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산수필

제주 명장 장공익

이청산 2010. 6. 9. 17:02

제주 명장 장공익



 장공익(張公益) 옹이 돌을 쪼고 있는 금능석물원에 들른 것은 봄의 꼬리 위로 여름이 물려오던 오월의 막바지 어느 날이었다. 금능석물원은 한림공원으로 유명한 제주시 한림읍 금능리에 있었다. 석물원이라는 명칭을 보니 여러 가지 형상의 돌을 전시해 놓은 곳일 듯한데, 들어서자마자 보이는 것은 일붕(一鵬) 스님 입상과 함께 높다랗게 서 있는 불탑이며 인자한 모습의 관음상과 미륵상이었다. 제주도에서 태어나 제주도 산방굴사에서 수계 득도한 일붕 서경보(徐京保, 1914∼1996) 스님의 덕을 기리는 곳인가 싶었다. 그리고 한쪽에 석굴이 있고 그 굴 안에는 명상에 잠긴 불상이 안치되어 있었다. 굴의 천장에서 빛을 내고 있는 전등 주위에 넓적한 풀잎이 달려 있다. 전등 불빛과 광합성을 하여 자라는 모양이다.

어찌하였거나 엄숙하고도 신기한 곳이라 여기며 굴을 나섰을 때 언뜻 눈에 뜨이는 것이 구멍을 뚫어놓은 큰 바위였고, 그 구멍 안을 들여다보니 남근석이 누워 있다. 히죽 웃음을 흘리며 경내로 들어서는데 입을 다물지 못할 희한한 광경들이 벌어지고 있다. 은밀한 광경이 벌어지고 있는 남의 집 방 안을 훔쳐보는 여인, 돼지를 먹이기 위해 엉덩이를 드러내고 변을 보는 아낙, 불쏘시개로 쓰기 위해 말똥을 받고 있는 사람의 모습들을 아주 해학적이고 사실적으로 다듬어 보는 이들로 하여금 절로 웃음을 짓게 조각품들을 배치해 놓았다.

건너편 큰 나무 아래 마소의 형상들이 앉아 있는데, 조그만 체구의 갈옷을 입은 웬 노인이 말의 형상에 기대어 앉아 쉬고 있다. 나이는 들어 보이지만 얼굴 생김이 하도 곱상하여 노파인 줄 알았는데, 다가가 보니 노파가 아니라 노옹이다. 얼굴에는 분칠이라도 한 듯 하얀 가루가 묻어 있었다. 노옹이 앉은자리 옆에는 생김새며 차린 모습이 그와 꼭 닮은 조각이 앉아 있는데, 짓고 있는 품새를 조각상과 똑같이 하고 있다. 일을 하다가 쉴 때면 이곳에 와서 이렇게 쉬고 있다고 했다. 신기하고도 놀라웠다. 그가 바로 제주 석공예 명장 장공익(張公益) 옹이었다. 조각상은 자화상을 새겨 놓은 것이다.

그는 평생을 통하여 돌하르방을 만들어왔다고 한다. 석물원 안쪽으로 들어가니 크고 작은 돌하르방들이 갖가지 표정으로 서 있다. 그가 조각한 돌하르방은 예술적인 가치도 높이 인정받아 우리나를 찾은 고르바쵸프 전 소련 대통령, 장쩌민 전 중국 주석, 클린턴 전 미국 대통령 등 수많은 국빈급 인사와 귀빈들에게 증정했고, 우리나라는 물론 미국, 캐나다, 중국 등으로 나가 전시되고 있다고 한다.

그의 예술적인 재주와 감각은 배우고 익혀서 닦여진 것이 아니라, 태생으로 타고난 것 같다. 그는 4.3사태 때 불타서 사라진 한라산 기슭의 한림읍 상대리 한산왓에서 열두 남매 중에 열 번째로 태어났는데, 위로 9남매는 모두 요절하였다. 아버지도 일찍 세상을 떠나고 처절한 가난 때문에 학교에 다닐 엄두도 못 내다가 해방이 되고 다섯 달 정도를 학교에서 한글만을 겨우 깨우친 것이 학력의 전부라고 한다. 4.3사태를 맞아 한없는 절망의 나락을 헤매다가 6.25 전쟁 중인 1952년에 해병대에 입대하여 6년을 복무하고 집으로 돌아와 보니 어머니도 세상을 떠나고 여동생만 남아 있는데 먹고 살 길이 막막했다.

어릴 적에 개울가에서 속이 송송 뚫린 속돌(일명 송이석)을 갈아 뭘 만들었던 것을 기억해 내고는 조그만 돌하르방을 비롯하여 해녀상, 재떨이, 연자방아 등 여러 가지 기념품을 만들었다. 그가 만든 석공예품들은 불티나게 팔려 나갔고, 창작품 경진대회도 출품하여 많은 상을 타기도 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러한 보람과 영광은 오래 가지를 못했다. 제주 곳곳에서 그가 만든 공예품을 본떠서 만들어 파는 사람들이 기승을 부렸기 때문이다.

석공예가 장공익은 주저앉지 않았다. 자기의 예술을 한 차원 높이 끌어올리기로 마음먹고, 남들이 다루기 힘든 단단하고 질긴 현무암으로 소재를 바꾸었다. 이 때가 1970년, 그의 나이 마흔에 들던 때였다. 남이 흉내낼 수 없는 '나만의 것을 만들어야겠다.'는 일념으로 돌의 결을 맞추지 못하면 망치질 한 번에 박살이 나버리는 현무암을 다듬기 위해 열정을 다 쏟았다. 단순한 석수장이가 아닌 예술가로서의 혼을 작품 속에 불어넣기 위해 혼신의 정열을 다했다. 그렇게 돌에 매달리는 사이에 20년이 넘는 세월이 흘러갔고, 스스로가 말하듯, 그는 돌에 대해서 도가 터 버리게 되었고, 1993년에는 노동부로부터 석공예 명장으로 인정받기에 이르렀다.

2000년부터는 기념품 제작은 아버지의 뒤를 이어 석장이 된 아들에게 맡기고, 그는 오로지 창작품 제작에만 몰두하게 된다. 제주인의 삶, 제주의 문화만을 작품 속에 담기로 하고, 제주도 사람들의 삶의 애환을 정과 망치를 통하여 새겨 나갔다. 작품 속에 눈물도 담고 웃음도 새겼다. 괴로움도 파고 즐거움도 쪼았다. 가족 사이, 남녀 사이의 끈끈하고 뜨거운 애정을 주제로 삼기도 했다. 수많은 돌로 커다란 탑을 쌓고, 쌓여진 돌 하나하나에 희로애락의 갖가지 모습을 지닌 제주 사람의 얼굴을 새겨 천태만상이라고 이름을 붙이기도 했다.

그의 작품 소재가 그런 일상의 삶만은 아니었다. 제주도의 거녀(巨女) 초인 설문대할망이며 요괴스런 뱀을 물리쳐 인신공희(人身供犧)의 폐습을 없앤 서린(徐燐)과 오백장군의 전설을 거대한 석상으로 새겨 내기도 했다. 그 외에도 어부를 속곳(속옷)으로 괴롭히는 해녀들, 볼일 보고 있는 아주망, 물허벅을 지고 물을 길러 다니는 여인상 등 갖가지 형상들이 보는 이들에게 미소를 짓게도 하고 얼굴을 붉히게도 하는 작품들을 창작해 나갔다.

이 많은 작품들을 그는 절대 팔지 않는다고 한다. 제주의 문화를 돌을 통해 다시 담아내는 데만 목적이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해서 모인 작품들이 석물원을 이루고,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과 즐거움을 줄 수 있는 명소가 되었다. 제주도에는 제주 문화를 보여주는 박물관도 많고 전시장도 적지 않지만, 한 장인의 힘으로 더불어 사는 사람들의 삶을 이토록 무르녹게 그려내고 있는 곳도, 그런 역작들을 한 자리에 모아 보여주고 있는 곳도 그리 흔치는 않을 것 같다.

그는 육중한 바위며 돌을 떡 주무르듯 할 만한 건장한 체구를 가지지도 않았지만 돌 앞에 가서 앉으면 언제나 즐겁고 힘도 솟는다고 한다. 여든이 된 지금까지도 돌을 떠날 수 없고, 떠나지 않는 까닭이라 했다. 그는 배운 건 없지만 머리 속엔 창조에 대한 욕구와 상상의 힘이 넘치고 있다고 한다. 아직도 제주만의 독특한 소재가 머리 속에 무궁무진하다고 한다. 그는 누가 보고 있든 말든 돌가루 날리는 작업장에서 돌 다듬는 일에만 오로지 빠져들고 있다.

금능석물원을 나올 때 나는, 장공익 옹의 작은 체구보다 더 작아져 있었다. 둔한 필력과 빈곤한 상상력 탓에 글 한 편 쓰는 일에 쉽사리 엄두를 낼 수 없는 내 모습에 비하면 그는 그의 작품이 된 거석(巨石)보다 더 큰 거인이다. 작품들에서 넘쳐나는 진솔한 미학과 재기 넘치는 해학의 원천인 그의 상상의 힘은 한라산보다 더 우람하고도 무궁하다. 돌 앞에 앉을 때에 그에게서 솟아오르는 열정은 화산에서 뿜어져 나오는 불길만큼이나 뜨겁다. 그러나 그는 자기가 어떤 사람이며 어떤 능력을 가진 사람이라는 것조차도 염두에 두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의 관심은 오직 돌을 쪼는 일에 있기 때문이다. 제주를 각인(刻印)하는 일에 있기 때문이다.

 석물원을 나와 바닷가에 섰다. 그가 빚은 석물원에 눕혀 놓은 '인자한 노인의 와상(臥像)'처럼 비양도가 누워 있는 금능리 앞 바다는 눈이 시리도록 선연한 빛깔로 푸른 하늘에 닿고 있었다. 문득 글 한 편 쓰고 싶다는 생각이 났다.♣(2010.6.3)

'청산수필' 카테고리의 다른 글

산길을 걸으며  (0) 2010.06.29
제주 용눈이오름  (0) 2010.06.09
하나뿐인 계절  (0) 2010.06.02
어느 봄날의 외출에서  (0) 2010.04.30
봄나들이의 꿈  (0) 2010.04.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