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여행기

고궁과 이화원 그리고 서태후

이청산 2010. 3. 1. 15:13

고궁과 이화원 그리고 서태후

-중국 여정기·3



중국 방문 사흘째 날, 중국 황제 권력의 상징이요, 황제의 거처였던 고궁박물원을 찾아간다. 우리를 초청해 준 공자학원총부를 들렀다가 가느라고 경산공원 앞을 지나 고궁(故宮)의 북문인 신무문(神武門)에 먼저 닿았다. 붉은 벽 문각(門閣)의 문설주 위에 '故宮博物院' 현판이 커다랗게 걸려 있다. 고궁 뒤쪽으로부터 앞으로 나아가는 길이다.

자금성(紫禁城)으로 불리기도 하는 고궁은 명나라 3대 황제 영락제(永樂帝)가 남경에서 북경으로 수도를 옮기면서 1406년부터 1420년까지 연인원 100만 명을 동원하여 지은 세계에서 가장 큰 궁전 건축물로 총면적 72만3,633㎡, 9999개의 방(지금은 8700개만 남음)을 만들었다고 한다. 1911년 청의 마지막 황제 선통제(宣統帝)가 제위에서 물러나기까지 491년에 걸쳐 명의 15황제, 청의 9황제가 일생을 보냈던 곳으로 지금은 고궁박물관이 되어 105만점의 진귀한 유물이 보존되어 있는데, 현대사의 격변기를 거치는 사이에 대만에서 4분의 3 정도를 가져가고 남은 것이라 한다. 고궁은 구시대의 유물이라 하여 모택동에 의해 철거계획까지 세워졌다가 주은래의 설득으로 유지되어 1987년에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고 한다.

신무문으로 먼저 들어가 기암괴석으로 화려하게 장식하여 황제와 궁녀가 놀음을 즐겼다는 어화원(御花園)을 지나 수많은 궁전과 궁문을 거쳐 오문(午門)에 이르는 사이에 붉은색의 벽과 기둥, 황금빛을 많이 쓴 단청, 대리석 난간을 보며 널따란 광장을 걸어 두꺼운 벽 사이로 난 수없이 많은 문들을 통과하였다. 건물들은 한결같이 보는 이를 압도하는 엄청난 규모에 두꺼운 세월의 더께가 끼어 있었다.

어화원을 니서자 1420년 영락제가 창건하여 황후의 침실로 사용했다는 곤년궁(坤寧宮)이 나타난다. 1655년 청의 순치제가 심양의 고궁의 정궁인 청녕궁을 본 떠 중건하였는데, 동·서 양쪽에 작은 궁궐들인 동육궁과 서육궁을 두어 후궁들이 거처하게 하였다.  청나라 제10대 황제 함풍제는 후궁인 자안황태후를 동육궁에 거처하고, 자희황태후를 서육궁에 거처하게 하여 그들을 방향에 따라 동태후, 서태후라 부르게 되었다. 서태후의 개인 침실인 저수궁, 개인 식당인 체화전 등이 있는 서육궁은 서태후가 어린 나이로 즉위한 동치제와 광서제의 모후로서 수렴청정을 하면서 황제 못지않은 권력을 휘두르면서 나라를 멸망에까지 이르게 했던 역사를 간직한 곳이다. 서태후가 일으킨 파란의 역사를 상상하며 곤녕문을 나선다.

 황후가 누에치기, 비단 짜기 등의 일을 하며 백성들에게 모범을 보이는 업무를 수행하던 교태전, '정대광명(正大光明)'이라는 편액 아래 황제가 일상 정무를 보면서 침실로도 썼다는 건청궁을 지나 건청문 앞으로 나가니 기단 아래 양쪽으로 금박의 동사자(銅獅子) 한 쌍이 버티고 있다. 동쪽의 수컷은 황제의 권력과 천하통일을 상징하는 여의주를 움켜쥐고 있고, 서쪽의 암컷은 왼발로 새끼를 뒤집어 놓고 쓰다듬는 모습으로 자손의 창성을 상징하고 있다고 한다.

건청문을 나서 운룡대석조(雲龍大石雕)가 유명한 보화전(保和殿)으로 간다. 보화전은 명대에는 황제의 즉위 의례를 거행했고, 청대에는 황제의 연회장과 전시(殿試)를 보던 곳이었다고 한다. 보화전 안의 가운데에는 보좌가 있으며 보좌 위쪽에는 건륭제(乾隆帝)의 친필 현판 '군왕으로써 천하의 최고의 준칙을 세운다,'는 황건유극(皇建有極)' 네 글자가 걸려 있고, 옥좌 뒤 벽면에는 금빛 운룡도가 그려져 있다. 내부에는 시험 때 부정행위를 막기 위해 기둥을 모두 없앴다고 하니, 시험의 부정 욕구야 고금이 다르지 않는 모양이다. 전각 뒤쪽에 있는 운룡대석조는 아홉 마리 용이 구름 속에서 꿈틀거리는 모습이 생동감 있게 새겨진 길이 16.57m, 폭 3.7m, 무게 250t의 거석이 누웠는데, 50㎞ 밖에 있는 것을 겨울철에 도랑을 파서 빙판을 만들어 옮겨와 설치했다고 하니, 황제의 권력이 다시금 빛나 보인다.

황제의 휴식처였던 중화전을 거쳐 태화전(太和殿)으로 나간다. 높이 35m, 총면적 2,377㎡의 중국 최대의 목조건축물로 황제의 즉위식, 새해맞이 제사, 조서 반포 등의 국가적 행사를 치르던 곳이라고 한다. 하얀 대리석 3층 기단 위에 1,488개의 기둥을 세우고 유리로 구운 황금색 기와로 장식하고 있어 신비스럽고도 화려하다. 내부에는 모두 72개의 기둥 중에 가운데 6개는 '반용금칠대주(蟠龍金漆大柱)'라 하여 승천하는 용을 조각하여 금박을 입혀 놓고 있고, 황제의 보좌를 받치고 있는 대리석 계단인 수미단 아래 바닥에는 4,718개의 황금 벽돌이 깔려 있으며, 황제의 보좌에는 아홉 마리의 용이 새겨져 있어 웅장함과 화려함의 극치를 이루어 황제의 위용이 한껏 찬란 무쌍하다.

온통 금빛으로 칠해진 찬란한 태화전을 뒤로하고 태화문을 나서 내금수하(內金水河)에 가로 놓인 백옥 다리 금수교를 지나 높이 38m, 벽두께 36m로 세계에서 가장 큰 문이라는 오문(午門)을 통과한다. 천안문으로 들어왔다면 맨 먼저 만나야 할 궁의 정문을 이제야 만난다. 문의 정면과 좌우에 모두 5개의 누각이 있고, 출입구도 5개가 있는데, 가운데 문은 황제의 전용 문이라 한다. 오늘은 황제가 되어, 아니면 딱 한 번 퇴장만 가능했다는 전시(殿試)의 합격자가 되어 이 문을 나선다.

신무문에서부터 오문에 이르기까지 좌우의 대소 궁전은 살필 겨를도 없이 바쁜 걸음 치듯 한 줄로만 걸어오는데도 두 시간 가까이 걸렸다. 그만큼 궁성은 넓고 크고, 그 넓이만큼이나 황제의 권력도 드세었던 것 같다. 오문을 통과하여 천안문을 나서 뒤돌아보니 붉은 벽 위에 '中華人民共和國萬歲', '世界人民大團結萬歲'라 쓰인 황금빛 커다란 글자 사이에 중국의 태상왕 모택동 주석의 초상화가 우뚝이 걸려 있다.

천안문 광장에 이르렀을 때 해는 서쪽으로 한참 기울어져 있는데, 1989년 4월 민주화를 요구하며 시위를 벌이던 학생과 시민들을 무력으로 유혈 진압했던 '천안문 사태'의 그 붉은 피는 흔적도 없이 높다랗게 걸린 오성홍기(五星紅旗)가 한가롭게 펄럭이고 있다. 40만㎡의 광활한 광장의 남쪽에 인민대회당과 모주석 기념당, 동쪽에 국가박물관이 자리 잡고 있고, 모주석 기념당 북쪽으로 높이 37.94m의 인민영웅기념비가 우뚝 서 있다. 기념비에는 모택동 주석이 썼다는'人民英雄永垂不朽(인민 영웅은 길이 빛나라)'라는 힘찬 필체의 휘호가 하늘로 솟을 듯이 새겨져 있다. 그 비의 뒷면에는 주은래 총리가 쓴 비문이 새겨져 있다고 하나, 천안문 사건 당시 학생들이 이 기념비에 올라가 꽃을 바치며 시위를 한 이후 일반인의 출입이 금지된 성역이 되었다니, 주 총리의 비문도 그 날의 흔적도 확인할 길이 없다.

고궁이며 천안문 광장에는 황제도 많고 영웅도 드날리는데, 뇌리를 쉽사리 떠나지 않는 사람이 있다. 화려하고 커다란 궁전도 아닌, 서육궁 조그만 궁전을 지키고 살았던, 황제도 아니고 영웅도 아닌, 황제의 어머니요 이모일 뿐이었던 예허나라 옥란(葉赫那拉 玉蘭) 서태후-. 황제보다 더 황제같이, 영웅보다 더 영웅같이 살려고 했던 그 풍운의 생애가 궁금하다. 내일은 그 서태후를 만나러 간다.

 

다시 이역 땅 북경의 날이 밝아 오전으로는 역내 명문이라는 북경제4중학교를 방문하여 중국의 교육 현장을 살펴보고, 오후 일정을 잡아 이화원으로 간다. 차창 밖으로 보이는 이국의 풍정을 파노라마로 스치며 북경의 시가지를 지나 자금성(고궁)에서 20㎞ 거리에 있는 이화원( 和園)에 도착한 것은 햇살도 한창 퍼질 오후 2시경이었지만, 바람도 몹시 불고 하늘도 싸늘했다. 문창원(文昌院)을 통과하여 경내로 들어서니 회색 석벽 위에 문창각(文昌閣)이 우뚝 솟아 있고, 앞으로는 바다 같은 광활한 호수가 펼쳐진다.

이화원은 금나라 때인 12세기 초에 처음 조성되어 황제의 행궁으로 사랑을 받아 오다가, 청나라 건륭제(乾隆帝, 735-1796) 때인 1750년 크게 확장되어 실질적인 황실 정원이 되면서 청의원(淸 園)으로 불렀다. 현존하는 중국 최대의 별궁이자 황실 정원으로 290만㎡의 광대한 부지에 곤명호, 서호, 남호 등 3개의 인공 호수를 만들고 여기서 파낸 흙으로 60m 높이의 인공산인 만수산을 조성하였다. 1860년 서구 열강의 침공으로 영·불 연합군에 의해 크게 파괴되어 폐허로 방치되어 오다가, 1886년 수렴청정하고 있던 서태후(西太后)가 재건하여 이화원으로 부르게 되었다. 당시 서태후는 황제보다 더한 권력을 누리고 있었지만, 태후라는 한계 때문에 고궁(故宮)에 머물기보다는 이화원을 자신만을 위한 궁전, 정원으로 만들어 주거처지로 삼았다고 한다. 황실의 정원이었던 이화원에 각종 전각과 사원을 추가해 본격적인궁전 형태로 변모시켰는데, 막대한 재건 비용을 충당하기 위하여 군비 500만 냥을 끌어다 쓰는 바람에 1894년 일본과의 전쟁에서 청나라가 패배하는 결과로 이어지기도 했다고 한다. 사리와 사욕은 나라도 망하게 한다는 교훈의 대가가 너무도 비싼 것 같다.

얼음이 하얗게 덮인 호수를 옆에 끼고 문창각에서 남호도를 향하여 걸어가는데, 바람은 살을 엘 듯 세차게 불어 걸음을 떼어놓기조차 어려웠지만 인공 호수 안의 인공 섬에 대한 호기심이 혹한의 바람도 발 앞에서 물러나게 했다. 문득 구름 문양의 청색 기단석 위에 거대한 동우(銅牛)가 호수를 바라보며 앉아있는데, 1755년 호수의 확장공사를 끝낸 건륭제가 대우치수(大禹治水)의 고사를 생각하며 수해 방지를 기원하는 뜻에서 청동 황소를 설치했다고 금우명(金牛銘)을 소 등에 적고 있다. 동우를 지나니 중국 최대의 팔각정이라고 하는 24개의 원주(圓柱)와 16개의 방주(方柱)가 받치고 있는 곽여정(廓如亭)이 우뚝이 서 있다. 길이 170m 폭 8m의 아치형 다리 십칠공교(十七孔橋)를 건너 남호도로 간다. 17개의 구멍을 이루며 서있는 교각 위의 난간에는 각기 다른 모양으로 조각된 의 544마리의 작은 돌 사자상이 눈길을 끈다. 난간의 양쪽 끝자락에는 억세고 거센 괴동물 석상이 서 있다. 다리 위에서 보는 호수가 끝이 보이지 않을 만큼 넒고 크다. 저 건너 만수산의 불향각이 가물가물하다. 이게 인공 호수라니! 곤명호를 오늘날의 크기로 넓힌 서태후는 유용한 군비의 절반 이상을 이 확장 공사에 투입하면서 해군의 훈련을 그 이유로 삼았다고 하니, 육지 한가운데서 무슨 해군 훈련인가, 천하를 뒤흔든 인물의 변설치고는 너무나 옹색하다.

3천여 평에 이른다는 남호도에는 우거진 송백 숲 속에 함허당(涵虛堂), 감원당(鑒遠堂), 광윤령우사(廣潤靈雨祠) 등의 정자와 사당이 창연한 모습으로 서 있는데, 함허당은 배들의 훈련을 사열하던 곳이었고, 광윤령우사는 기우제를 지내는 사당이라고 한다. 청색과 백색의 조각된 돌들이 섬을 둘러싸고 있는데, 결국 황제와 태후의 놀이터에 지나지 않을 이 섬을 짓기 위해 흘린 땀과 피가 모여 저 넓은 호수의 물이 된 것 같아 사당에 앉은 신장의 표정 같은 몸서리가 느껴진다.

하늘나라에서 인간세상의 공명이록(公名利祿)을 주재하는 문창제군(文昌帝君)을 모셔 놓았다는 문창각 쪽으로 다시 나와 서태후의 행적을 찾아 가는데 안내원은 서태후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낸다.

 

서태후(西太后, 1835∼1908)의 성은 예허나라(葉赫那拉), 이름은 옥란(玉蘭) 또는 난아(蘭兒)라고 하며, 함풍제(咸豊帝, 1831∼1861)의 의귀비(懿貴妃)이자 동치제(同治帝, 1856∼1875)의 생모로, 함풍황제가 병사한 후 동치제가 6세에 즉위하자, 모후(母后)로서 동태후(東太后)와 함께-나중에는 물리쳐 권력을 독점한다-수렴청정을 시작하였다. 1875년 동치제가 19세에 천연두로 죽어버리자, 권력을 계속 유지할 목적으로 아들의 아이를 가진 며느리 효의황후도 죽여 버리고, 여동생의 3살짜리 아들 재첨(載 )을 양자로 삼아 광서제(光緖帝, 1871∼1908)로 즉위시켜 계속 섭정하였다.

광서제가 16세가 되자 친정을 시작했으나, 서태후는 국정의 실권을 놓지 않았다. 광서제가 이에 반발하여 1898년 입헌군주제를 주장하던 강유위(康有爲), 양계초(梁啓超) 등과 무술변법(戊戌變法)을 바탕으로 입헌군주제로의 전환을 꾀하자, 서태후는 보수파 관료를 부추겨 쿠데타를 감행하여 신정을 100일로 종식시키고 광서제를 유폐하는 무술정변(戊戌政變)을 일으킨다. 서태후는 권좌로 돌아오고, 강유위와 양계초 등은 해외로 망명하였으며, 광서제는 서태후에 의해 이화원에 유폐되어, 전보다 더 권력 없는 황제로 전락하게 된다. 1900년 농민 비밀결사인 의화단(義和團)과 결탁하여 열강 제국에 선전포고를 하였으나 연합군(영·미·불·독·오·이·일)이 북경으로 진군하여 의화단과 청군을 격파하고 자금성을 접수하여 광서제를 새로 옹립하고 서태후를 체포하여 전범으로 넘기려하자, 서태후는 광서제를 인질로 삼아 서안(西安)으로 피신한다. 이 혼란의 와중에 후환을 없앨 목적으로 광서제의 유일한 안식처인 진비(珍妃)를 무참하게 죽여 버리자 광서제는 광분하여 자포자기에 빠져버린다.

시국의 상황이 바뀌어 1902년 서태후는 북경으로 돌아왔지만 청나라 정부의 기세는 현저하게 꺾여 나락의 길로 치닫게 되었다. 진보적 개혁에 반대하던 서태후도 북경 귀환 후에는 입헌 준비, 실업 장려, 교육 진흥 등 신정을 실시하였으나 대외적으로는 굴욕적 외교로 전락하여 중국의 식민지화가 심각해지고, 왕조의 권위가 실추되면서 혁명운동·입헌운동은 점점 고조되어 갔다.

1908년 11월 서태후는 자기가 위독한 것을 본 광서제가 미소를 지었다는 말을 환관 이연영으로부터 듣고 광서제를 독살하라는 명령을 내린다. 결국 광서제는 1908년 11월 14일 38세를 일기로 한 평생을 꼭두각시로 살았던 한 많은 세상을 떠나게 되는데, 광서제가 죽은 지 하루 뒤에 서태후도 죽고 말았다. 서태후가 죽고 종손(從孫) 선통제(宣統帝, 1908∼1912) 부의(溥儀)가 3세의 나이로 제위를 이었지만 4년도 못 되어 청나라는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된다.

 

이야기를 마친 안내원은 서태후가 죽인 사람이 모두 3,900여 명이나 된다고 덧붙이며, 옥란당(玉 堂)으로 먼저 안내했다. 현판 위에 퇴색한 그림을 이고 있는 옥란문을 들어서니 본전과 두 개의 보조전각으로 이루어진 삼합원(三合院)형태의 ㄷ자 건물이 나타났다. 건륭제(乾隆帝)가 처음 지어 국사를 처리하던 곳이었으나, 1860년 연합군에 의해 소실되었다가 1892년에 다시 지었다고 한다. 1898년 무술변법에 의한 개혁운동이 실패하자 서태후는 개혁을 옹호했던 광서제의 모든 권력을 박탈하고 이곳에 유폐하여 죽음에까지 이르게 한다. 옥란당 동쪽의 동난각은 광서제가 식사를 하던 곳이며, 서쪽의 서난각은 침실이고, 옥란당 옆의 의예관은 광서제의 황후 륭유(隆裕)가 갇혀 있던 곳이라는데, 문은 모두 잠겨 안으로 들어가 볼 수는 없었다. 먼지 낀 유리창을 통해 들여다보니 생활 용구 몇 가지는 그대로 있었으나 폐가의 음산한 기운이 감돌고 있는 듯했다.

인수문을 지나 인수전(仁壽殿)으로 간다. 자줏빛에 황금색 무늬로 단장한 기둥과 문이 깨끗해 보이는 인수전은 원래 근정전(勤政殿)이라 하였으나 서태후의 만수무강을 기원하는 뜻을 담아 인수전으로 바꾸어 외국 사신을 접견하며 정무를 살폈다고 한다. 안에는 옥좌, 병풍, 공작 깃털로 만든 장식용 부채, 향로, 크레인 모양의 등이 그대로 남아 있고. 병풍에는 아홉 마리의 용과 각기 다른 226개의 수(壽)자가 새겨 황제의 만수무강을 기원하고 있다. 문 앞에는 청동으로 만든 봉황과 용이 서 있는데, 보통 궁궐이라면 대부분 문 쪽에 왕을 상징하는 용을, 그 옆에 왕후를 상징하는 봉황을 놓기 마련인데, 좌우가 바뀌어 서 있는 것이 서 있는 모습이 이채롭다. 청나라의 실권자는 '왕이 아니라 자신'이라는 것을 드러내기 위한 서태후의 의도가 배어 있는 것 같다. 앞뜰에는 뿔을 세운 사자상과 구멍이 숭숭 뚫린 커다란 괴석이 서태후의 별난 기호를 보여주고 있다.

경극광이었던 서태후의 전용극장인 덕화원(德和園)은 안내원의 설명을 들으며 지나간다. 덕화원은 주무대인 3층짜리 대희루(大戱樓)와 2층짜리 분희루(扮戱樓), 객석인 이락전( 樂殿)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서태후가 이락전에서 경극을 관람할 때는 광서제와 황후도 불렀지만, 의도적으로 복도 끝 임시 의자에서 보게 했다고 하니, 이 또한 서태후의 악행 중의 하나일 것 같다. 덕화원을 지나니 주위의 전각들과는 모양도, 색깔도, 분위기도 다른 건물이 나타난다. 환관 이연영(李蓮英)이 거처하던 영수제(永壽齋)다. 회색 벽 가운데로 나 있는 칠각(七角) 문 안에 있는 붉은 기둥의 건물이 이연영의 처소인데, 안에는 붉은 수술을 늘어뜨린 여러 개의 등을 달아 화려하게 장식해 놓았다. 서태후의 머리 손질을 담당하는 환관으로 발탁이 되었지만, 서태후의 성격을 꿰뚫듯이 파악하여 모든 일을 마음에 쏙 들게 잘해서 큰 환심을 사게 되어 황제 부럽지 않은 권세와 사치를 누렸다고 한다. 마음을 잘 알아주는 환관을 크게 총애했던 것은 막강한 권력 뒤에 서려 있는 한 여인의 고독했던 심사를 짐작해 볼 수 있게 한다.

영수제를 나오니 내·외부를 붉은 빛과 황금빛으로 화려하게 장식한 낙수당(樂水堂)이 나타난다. 건륭제가 모후를 모시고 곤명호의 절경을 즐기던 곳이었지만, 서태후의 침궁으로 개조되어 말년에 일상 활동과 식사를 하는 곳으로 쓰였다고 한다. 1860년 아편전쟁으로 소실되었다가 1887년 서태후가 여름 별장으로 재건하여 48명의 시종과 수천 명의 수행원을 대동하고 머물렀다고 하며, 1903년에는 중국 최초로 전기가 들어오기도 했다고 한다. 앞뜰에는 동으로 만든 사슴(鹿), 학(鶴), 보병(寶甁)을 만들어 세우고, 옥란(玉蘭, 목련), 해당(海棠, 능금), 모단(牡丹, 작약)을 심어 태평과 부귀를 기원하고, 영지(靈芝)처럼 생긴 커다란 괴석은 건강을 지켜주는 뜻을 담고 있다고 한다. 모든 것이 서태후의 일신의 안녕을 기원하고 지키고자 했던 것들이다.

낙수당을 나와 요월문(邀月門)으로 든다. 장랑(長廊)으로 통하는 문이다. 곤명호 수변으로 이어지는 273칸 728m의 회랑을 걷는다. 서태후가 곤명호의 풍경을 감상할 때나 불향각으로 행차할 때 걷던 회랑이다. 회랑의 문설주 위에는 서유기, 삼국지연의 등의 고전문학과 중국의 역사, 전설, 자연 풍경에서 소재를 취한 17,000여 폭의 그림들이 그려져 있는데 수준도 뛰어나 중국 최대의 야외 미술관으로 사랑받고 있다고도 한다. 회랑 중간 중간에 유가(留佳), 기란(寄瀾), 추수(秋水), 청요(請遙)라는 4개의 정자를 설치하여, 걷다가 쉬면서 풍경을 감상할 수 있도록 해 놓았는데, 춘, 하, 추, 동을 뜻하여 지은 것이라 한다. 정자에서 바라보는 남호도의 경치가 절경인데, 얼음이 하얗게 얼어있는 호수 위에는 썰매를 타고 있는 사람들이 또 하나의 아름다운 경치를 연출하고 있다.

지금 곤명호의 물은 꽁꽁 얼어 하얀 빙판만 펼쳐져 있을 뿐, 아무 것도 들려주지도 보여주지도 않지만, 저 얼음 밑 물속에는 부침을 거듭해 온 중화(中華) 그 장구한 이력과 함께 서태후가 만들어냈던 질곡의 역사, 그리고 그 험난한 역사 속에서 무참하게 생사를 받쳐야 했던 수많은 원혼들의 아우성이 들끓고 있을 것 같다.

중랑의 가운데쯤에 곤명호를 마주보며 배운문(排雲門)이 서 있는데, 만수산 언덕을 따라 오르며 한 줄로 늘어선 패루(牌樓), 배운전(排雲殿), 불향각(佛香閣), 중향계(衆香界), 지혜해(智慧海)를 들고 나는 맨 앞문이다. 이중에 배운전은 축하 연회에 쓰이던 곳으로 서태후의 생일연을 이곳에서 베풀고 백관들의 하례를 받았다고 하며, 만수산 중턱의 불향각은 이화원 어디서나 우뚝하게 보이던 탑 모양의 21m 삼층 누각으로 114개의 돌 기단까지 합치면 40m나 된다고 한다. 내부에는 금박의 천수관음(千手觀音)상이 있어 서태후가 음력 1일과 15일에 이곳에서 참례(懺禮)하고 선향(線香)을 태웠다는데, 무엇을 참례했을까를 상상하면서 불향각을 올라보지는 못하고 배운문 위로 솟은 모습을 바라보면서 신비로운 자태에 감탄만 하고 지나쳐 가야 하는 것이 아쉬웠지만, 일행과 함께 가는 길이라 하릴없이 따라 가는데 문득 펄벅이 쓴 소설 '연인 서태후'에는 불향각 이야기가 있을 것인지가 궁금해진다.

장랑이 끝날 무렵 또 하나의 범상치 않은 전각이 보였는데, 청리관반장(聽 館飯莊)이라는 현판이 붙어 있다. 건륭제가 모후에게 연극을 보여 주기 위해 지은 것인데, 1860년에 불 탄 것을 광서제가 재건했다고 한다. 덕화원 연극장이 건축되기 전까지 서태후가 연극을 보고 연회를 베풀던 곳으로 쓰다가, 지금은 귀빈을 접대하는 중국요리 전문점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세월과 역사의 흐름을 따라 이력의 변전을 거듭해온 전각이다.

빙판 진 호수 위에 배가 한 척 보이는데, 생긴 모습이 범상치가 않다. 길이 36m 석방(石舫)인 청안방(淸晏舫)이라고 한다. 배라기보다는 대리석으로 지은 수상 건축물이라고도 할 수 있는 청안방은 1755년 건륭제가 당 태종 정관지치(貞觀之治)의 주역인 위정(魏征)의 '물은 능히 배를 띄울 수 있지만, 반대로 배를 전복시킬 수도 있다(水能載舟, 亦能覆舟)'란 고사를 인용하면서, 청 왕조는 '어떤 물이라도 전복시킬 수 없다'는 뜻을 담아 지은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그 후 청 왕조는 100년도 못 가서 쇠락의 길을 걷고 말았다. 그 쇠락의 역사 속에 서태후가 있음은 물론이다.

이화원 여정의 출구인 북문을 향해 바쁜 걸음으로 나아가는데, 호수 가에 기념품 가게들인 듯한 건축물이 보인다. 무심히 스쳐 갔지만 나중에 알고 보니 건륭제가 소주(蘇洲) 거리를 본 따 만든 상가로, 궁궐에서는 할 수 없는 서민 체험을 위해 조성했는데, 현재도 여행자들을 위한 기념품이며 음식을 제공하는 상가로 활용되고 있다고 한다.

마침내 이화원 둘러보기를 마치고 뒷문인 북문으로 나왔다. 둘러보기를 '마쳤다'고 했지만, 본 것보다 못 본 것이 더 많을 수도 있고, 안 것보다 알 기회를 갖지 못한 것을 더 많이 품은 채 이화원을 나서야 했지만, 둘러본 곳곳마다 서려 있는 서태후의 행적은 이화원 둘러보기의 잊을 수 없는 기억으로 남았다. 어찌하였거나 48년의 권력을 끌어 올 수 있었던 그 동력과 카리스마가 놀랍기도 하지만, 권력을 가진 한 사람의 힘이 나라를 흥하게 할 수도 있고 망하게 할 수도 있다는 새삼스러운 사실(事實)과 사실(史實)을 서태후에게서 뚜렷하게 보고 느낄 수 있었다.

조국이 돌아 보인다. 누가, 어떤 생각을 가진 사람이 나라의 지도가 되느냐에 따라 역사의 부침을 거듭해 온 역사가 다시 보인다. 어찌 나라뿐이랴. 작게는 가정에서부터 사회의 작고 큰 집단에 이르기까지 지도자의 역할에 의해 집단의 진퇴가 결정될 수 있다. 모든 것이 민주화되고 있는 현대 사회에서는 지도자의 힘으로만 모든 것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구성원의 집단 사고도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이지만, 그것도 지도자의 역량에 따라 사고의 효율성을 높일 수 있음은 부인할 수가 없다.

오늘 우리 일행은 모두들 한 집단의 책임을 지고 있는 사람들이다. 서태후의 행적을 따라온 이화원 둘러보기를 마치면서, 우리가 책임지고 있는 집단을 어떻게 경영해 나가야 할 것인가를 돌아본다.

해는 붉게 물들어 가고 바람이 분다. 만찬이 준비된 식당으로 간다. 생애의 만찬 시간을 향해서도 나아가고 있다. 일행 중 누가 보이지 않는다고 안내원과 우리 여행의 기획자 김동하 씨가 찬바람 지나가는 거리를 서성거리고 있다. 우리는 누구도 서성거리게 해서는 안 된다. 아프게 해서도 안 된다.

그 저녁 식당에는 도수 높은 중국 술이 우리를 다시 한 번 일깨우고 있었다.♣(2010.2.20)

 

■ 중국 여정기, 다음 링크로 계속 됩니다.

    중국연수기

    천단공원의 놀라움

    고궁과 이화원 그리고 서태후

    지하 세상의 군단과 궁전

    만두집 덕발장

    화청궁의 사랑과 눈물

    대안탑과 서안성

 

 

※ 참고 자료

 

 

대머리 서태후, 性病 걸린 동치제(서태후의 아들)환관은 알고 있었다

   

허윤희 기자 [조선일보]

입력 : 2013.11.09 02:59

 

역사서엔 없는 마지막 황실 풍경

당시 환관의 생생한 증언 모아 재구성

 

 

자금성, 최후의 환관들신수밍 외 지음쭤위안보 엮음주수련 옮김글 항아리476

 

청나라 말기 '철의 여인'이라 불린 서태후의 위엄은 눈빛에 있었다. 직사광선 같은 눈빛을 누구도 감히 마주 대하지 못했다. 목소리 또한 크고 위엄이 서려 있었다. 조정 회의 때는 대신들에게 집안의 소소한 일을 묻다가 돌연 물었다. "그대들이 맡은 일들은 어떤가?" 그 한마디에 대신들은 말끝을 흐렸고, 태후를 알현하고 퇴청할 땐 온 이마에 땀방울이 맺혔다. 기분이 안 좋을 때 잘못 걸린 태감(太監:·청 시대 환관의 우두머리를 일컫는 말)들은 끔찍한 화풀이 대상이 됐다. 태후가 자신의 대소변을 나이 든 태감에게 강제로 먹여 죽음에 이르게 한 일도 있었다.

 

서태후는 건강을 위해 사람의 젖을 매일 먹었다. 젖이 잘 나오는 두 부녀자를 선발해 이들이 몸에 꼭 붙는 진홍색 상의를 입고 유두만 드러낸 채 무릎을 꿇고 앉으면 태후는 침상에 누운 채로 젖을 먹었다. 궁에서는 부녀들이 좋은 젖이 나올 수 있도록 닭이며 오리, 생선, 돼지 등 산해진미를 제공했으나 소금이나 간장은 넣지 않았다. 젖에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친다고 알려졌기 때문이다. 이들은 오로지 서태후에게 바칠 젖을 달게 하기 위해 좋은 음식을 약 먹듯 먹어야 했다.

   

서태후는 대머리였다?

 

청나라 황궁에서 벌어지는 내밀한 속살을 그려낸 책이다. 중국 최후의 환관(태감)들이 기억을 더듬어 재구성한 청나라 황실의 풍경이 화려하면서도 쇠잔하다. 태감들의 지식수준과 사고방식이 달라 시각도 제각각이지만 분명한 것은 모두 이들이 몸소 체험하고 들은 일이라는 것. 기존 역사서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펄떡 뛰는 묘사가 이들의 입을 통해 흘러나온다.

 

서태후의 아들인 황제 동치제(同治帝)는 천연두로 요절한 것으로 알려졌지만 실제로는 화류병(花柳病)이었다고 이들은 증언한다. 날마다 궁 밖 창기의 집을 드나들며 향락을 즐기다가 몹쓸 병에 걸린 것. 그러나 어의는 사실을 고하지 못하고 천연두에 걸렸다고 했고, 엉뚱한 처방이 이뤄진 끝에 동치제는 목숨을 잃었다. 

 

 

 

서태후는 늙어서도 칠흑 같은 머리를 자랑한 것으로 알려졌지만 실은 '듬성듬성한 대머리'였다는 기록도 있다. '태후의 머리는 늘 빗기가 어려웠다. 40세 이후에는 벌써 탈모가 오기 시작해 귀밑가와 뒷머리에만 짧은 머리털이 남아 있었다. 위엄 있는 모습을 좋아했던 태후는 정수리에 붉은 점토로 가짜 머리카락을 붙였고, 머리 양쪽으로 머릿단을 붙였다.'(116)

 

"황제는 늘 배가 고팠다"

 

온갖 부귀영화를 누릴 것 같은 황실의 삶. 그런데 어린 황제가 늘 허기진 상태였다는 증언도 고개를 갸웃하게 만든다. 황제는 태어나자마자 어머니가 아닌 태감과 유모들 손에 길러졌는데, 이들은 어의의 말을 철칙으로 삼아 극도로 경직된 방법으로 황제를 키웠다. 혹여 어린 주인이 탈 날까 봐 '음식을 절제해서 먹여야 한다'는 말을 곧이곧대로 따랐다. '광서제가 열 살쯤이었을 무렵에는 매번 태감 방에 올 때마다 먹을 것을 찾아 들고 도망쳤다. 태감이 쫓아와 무릎을 꿇고 애걸했지만 들고 나온 찐빵은 이미 절반이나 황제의 배 속으로 들어간 뒤였다'.

 

가장 중요한 저자는 1'궁중의 숨겨진 이야기들'을 쓴 신수밍(信修明). 10년간 유학을 공부한 유생 출신이라는 점에서 다른 태감과 구분된다. 서태후, 융유태후, 단강태비 등 세 명의 주인을 차례로 모신 그는 1924'마지막 황제' 푸이가 자금성에서 강제로 쫓겨날 때 함께 나왔다. 관찰력과 친화력이 뛰어나 황궁의 비사를 누구보다 많이 알게 됐고, 덕분에 청대 태감 제도를 체계적으로 정리해 들려준다.

 

융유태후가 청나라를 위안스카이 일파에게 내주고 받은 대가가 고작 매년 400만 위안이었다는 사실은 청 제국이 얼마나 허망하게 붕괴했는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다소 거친 서술과 정교하지 않은 편집이 흠이지만 '날 것 그대로의 역사서'를 읽는 재미가 그런 불편함을 상쇄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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