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산수필

어느 봄날의 외출에서

이청산 2010. 4. 30. 16:04

어느 봄날의 외출에서



모처럼 지상으로 내려온 포근한 햇살이 사람을 불러냈다. 무슨 이상 기류인지 봄도 온 듯 만 듯, 몇 날 며칠을 두고 찌푸린 하늘 뒤에 숨어 바람만 일으키던 햇살이 봄날 어느 일요일 구름을 걷어 제치고 지상으로 성큼 내려 왔다.

햇살이 쉽사리 내려오지 않아도 시절을 놓칠 수 없다는 듯, 지상에서는 돋아야 할 새싹은 돋고 피어야 할 꽃들은 피어났다. 개나리며 진달래도 피고, 벚꽃이며 복사꽃도 피어났다. 나뭇가지엔 애잎이 돋고, 진달래 꽃잎 사이로 파란 이파리가 돋기 시작할 때까지도 양춘의 햇살은 좀처럼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햇살이 자꾸 문을 두드리던 아침나절까지도 모른 체하고 있었다. 너무 오랜만이라 믿을 수 없었다. 창이 점점 밝아지면서 마침내 푸른 하늘이 방 안으로 훌쩍 들어앉았다. 문을 열지 않을 수 없었다. 드디어 그 햇살 속으로 유혹 당하고 말았다. 오랜만의 해후가 좀 야속하기도 했지만, 반가운 마음이 한결 컸다. 봄 다 가기 전에 봄과 만나고 싶었다.

무작정 길을 나섰다. 달리다가 꽃 피고 새 우는 곳이면 어디라도 발길을 멈추리라 생각했다. 곱게 퍼진 햇살이 푸른 하늘과 어울리면서 맑고 상쾌하면서도 따스했다. 길을 달려나갔다. 봄 찾아가는 길을 너무 늦게 나선 탓인가. 꽃 피고 잎 피던 봄은 뒷모습만을 남긴 채 멀어져 가고 있는 것 같다. 가로에 늘어선 벚나무는 꽃들은 자취도 없어지고 파란 잎새들이 돋아나고 있다. 산색을 수놓던 하양, 노랑, 분홍도 거의 보이지 않고 연하고 짙은 초록들이 물결처럼 일렁인다.

무언가를 잃어버린 것 같다. 고이 보듬던 것을 놓쳐버린 것 같다. 이대로 지나칠 수는 없다. 어드메쯤에 봄의 앞모습이, 아니면 옆모습이라도 분명 남아 있을 것이다. 사람을 불러 내놓고 뒷모습만 보여 주지는 않을 것이다. 윗녘을 향해 달려 나아간다. 구미를 벗어났다. 해평을 지나고 도개를 지나고 단밀을 지나고 중동을 지났다. 드디어 산에 들에 가는 봄의 귓불이 보이기 시작한다. 흐드러진 산벚꽃이 조금씩 보이는가 싶더니 들판에는 배꽃, 복사꽃이 커다란 화원을 이루고 있기도 한다. 상주에서 북쪽을 향해 고속도로를 달리는데 산야에 꽃 빛이 점점 짙어져 간다. 잊고 있었던 법정스님의 말씀이 문득 떠오른다.

"우리 곁에서 꽃이 피어난다는 것은 얼마나 놀라운 생명의 신비인가. 곱고 향기로운 우주가 문을 열고 있는 것이다."

차가 윗녘으로 치달을수록 그 신비경 속으로, 그 우주 속으로 점점 깊이 침잠해 가는 듯했다. 작정 없이 나선 길이었지만, 길을 달려나갈수록 가보고 싶은 곳, 가보아야 할 곳이 머릿속에 잡혀갔다. 그곳, 살고 싶고 가보고 싶은 마을이 있는 그곳은 어떠할까. 봄의 어떤 모습이 남아 있을까.

머릿속에 은근히 그려진 목적지-. 진남교반은 경북팔경 중에 제일경이라 했다. 깎아지른 듯한 층암절벽 아래로 유리알 같은 강물이 휘돌고 그 절벽 그 산에 피는 봄꽃이 유난히 아름다운 곳, 감돌며 흐르는 강물처럼 굽이져 돌아가는 진남 다리 부근의 경치가 아름다운 교반(橋畔), 강물과 함께 흘러가는 길 위에 터널을 이루고 있는 벚꽃의 찬란한 행렬, 상기도 그 모습 간직하고 있을까. 드디어 문경 마성 진남교반(鎭南橋畔)에 닿았다. 나를 불러낸 봄이 과연 거기 있었다.

고맙게도 머릿속에 그린 대로였다. 봄의 화려한 앞모습이 찬란한 빛깔을 내뿜고 있다. 굽이진 물과 산과 길이 태극 모양으로 함께 어울려 삼태극을 이루고 있다. 하늘과 땅이 분리되기 이전 세상 만물의 원시 상태를 태극이라 하거늘 진남교반은 모든 자연물이 한 덩어리가 되어 절정의 봄을 이루고 있다.

산에는 진하고 연한 초록빛, 붉은빛과 하얀빛들이 마치 프리즘으로 보는 빛깔들처럼 현란한 빛의 세계를 이루고 있다. 만발한 벚꽃 터널을 오가는 사람들은 벚꽃만큼이나 만발한 표정으로 꿈속을 걷듯 소요하고 있고, 절벽 아래 강물에는 울긋불긋한 배들이 또 하나의 커다란 꽃송이를 이루고 있다.

마성 진남교반의 봄은 또 특별한 곳에 있다. 기적이 끊어진 지 오래되어 붉은 녹이 덕지덕지 끼었을 철길이 오히려 찬란한 빛을 내고 있다. 기차가 다니지 않는 철길 위로 봄의 풍광을 가슴 한가득 채운 사람들을 실은 철로자전거가 달리고 있다. 철길을 달리는 자전거 위에 앉은 사람들이 봄을 즈려밟듯 페달을 밟으며 진남교반의 태극 속으로 녹아들고 있다.

바람이 분다. 비가 되고 눈이 된 꽃잎들이 지상의 선량한 사람들을 축복하듯 내려앉는다. 낙화로 날리는 꽃잎, 그 봄-. 문득 잠에서 깬 듯, 세상이 다시 보인다. 가는 봄 그 뒷모습 보기가 아쉬워 남아 있을 봄의 앞모습을 찾아 달려 온 오늘, 나는 지금 어떤 모습으로 어디에 서 있는가.

내년 봄이 오기 전에 삶의 한 막을 내려야 한다. 나도 지금 생애의 흘러간 봄, 그 뒷모습을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사람들은 내 뒷모습을 보며 무엇을 생각할까. 내가 화려했던 봄의 뒷모습을 아쉬워하듯, 그러한 마음을 가질까. 봄은 아름답고 향기로운 것이기에 뒷모습 보는 것이 아쉽지만, 내 지나온 삶은 봄처럼 향기로운 것이었던가. 지나가 버린 세월이 무람히 돌아다 보인다.

새로운 삶을 살아야 한다. 다시 앞모습을 살아야 한다. 오늘 은근히 진남교반을 찾아 온 것은 새롭게 다가올 내 앞모습을 보고싶어서인지도 모른다. 그 평화, 그 아름다움을 찾아온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태극으로 어울린 원시의 아름다움과 함께 딴 곳이 봄의 뒷모습을 보일 때까지도 앞모습을 지키고 있는 진남교반에도 봄꽃은 지고 있다. 언젠가는 뒷모습을 보여주지 않으면 안 된다. 어느 땐가는 뒷모습으로 남아야 한다. 앞모습은 뒷모습을 남기고 뒷모습은 다시 앞모습을 만드는 것을-. 둘이 아니라 하나인 것을-.

봄처럼 살 일이다. 봄꽃처럼 살 일이다. 그 새잎처럼 살 일이다.

"길이 끝나는 곳에서도/ 길이 있다/ 길이 끝나는 곳에서도/ 길이 되는 사람이 있다/ 스스로 봄 길이 되어/ 끝없이 걸어가는 사람이 있다"라고 한 어느 시인의 '봄 길'이라는 시를 생각한다. 마성면 신현리의 진남교반은 내 제2막의 인생을 귀거래(歸去來)로 살아갈 곳이다. 봄꽃처럼 아름답게 살아가고 싶은 곳이다. 다시 와 살게 될 날을 기다리며 아름다워야 할 내 뒷모습이 있는 곳으로 돌아간다, 어느 봄날의 외출에서-.♣(2010.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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