해의 폭을 넓히게 하고, 울릉종고에서 '농산어촌 우수고 사업'을 유치하고 실행하여 학교를 일신하고, 지금 우리 학교에서 작년에 교육과학기술부로부터 '자율형 공립고' 지정을 받아 한 해 동안의 준비 작업을 거쳐서 오는 3월1일자로 새 학교 개교를 앞두고 있고, 이번 졸업생들은 서울대학교를 비롯한 여러 유명 대학에 대거 합격한 것을 큰 자랑으로 삼고 싶습니다만, 이런 일들도 어찌 저 혼자 이룩한 일이겠습니까? 지금 여기 계신 교감선생님을 비롯한 여러 선생님들 그리고 학부모님들의 성원이 합쳐져 이루어진 결정체일 뿐입니다.

생각해 보니 저는 많은 사람들로부터 도움만 받고 살아왔을지언정, 남에게 도움을 베풀지는 못한 채 한 생애를 살아왔던 것 같습니다. 이 자리를 빌어서 사랑하는 학생들, 존경하는 선생님과 운영위원님, 학부모님, 발전추진위원님을 비롯해서 그간 저와 인연을 함께 해 왔던 모든 분들에게 다시 한번 고개 숙여 깊은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막상 떠난다고 생각하니 지나온 일들이 자꾸만 돌아 보입니다만, 우리 인동고등학교에서 여러 선생님들 그리고 여러분들과 함께 했던 2년 반 동안이 제 교직 생애에서 가장 행복했던 시간이었던 것 같습니다. 제가 늘 주창했던 Vision, Impression, passion 즉 VIP교육의 기치아래 우리가 추구해야 할 비전을 가지고, 학부모님들께 감동을 드리기 애쓰며 열정을 다해 가르치고 배우기를 애써 왔던 시간들이 아니었습니까? 제가 아무리 주창한들 선생님들과 여러 학생들이 뜻을 같이 해주지 않으면 이루어질 수가 없는 일이거늘, 모두 한결 같은 생각으로 뜻과 마음을 모아 주시어 즐거움과 보람 속에 보낸 지난 시간들이 저에게는 참으로 행복했습니다.

 

사랑하는 인동고 여러분!

이제 여러분은 오늘로써 한 학년을 마치고 이제 희망찬 새봄을 맞아 한 학년씩 진급하여 새 학년으로 나아가 다시 새로운 공부를 하게 될 것입니다. 나도 이제 한 생애를 끝내고 희망에 찬 새로운 생애를 시작하려 합니다. 저는 조용한 시골로 가서 새로운 삶을 엮어 나가고자 합니다. 여러분의 진급을 진심으로 축하하고 크게 격려합니다. 저의 새로운 생애도 여러분이 좀 축하해 주시기 바랍니다.

막상 교단을 떠나면서 다시 생각해 보아도 제가 평생을 살아온 학교를 위해서 아무 것도 해 놓은 일이 없다는 것이 여간 부끄럽지가 않습니다. 학생 여러분! 그리고 선생님 여러분! 외람스러움을 용서해주신다면 한 말씀만 드리겠습니다. 여러분들께서는 저처럼 부끄러운 생애가 되지 않도록 지금 맞이하고 있는 생애의 모든 순간들을 더욱 알차고 보람되게 꾸려 나갈 수 있도록 해 달라는 것입니다.

저는 이제 부끄러운 삶이나마 한 생애를 마무리하려 합니다. 문득 지난해 3월 무소유의 평생을 살다가 아름다운 마무리로 입적하신 법정스님(1932∼2010)의 말씀이 생각납니다. 바로 '아름다운 마무리'라는 글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아름다운 마무리는 삶에 대해 감사하게 여긴다. 내가 걸어온 길 말고는 나에게 다른 길이 없음을 깨닫고 그 길이 나를 성장시켜 주었음을 긍정한다. 자신에게 일어난 일들과 모든 과정의 의미를 이해하고 나에게 성장의 기회를 준 삶에 대해, 이 존재계에 대해 감사하는 것이 아름다운 마무리이다."

그렇습니다. 저는 교직 말고는 제가 걸어올 수 있는 길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 길은 제 삶을 꾸준히 성장시켜 왔습니다. 여러분 같은 학생들과 학부모님들 그리고 존경하는 여러 선생님들이 계셨기로 저는 성장해 올 수 있었고, 지금까지 살아올 수 있었습니다. 다시 한번 깊이 감사드리면서 이제 제 말씀을 마치려 합니다.

'자율형 공립고 인동고등학교'라는 새 학교의 새 학년이 되는 학생 여러분들은 더욱 큰 뜻과 희망을 품고 학업에 정진해 주기 바라며, 학부모님과 선생님들께서는 하시는 일마다 행운이 가득하고 언제나 건강 건승하시기 빌며 퇴임사에 갈음합니다. 감사합니다.♣(2011.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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