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여행기

화청궁의 사랑과 눈물

이청산 2010. 3. 1. 15:18

화청궁의 사랑과 눈물

-중국 여정기·5



서안의 여산 북쪽 산록에 자리 잡고 있는 화청지를 찾아간 것은 진시황의 지하군단 병마용갱과 진시황릉을 둘러보고 난 오후였다. 화청지는 당나라 현종과 양귀비의 로맨스 무대로 유명한 곳이다. 진시황의 유적들은 천하를 통일한 황제의 엄청난 위엄과 위력이 과시된 사적들이었다면 화청지는 황제의 낭만적 생애가 아기자기하게 깃들인 곳이라 할 수 있다.

서주(西周) 말엽 주유왕(周幽王)이 현재의 화청지(華淸池) 위치에 여궁(驪宮)을 지었고,  644년에는 당 태종이 여산의 온천지대에 탕천궁(湯泉宮)을 건축하였다. 당의 6대 황제 현종이 탕천궁을 중축하여 지금의 화청궁(華淸宮)으로 개명하였다고 한다.

화청궁으로 들어서니 먼저 보이는 것은 아담한 연못 화청지다. 돌을 쌓아 장식을 한 못 둘레에는 수양버들이 늘어지고 '화청승지'라는 비석이 서 있는데 현종과 양귀비가 물에 비친 자신의 모습들을 보며 산책을 즐기던 곳이다. 화청궁 경내에 주류를 이루는 건물들은 현종과 양귀비가 함께 목욕을 즐겼다는 해당탕을 비롯하여 양귀비가 목욕했다는 귀비지와 연화탕, 태자탕, 상식탕 등 목욕탕들이 대부분이다. 목욕탕이 많은 곳은 이곳이 온천지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황제와 여인은 주로 목욕으로써 그들의 쾌락을 추구하려 했던 것 같다. 아홉 마리의 용 조각이 물을 뿜어내고 있는 구룡탕 안에는 양귀비의 전라상 대리석 조각이 서 있어 목욕을 즐겨했던 귀비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다. 이외에도 현종과 양귀비가 사랑을 맹세한 장생전, 양귀비가 목욕을 한 후 자연 바람을 이용해 머리를 말렸던 높다란 누각 관풍루가 눈길을 끈다. 현종과 양귀비가 처음 이곳에서 만난 이래 14년 동안 42차례나 이곳에서 사랑을 나누었다고 한다.

양귀비는 원래 현종의 열여덟 번째 아들 수왕(壽王)의 비였다. 현종의 며느리였던 셈이다. 무혜비(武惠妃)가 죽자 쓸쓸해하던 현종은 미모가 뛰어난 며느리 양옥환에게 마음을 두어 잠시 절에 출가를 시켰다가 환속 시키는 과정을 거쳐 귀비로 삼게 된다. 불륜의 사랑이었지만, 그 불륜을 조장한 것은 다른 사람 아닌 그녀의 오빠 양국충이었다. 승상 양국충은 환관 고력사와 함께 현종이 화청지에 행차하는 일정에 맞추어 양귀비가 목욕탕에서 막 목욕을 끝내고 나오는 장면을 연출한다. 양귀비의 부끄러운 듯 발그레해진 얼굴과 야릇한 자태에 현종은 넋을 잃게 되고 이로써 두 사람의 정열적인 로맨스가 시작된다. 현종과 양귀비가 목욕을 즐겼던 탕 안의 벽에는 두 사람의 달콤한 사랑의 장면들을 일일이 그림으로 그려 재현하고 있다. 양귀비가 남방에서 나는 여지( 枝)라는 과일을 좋아하자 관리를 급히 파견하게 신선한 과일을 구해 올리게 하기까지 할 정도로 현종은 양귀비를 총애하게 되었다.

미인에게 빠진 현종은 정사는 뒤로 미루어 두고 사랑 놀음에만 젖으면서 연회를 베풀고 시인들을 불러다가 그들의 사랑을 노래로 짓게 했다. 그중에 유명한 노래가 스스로를 적선(謫仙)'이라 일컫던 이백(李白 701∼762)의 <청평조사(淸平調詞)>라는 시이다.

 

雲想衣裳花想容(운상의상화상용)  구름을 보면 그대 옷, 꽃을 보면 그대 얼굴

春風拂檻露華濃(춘풍불함로화농)  봄바람 난간을 스치고 이슬방울 아름다운데

若非群玉山頭見(약비군옥산두견)  선녀 같은 우리 님을 군옥산에서 못 뵈면

會向瑤臺月下逢(회향요대월하봉)  달빛 아래 요대에서 우리 서로 만나리라

 

당대의 유명 시인 이백이 양귀비의 미모와 두 사람의 사랑을 찬양하는 가운데 미인의 치마폭에 싸여 세월 가는 줄 모르던 현종은 제국을 다스려야 하는 자신의 무거운 책무를 점점 잊어갔다. 급기야는 나라의 경제적 토대가 무너지고 군사적인 질서가 문란해지기 시작했다.

귀비의 그늘에서 권력을 한 손에 쥐고 휘두르던 오빠 양국충과 변방에서 세력을 키워온 타타르족 출신의 장수 안록산(安祿山)의 충돌이 마침내 반란으로 이어지게 된다. '안사의 난'이란 일컬어지는 이 반란은 미인에게 빠져 정사를 돌보지 않는 황제에 대한 반감이 한 몫 하였음은 물론이다.

난리가 나자 황제는 귀비를 데리고 사천 지방 험한 곳으로 피난을 떠나던 중 장안의 서쪽 지방인 마외(馬嵬)에 이르러 황제의 총명을 흐리게 한 양 씨 집안에 대한 분노와 원망이 폭발한 신하와 군사들이 마침내는 양국충을 죽이고 귀비에게도 죽음을 강요하는 지경에까지 이르게 된다. 귀비는 황제의 울부짖음도 아랑곳없이 길 가의 어느 불당에서 목을 매어야 했고, 황제도 제위를 내놓게 된다. 시름과 그리움으로 피난지의 세월을 보내던 지난날의 황제 현종 이융기는 난이 평정되어 장안으로 귀환한 지 몇 달 만에 미인의 뒤를 따름으로써 그들의 로맨스는 허무하게 끝을 맺고 만다.

한 때는 이 화청지에 낭만이 넘치는 달콤한 사랑의 이야기로 가득 찼지만, 그 사랑은 그들의 사랑만큼이나 드센 허무와 쇠락을 불러왔으니, 화청지 아리따운 연못의 물은 오늘날은 눈물이 되어 가득 차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현종과 비극적인 러브 스토리를 후세의 시인 백거이(白居易, 772-846)가 '장한가(長恨歌)'라 하여 장문의 미려한 노래로 엮어 내었다. 귀비가 현종의 눈에 들어 화려하고도 농염한 사랑을 나누다가 비극적인 최후를 맞기까지의 사랑의 역사를 기이한 환상과 풍부한 상상력을 유감없이 발휘하여 엮어낸 노래다

 

漢皇重色思傾國  한나라 황제 예쁜 여자 좋아하여 절세미인 구하였으나

御宇多年求不得  용상에 오른 지 오래도록 찾아내지 못 하였네

楊家有女初長成  양씨 집안의 딸  이제 어엿한 아가씨 되었건만

養在深閨人未識  규방에 깊숙이 있으니 사람들이 어이 알꼬?

天成麗質難自棄  타고난 아름다움 버리지 못하는 법

一朝選在君王側  하루아침 뽑혀서 황제를 곁에 모셨네.

廻眸一笑百媚生  눈동자 굴려 살짝 웃으면 온갖 아름다움 생겨나니

六宮粉黛無顔色  육궁의 미녀들 모두 빛을 잃었네.

春寒賜浴華淸池  쌀쌀한 봄날 화청궁 온천에 목욕을 시켜

溫泉水滑洗凝脂  매끄러운 온천수에 백옥 같은 살결 눈부시네.

侍兒扶起嬌無力  시녀들이 부축해 일으키니 나른한 그 자태

始是新承恩澤時  이날 비로소 황제의 사랑 받았다네

雲 花顔金步搖  구름 같은 머리 꽃다운 얼굴 떨잠을 꽂고

芙蓉帳暖度春宵  부용꽃 방장에서 따뜻하게 봄밤을 지냈네.

……

 

'장한가'가 세상에 나오자 세상 사람들은 시 구절을 즐겨 암송했으며, 당시 장안에서는 '장한가'를 곡에 맞춰 부를 줄 아는 하녀는 몸값이 두 배로 솟았다는 기록도 보인다.

'장한가'는 오늘날에도 애송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이 화청지에 무대를 마련하고 하절기인 4월부터 10월까지 무극으로 공연되어 많은 이들로부터 사랑을 받고 있다고 한다. 모택동이 친필로 쓴 '장한가'가 동판에 영인되어 화청궁의 누각 한 벽면을 장식하고 있어, 지난날에 무르녹았던 사랑의 이야기를 다시 들려주고 있다.

사람들은 사랑의 영원성을 믿고 싶고 바라고 싶지만, 영원한 사랑이란 실로 얼마나 어려운 일이던가. 굳은 것이 잘 부러지듯 짙은 사랑일수록 깨어지기도 쉬운 것이 또한 사람의 일 아니던가. 영원한 사랑을 바랄수록 온도와 열기를 잘 이끌어가면서 나누어야 할 것임을 화청 연못은 가득한 눈물로 호소하고 있는 것 같다.

화청궁에는 아득한 옛날의 황제와 미인의 이야기만 담고 있는 것이 아니라 중국 현대사의 한 장면도 담겨 있어 화청궁 사랑 이야기에 덧 붙여둔다.

화청지 동쪽 한 켠에 오간청(五間廳)이란 누각이 있는데, 소위 '서안사건(西安事件)'의 현장으로 1936년12월12일 동북군(東北軍; 만주군) 총 사령관 장학량(張學良)이 국민당정권 총통 장개석(張介石)을 서안 화청지(華淸池)에서 체포하여 감금한 후 공산당과 내전을 중지하고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에 맞서 함께 투쟁할 것을 요구하였다. 이 사건을 계기로 국민당과 공산당은 국공내전(國共內戰)을 중단하고 합작(合作)을 통하여 일본에 함께 대항하여 싸우게 되었다고 한다. 이 무서운 사건이 로맨스의 무대에서 일어난 것도 화청궁의 사연을 완상하는 이방인의 눈에는 한 호기심으로 새겨진다.

화려하고도 쓸쓸한 사랑의 이야기를 되새기며 화청지를 나설 때, 화청궁 문 앞의 거리에는 봄이 오면 역사 무극 '장한가'를 화청궁에서 다시 공연할 것이라는 플래카드가 희미한 옛 사랑의 그림자처럼 나부끼고 있었다.♣(2010.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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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국연수기

    천단공원의 놀라움

    고궁과 이화원 그리고 서태후

    지하 세상의 군단과 궁전

    만두집 덕발장

    화청궁의 사랑과 눈물

    대안탑과 서안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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