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산수필

봄나들이의 꿈

이청산 2010. 4. 19. 14:12

봄나들이의 꿈



하늘이 흐리고 바람이 불어도 날씨가 아무리 쌀쌀해도, 필 꽃은 피고 눈 뜰 새싹은 눈을 떠가고 있었다. 산야에는 진달래, 개나리가 만발하고 목련이 더는 참을 수 없다는 듯 봉오리를 활짝 터뜨렸다. 계절은 어김없이 흐르고 있다. 봄은 눈 속에만 들어 온 것이 아니라 가슴속에까지 깊숙이 침노하고 말았다. 겨우내 걸려 있었던 마음의 빗장을 활짝 풀게 했다.

"가을에 집을 짓자면 이제 좀 움직여봐야 하지 않을까?"

"그래야겠지요."

퇴임을 대비하여 어느 한촌에 조그만 집터를 마련해 놓았었다. 나나 아내나 집을 짓는 일에는 무지렁이다. 뿐만 아니라 사회생활의 모든 일이 덩둘하기만 하다. 퇴임 후의 일이 걱정스럽게 느껴질 때가 있다.

여태 감감하던 느티나무에 개미 같은 조그만 잎눈이 간간이 보이는 4월의 첫 노는 토요일, 모처럼 하늘이 맑고 푸르렀다. 아내와 함께 문경으로 가는 길을 달렸다. 복사꽃 살구꽃이 눈부시게 핀 과원도 지나고 개나리가 샛노랗게 피어 있는 길섶도 스쳐간다.

지난 날 어느 학교에서 함께 근무하면서 친하게 지냈던 선생님이 있는데, 내가 집을 지으려 하는 곳이 그의 고향 마을과 가까운 곳이다. 마침 그의 형님이 고향의 시 지역에서 건축업을 하고 있다기에 그를 찾아보기로 했다.

정오가 가까울 무렵 문경에 닿았다. 살림집과 함께 있는 그의 사무실엔 나무토막이며 나뭇가지로 여러 가지 형상들을 많이 조각해 놓았다. 특히 솟대 위에 얹는 새가 많았다. 봄날의 푸른 하늘을 향해 날아오를 것만 같은 모양이다.

"단 둘이 살 거라서 조그맣고 단출하게 짓고 싶어요."

"아담하고 예쁘게 지어 드리지요."

"이층에는 방 한 칸만 짓고요."

"단층이면 건축비도 줄이면서 아담하게 지을 수 있습니다."

대화를 나누는 사이에 집의 윤곽이 잡혀가는 것 같았다. 우리가 지을 집을 서로 상상하며 그의 사무실을 나왔다. 집은 봄에 짓는 게 좋다고 하지만, 내년 이월에 퇴임할 텐데 일찍 지어 놓아도 관리가 어려울 뿐 아니라, 건축 자금도 퇴직금으로 충당해야 하니 가을에 짓겠다고 했다.

집터가 있는 마을로 달려갔다. 길가에 늘어선 벚나무에 아직 꽃은 피지 않았다. 아랫녘보다는 봄이 더디 오는 모양이다. 열댓 집이 오순도순 살고 있는 한적한 마을, 그 한 가운데의 조그만 집터-. 아직은 터밖에 없는 곳이지만, 오래 전부터 몸을 붙이고 살았던 곳인 마냥 정겹다.

집은 어느 방향으로 어떻게 앉히고, 대문은 어느 쪽으로 낼까. 마당은 어떻게 꾸미고 텃밭은 어떻게 만들지? 앞뜰에는 어떤 나무 무슨 꽃을 심고, 텃밭에는 무엇을 가꿀까. 그런 건 집 짓고 난 다음에 생각해도 돼요. 집부터 지어놓고 봅시다. 아내의 말에 문득 꿈에서 깬 듯 서로 쳐다보고 웃는다.

무엇 때문인지 아내가 자꾸 여위어간다. 어떤 부인네는 살이 쪄서 걱정이라는데 누구는 살이 내려 걱정이다. 병원엘 가도 뚜렷한 병명도 잡히지 않는다고 한다. 왜 그러냐고 물으면 '당신 탓'이라고 말하기를 주저하지 않는 아내-. 조금만 더 참고 기다려요, 퇴임하면 모든 일 내가 다 할 테니. 공연한 선심인 줄 아는 그 말에 아내가 무슨 위안을 얻을 수 있으랴.

네비게이션은 풍기로 가는 길을 열심히 안내하고 있다. 조그만 도시도 스치고 한적한 들판도 지난다. 검은흙을 헤치며 밭갈이를 하고 있는 농부도 보이고, 무슨 새싹들인지 새파란 빛깔로 덮여 있는 들판도 보인다. 차는 풍기로 든다. 풍기인삼시장에는 인삼도 많다. 갓 캐어낸 듯 싱싱한 모습으로 가랑이를 벌리고 있다. 잘고 굵은 것을 섞어 두어 채를 샀다. 올 봄 들어 처음 나선 나들이 길에 서로의 건강을 기원하는 기념 선물로 삼자고 했다.

풍기인터체인지로 들어 고속도로를 타고 귀로를 달린다. 봄날이 달아나고 있다. 그 날들이 나에게서 빠져나가고 있다. 저쪽의 날들이 이쪽의 날들 곁으로 자꾸 다가선다. 마치 시한부를 살고 있는 것 같다. 가슴이 두근거린다. 그 '두근거림'은 무엇일까. 가는 날에 대한 아쉬움 때문일까. 오는 날에 대한 기대 때문일까.

아름답게 마무리할 일이다. 법정스님의 '삶의 순간순간이 아름다운 마무리이자 새로운 시작이어야 한다.'는 말씀을 생각한다. 그리고 '지나간 모든 순간들과 기꺼이 작별하고 아직 오지 않은 순간들에 대해서는 미지 그대로 열어둔 채 지금 이 순간을 받아들이는' 것이 아름다운 마무리라 한 말씀을 다시 새긴다.

길은 계속 흘러가고 있다. 안동을 지나려는데 하회마을 표지판이 문득 눈에 들어온다. 해가 아직 조금 남았다. 방향을 꺾어 하회마을을 향해 달린다. 오늘 나들이를 그 마을에서 마무리하기로 했다. 정겨운 초가집과 창연한 기와집이 한데 어울린 마을이 노을을 이고 하루를 마무리하고 있었다. 마을은 시간의 두꺼운 더께를 걷어내려는 듯 쓸고 닦아 단장을 새로이 해 놓았지만, 반가는 반가대로 민가는 민가대로 저마다의 삶의 모습들을 간직하고 있다. 그 마을을 품듯이 안고 강물이 돌아 흐른다. 흐르고 있는 물의 모습이 포근하고 아늑하다. 우리 세월의 물도 저렇게 흐르고 있을까. 저렇게 흘러가면 좋겠다.

봄날의 하루가 저문다. 기와집 음식점 대청마루에 편안하게 앉는다. 안동 간고등어 저녁상을 받는다. 동동주 한 잔 곁들인다. 짭조름한 간고등어가 밥맛을 돋운다. 알싸한 동동주 맛도 괜찮다. 모처럼의 나들이에서 느끼는 포만한 자유로움 그리고 유쾌하게 저문 봄날.

다시 귀로를 달린다. 늙어가면서 바랄 게 뭐 있소. 내년부터 새 삶을 살아야 할 텐데, 건강하게 살아야지요. 핸들을 잡은 아내도, 옆에 앉은 나도 머릿속은 '새 삶'에 대한 상상으로 한껏 젖어간다. 네비게이션은 이슥해져 가는 봄밤을 바쁘게 안내하고 있고-.♣(2010.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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