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산수필

하나뿐인 계절

이청산 2010. 6. 2. 11:58

하나뿐인 계절



산길을 걷는다. 해질 무렵이면 늘 걷는 길이다. 숲과 바위가 있고, 진달래꽃 철쭉꽃이 피고, 상수리나무 떡갈나무 노간주나무 소나무가 서 있고, 딸기며 칡넝쿨이 우거진 길이다. 새소리가 들리고 때로는 짐승의 숨소리도 새어나오는 길이다. 퇴근 후면 어김없이 걷는다. 늘 걷는 그 길이지만 풍경은 언제나 같은 풍경들이 아니다.

생강나무가 꽃을 피우고 산수유도 따라 꽃을 피운다. 진달래꽃이 흐드러진다. 산 한가득 분홍빛이다. 벚꽃이 산허리 곳곳을 찬란하게 수놓는다. 산 아래 동네에는 샛노란 개나리꽃이 피어난다. 목련이 새하얗게 피어난다. 꽃봉오리가 팝콘처럼 터진다. 노랗고 불그레하고 하얀 그 빛깔 그 모습의 신비로움이 가슴을 설레게 할 즈음 꽃은 지기 시작하고 꽃 진 가지에 새파란 잎이 돋아난다.

꽃의 계절이 가버렸는가 싶더니 잔잔히 붉은 꽃들이 여기 저기서 또 피어난다. 붉은 꽃들 속에 하얀 꽃이 섞여 있기도 했다. 철쭉꽃이다. 그 현란한 색깔에 마음을 뺏길 무렵 꽃은 또 잎으로 바뀌어 간다. 백일홍 빈 가지에 잎이 돋고 목련 잎은 커져 갔다. 수줍은 듯 살며시 촉을 내밀던 나뭇잎들이 연초록의 조그만 잎들을 피워내더니 색깔이 점점 짙어지면서 잎 손을 커다랗게 벌려 나간다. 산에서 아카시아 꽃이 짙은 향기를 뿌릴 즈음 어느 집 울타리의 장미는 탐스러운 봉오리를 핏빛으로 피워낸다.

계절의 변화가 찬란한 신비를 내뿜고 있다. 저 여린 가지들 속에 그리 무진장한 힘을 갈무리해 두었다가 저리도 무진장한 꽃을 피우고 잎을 돋워낸단 말인가. 꽃들도 나무도 저 혼자만 피고 저 혼자만 살고 있는 게 아니다. 오케스트라의 어울림처럼 계절 속을 어울려 있다가 어느 것은 꽃을 피워내고 어느 것은 잎을 피워 내고, 어느 꽃이 지고 나면 또 어느 꽃이 피어나고, 꽃 진 자리에는 잎을 피워 열매를 이룰 준비를 하면서 감미롭고도 장엄한 교향곡을 연주하고 있다. 마치 잘 짜여진 무슨 조직체처럼 저마다의 시간에 저마다의 임무를 띠고 저마다의 색깔을 뿜어 계절을 엮어 내고 있다.

저 자연의 질서와 하모니 속에서, 저 계절의 변환과 조화 속에서 저들의 색깔과 더불어 길이 머물고 싶다. 저 풋풋한 계절의 향기 속에서 언제까지나 호흡하고 싶다. 그러나 어찌하랴, 저들도 나도 영원을 기약할 수는 없는 것을. 내 걷는 길의 풍경이 자꾸만 변하듯, 나도 나의 시간도 자꾸만 흘러가고 있는 것을.

법정 스님은 일기일회(一期一會)라 하셨던가. 모든 순간은 단 한 번의 시간이며 모든 만남은 단 한 번의 인연이라 같은 시간이란 없고 같은 만남이란 없다는 말씀이겠다. 순간 순간이 모두 소중한 것이라는 가르치심이겠다. 그러나 저들은 계절을 다시 살 수 있지 않은가. 작년에 피웠던 꽃을 올해 또 피울 수 있고, 올해 내밀었던 잎새를 내년에 또 내밀 수 있지 않은가.

나는 가야 한다. 결코 다시 돌아올 수 없는 길을 걸어가야 한다. 다시 돌아오지 않을 하나뿐인 계절 속을 뚜벅뚜벅 걸어가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나 그렇게 앞만 보고 휑하게 걸어갈 수만도 없다. 어느 날 어느 자리에서는 모든 것을 내려놓으란다. 가고 있는 길도 벗어나란다. 정년 퇴임을 하란다. 정년이란 무엇이고 퇴임이란 무엇인가. 무엇을 정지해야 하고 무엇에서 물러나야 하는 것인가. 누가 이 물음의 답을 들려 줄 수 있단 말인가.

오늘도 그 길을 걷는다. 무성한 신록이다. 떡갈나무 잎새 하나가 문득 커다란 손을 내민다. 반갑게 손을 잡는다. 헤어질 날이 멀지 않다 생각하니 언제 보아도 새로이 반갑기만 하다. 너는 내년에도 봄을 맞고 여름을 맞아 길손을 향해 다시 이렇게 손을 내밀 수 있겠지만, 나는 너에게 손을 줄 수 있는 날이 그리 많지 않다. 머잖아 이 산길을 떠나지 않으면 안 된다. 떠나는 그 날까지라도 따뜻하게 체온을 나누자구나. 너는 다시 오는 계절에 또 이렇게 손을 내밀 수 있을 것이련만-.

불현듯 정년 퇴임의 뜻이 다시 새겨진다. 계절을 다시 맞이하란 말이다. 이 떡갈나무가 다시 맞은 계절로 무성한 잎 손을 벌릴 수 있듯이, 또 하나의 계절을 맞아 새로운 잎을 피워 다시 무성해지란 말이다. 하나뿐인 계절이 아니라, 또 하나의 계절로 향할 수 있기 위해 길을 바꾸어 나아가라는 뜻이다. 그래서 다시 푸른 계절을 살아, 새로운 싹도 틔우고 꽃도 잎도 피우고 열매도 맺어 보란 뜻이다.

그래, 그렇게 살아야겠다. 남은 시간들을 그렇게 갈무리해야겠다. 나무들이 계절의 끝자락에서 새로운 계절을 맞을 채비를 하듯, 이제 한 생애의 막을 내리려는 한 계절의 끝자락에서 새로이 맞을 계절의 준비를 차근히 해 나가야겠다. 나무들이 침묵의 맨살로 새 계절을 준비하듯 비워진 마음으로 조용히 새 계절을 준비해야겠다. 다시 무성해질 계절을 위하여-.

오늘도 산길을 걷는다. 이 산에서의 이 계절 마지막 발자국들을 찍어 나간다.

다시 올 계절 어느 산길에선가 새로이 찍을 발자국들을 가볍게 새겨 나간다.♣(2010.5.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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