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산수필

다혜의 선물

이청산 2010. 4. 6. 12:11

다혜의 선물



 다혜는 책 읽기를 좋아한다고 했다. 사흘에 한 권 정도는 읽는다고 했다.

한 해가 다해 가던 십이월 어느 날 친구 은비와 함께 다혜가 내 방으로 찾아왔다. 인사를 마치자마자 내가 앉은 의자 뒤로 달려들더니 대뜸 어깨를 주무르기 시작했다. 둘이서 한 쪽씩을 맡았다.

"고맙다. 그런데 어떻게 내 어깨를 주물러 줄 생각을 했냐?"

"우리 선생님께서요, 하루 한 가지 이상 좋은 일을 하라고 하셨어요." 은비가 말했다.

"오늘 할 좋은 일을 찾다가 교장선생님 생각이 났어요." 다혜가 말을 이었다.

항상 저들을 자상하고 반갑게 대해 주던 모습이 떠오르더라면서, 책상에 오래 앉아 계시다보면 피곤도 느끼실 것 같아 좀 시원하게 해 드리고 싶었다고 했다.

어깨도 주물고 등도 두드려 주었다. 몸이 한결 거뜬해지는 것 같았다.

등을 두드리던 다혜가 말했다.

"교장선생님 홈페이지에서 글 몇 편을 읽었는데요. 참 감동적이었어요."

"그래?"

"우리 선생님이 그러시는데요. 교장선생님 책도 많이 내셨다면서요?"

"많이는 무얼……."

아이들에게 나의 부끄러운 모습을 들킨 것 같았다.

"그 책 한 권 좀 빌려 주세요."

이것들 봐라. 내 책을 빌리기 위해 이런 선심을 베풀고 있구나. 아이들이 참 귀엽고 예쁘게 보였다. 그냥 빌려 달라고 해도 될 터인데 이렇게 예쁜 짓(?)을 하고 있는 것이 여간 귀엽지 않았다.

그동안 숱한 글을 써 오면서도 낸 책이라야 하나밖에 없고, 그것도 울릉도를 해포 살면서 쓴 글들만을 모아 낸 것이다. 내가 글을 즐겨 쓰니 남들은 책도 여러 권 냈으리라 생각하고 있는 모양이다. 울릉도의 여러 가지 풍정과 인정에 대해 쓴 글을 엮은 것인데, 마침 학교의 내 방에 갖다 둔 것이 한 권 있었다.

"그래, 재미가 있을지 모르겠다만, 이것 한 권밖에 없어. 친구들끼리 돌려보아라."

다혜와 은비는 열심히 읽겠다며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내 방을 나갔다.

그리고 두어 달이 흘렀다. 저들끼리 돌려 가면서 잘 읽고 있을까, 라는 생각이 들다가 시간이 흐르는 사이에 책을 준 사실조차 잊어버리고 있었다.

겨울이 가고 창밖에 개나리가 만발하던 어느 날, 다혜는 한 학년을 올라 내 방에 나타났다.

"교장선생님, 죄송합니다. 너무 늦었지요?"

"아니야, 잘 읽었으면 돼."

"친구들과 함께 돌려보는 사이에 책이 좀 상했어요."

"여럿이 읽다가 보면 때도 묻고 상하기 마련이지."

다혜는 내 수필집과 함께 포장지에 싼 책을 한 권 내어놓았다.

책을 흔쾌히 빌려 주셔서 고맙고, 책이 더럽혀져서 죄송하다면서 보답의 선물로 책 한 권 샀다고 했다.

다혜가 나의 책을 빌려 달라고 했을 때 은비도 있는데 책이 한 권뿐이라 '빌려 준다'면서 주었지만, 돌려 받을 생각은 하지 않았었다.

"아니야, 이 책 다시 안 주어도 되고, 선물 안 해도 돼. 공연한 부담을 느낀 것 같구나."

선생님께 꼭 선물을 하고 싶었다며, 마음에 드실지 모르지만 받아 달라고 했다.

"그래, 이 책은 너에게 다시 줄 게."

내 책의 표지 안쪽에 '정다혜에게'라고 쓰고 날짜와 서명을 함께 넣어 다혜에게 다시 주었다. 다혜는 감격해 하며 받았다. 나에게 선물로 주는 책을 들어 내 손에 쥐어 주면서 고맙다는 인사를 몇 번이나 하고 다시 준 내 책을 들고 방을 나갔다.

책을 싼 포장지를 뜯어보니 색종이에 쓴 편지가 함께 들어 있었다. 긴 편지글과 함께 쪽지 하나가 들어 있었는데, 쪽지에는 "선생님께서 어떤 내용의 책을 좋아하시는지도 모르겠고, 또 웬만한 책은 다 읽어보셨을 것 같아서 고민 고민하다가, 책의 저자가 선생님처럼 교육자의 길을 걸어가셨던 분이라는 걸 보고 선택을 했습니다."라고 적혀 있었다.

내가 책을 좋아한다고 생각하여 책을 선물로 고르면서 걱정을 많이 했던 것 같았지만, '웬만한 책은 다 읽어보셨을 같다'는 말은 나를 부끄럽게 했다. 다혜가 상상하는 것만큼 나는 많은 책을 읽지 못했다. 다혜가 준 책은 살아가는데 필요한 여러 가지 교훈을 예화로 풀어 쓴 것이다. 어느 퇴직 교장이 쓴 책인데, 재미있게 읽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다혜의 편지는 계속되었다. 내 책에 쓰인 묘사와 비유 같은 것들이 긴 시를 읽고 있는 것 같이 느껴져서, 문학 시간에 문학적인 표현에 대한 강의를 열심히 들으면서 내 글을 조금 조금씩 읽어나갔다고 한다. 마치 그 섬에 살고 있는 것 같은 환상에 빠지기도 하며 아름다운 풍경을 들을 상상해 가며 읽는 사이에 학교를 졸업하면 꼭 '그 섬에 가 보아야겠다'라는 생각이 들더라고 했다.

그리고 다혜는 이야기를 덧붙였다. '졸업 축제'로 치른 선배들의 졸업식이 자기에게도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아 있다고 했다. 초, 중학교 때의 졸업식을 돌이켜보면 허례허식이라고 생각될 만큼 따분한 의식이 많았는데, 그런 의식들을 줄이고 졸업생과 재학생의 장기와 재주를 한데 모아 축제로 엮은 것이 참 재미있었다고 했다. 학생들을 위한, 학생들의 눈높이에 맞춘 졸업식이었던 것 같아 모두들 즐겁고도 뜻 깊게 생각했다며, 그런 졸업식이 되도록 배려해주셔서 감사 드린다고 했다. 아, 아이들이 그렇게 생각했구나. 일부의 회의적인 시각을 무릅쓰고 축하 공연으로 진행했던 졸업식을 아이들이 즐거워했다고 하니 여간 다행스럽지 않다. 새삼스레 흐뭇하고 뿌듯한 느낌이 솟아올랐다. 그러나 '지금까지 만나 뵌 선생님 중 가장 학생을 생각하시는 선생님'이라는 말은 다시 내 얼굴을 달아오르게 했다.

다혜가 나에게 준 선물은 책만이 아니었다.

'웬만한 책은 다 읽어보셨을 것 같다'는 다혜의 상상에 미치지 못한 그 '부끄러움'을 선물로 주었고, 더욱 '학생들을 생각하는 선생님'이 되어야 할 일을 또 하나의 선물로 주었다.

3월이 나에게서 빠져나갔다. 내년 3월이 오기 전에 나는 다혜를 비롯한 모든 아이들과 헤어지지 않으면 안 된다. 교단 생애를 마감해야 하기 때문이다.

다가오는 계절들이 다시 새롭다. 내 삶의 제1막이 다하기 전에,

다혜의 상상처럼 많이 읽을 수 있기를-.

아이들의 더욱 다정한 친구가 될 수 있기를-. ♣(2010.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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