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여행기

지하 세상의 군단과 궁전

이청산 2010. 3. 1. 15:15

지하 세상의 군단과 궁전

-중국 여정기·4



해는 밝게 빛나지 않았지만 서안(西安)의 날씨치고는 아주 맑고 포근한 날, 일행은 서안 외곽지역인 임동구(臨潼區)의 진시황릉을 지나 진시황 병마용갱을 찾아갔다. 진시황릉은 병마용갱을 둘러본 후에 가기로 했다.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기념품 상가를 지나 광장으로 들어가니 먼저 맞이하는 것은 천하를 통일한 중국 최초의 황제 진시황의 거대한 석상이다. 일세를 풍미했던 위세가 당당하다. 네 마리의 말이 곧장 달려나갈 듯한 기세로 포효하고 있는 모습이 서 있는 광장을 지나 한참을 걸어가니 '진시황병마용박물관' 커다란 정문이 나타났다. 그리고 병마용갱은 경악할 규모와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왔다.

박물관 경내에는 3개의 용갱과 진시황제문물진열청이 있었다. 1974년 가뭄에 시달리던 농부들이 우물을 파다가 우연히 용갱을 발견하면서 동서 230m, 남북 62m, 면적 14,260㎡의 제1호 용갱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게 된다. 갱에는 1개 군진 규모에 해당하는 6,000여 점의 도용(陶俑), 도마(陶馬)와 50개의 전차가 실전 배치 상태로 늘어서 있다. 도열해 있는 모습들이 마치 실제의 군사가 출전 채비를 갖추고, 당장이라도 전장을 향해 달려나갈 것 같다. 목이 없거나 파손된 것도 있었지만, 모두 실물 크기로 만들어져 있었다. 생김새가 다 다를 뿐만 아니라 직위에 따라 장군, 장교, 병사의 복색도 각기 다르고, 표정이며 입고 쓰고 있는 모자와 갑옷이 실재 인물로 착각할 만큼 매우 섬세하고 정교하게 조각되어 있었다. 1호 갱에 이어 1976년에 발굴되었다고 하는 길이 96m, 너비 84m, 면적 8,064㎡의 2호 갱에는 궁노병, 보병, 차병, 기병 등의 병과로 구성된 89개의 전차, 2,000여개 이상의 도용과 도마가 도열하고 있다. 2호 갱과 같은 해에 발굴한 3호 갱에서는 300㎡의 면적에서 72개의 병마용과 전차 1대가 발굴되었다고 하는데, 이 갱은 군진의 지휘부인 군막이라고 한다. 땅만 파여 있을 뿐 아무 것도 없는 4호 갱도 있고, 아직 발굴하지 않은 부분도 많이 있다고 한다. 출토물이 많이 파괴된 것은 진나라가 멸망할 때 항우(項羽 BC. 232∼202)가 모두 파괴한 탓이라 하지만, 출토 후에 보존과 관리를 잘하지 못해 파괴되거나 훼손된 것도 많다고 한다. 중국 정부는 유물을 효과적으로 보존할 수 있는 방법을 확립할 수 있을 때까지 발굴을 중단하기로 했다고 한다.

별도의 전시장에는 입사용(立射俑), 궤사용( 射俑), 기병(騎兵)의 사실감 넘치는 모습이 생동감 있고 개성적인 모습으로 예리한 병기들과 함께 전시되어 있었다. 고대인과 현대인의 만남을 상징하는 커다란 진나라 무사상과 현대 소녀의 조각상이 서 있는 진시황제문물진열청에는 진시황릉 봉토 부근에서 출토된 네 마리의 말이 끌고 있는 동거마(銅車馬)상이 여러 가지 유물과 함께 전시되어 있다.

이 박물관의 갱들에서 출토된 8,000여 개의 도용은 진시황의 친위대로서 적진을 향해 좌군, 우군, 중군 순으로 배치하고, 지휘관을 보호하기 위한 군막은 제일 끝에 두고 있다. 실재의 군대가 아니라, 진시황의 사후를 대비한 지하에 매설한 지하 대군단이다. 진시황은 왜 토용으로나마 지하에 엄청난 규모의 대군단을 배치했던 것일까?

진시황은 천하를 통일한 정복 군주였지만, 내심은 향년 50세로 마감하기까지의 한 생애를 배신에 대한 두려움과 죽음에 대한 공포로 점철했던 것 같다. 겨우 13살에 부왕인 장양왕으로부터 왕위를 물려받은 이름이 영정( 政)이었던 진시황은 국가 대사를 태후와 대신들에게 의탁했다가 BC 238년 22살에 대관식을 치르고 그 때부터 손수 국정을 다스리기 시작하면서, 측근인 태후의 총신 노독을 독살하고 태후를 연금하였으며, 상방(相邦) 여불위(呂不韋)를 파면하고, 개혁 정책을 실시하여 국력을 강화하고 통일에 필요한 여건을 마련해 나갔다. 그 후 BC 230년부터 BC 221년에 이르기까지 10여 년 간의 치열하고 처절한 전쟁을 거쳐 한, 조, 연, 위, 초, 제 등의 제후국을 쳐 천하를 통일하고, 스스로를 진(秦)의 시황제(始皇帝)라 칭했다. 군현제를 시행하고 직제와 법제를 정비하여 강력한 중앙집권적 봉건제국을 건설하고, 도량형·문자·화폐의 통일 등 3대 통일을 이루어 천추에 길이 남을 치적을 이룬 '천고 제일의 황제'로 꼽히기도 했다. 그러나 진시황은 자신의 영원한 권력 유지를 위해 서복(徐福)으로 하여금 수천 명의 동남동녀를 거느리고 삼신산에 들어가 장생불사의 영약을 구해 오도록 하는 한편, 만리장성, 아방궁, 능묘의 축조 등 대규모 토목 공사를 일으켜 수많은 백성들을 죽음과 노역으로 몰아넣었다. 이런 일련의 과정을 통해서 진시황은 수많은 적들을 만들면서 하늘을 찌를 듯한 원성에 휩싸이게 되자 사후에라도 자신에게 도전해 올 반역자, 배신자들을 처단하기 위해 지하 세상에서도 대군단이 필요했던 것 같다.

어찌하였거나 2천여 년이 지난 후의 이 병마용갱은 세계를 깜짝 놀라게 한 문화제가 되어 1978년 당시 시라크 프랑스 총리는 '세계적으로 7대 기적이 있었는데, 진 용갱의 발견은 세계 8대의 기적이라고 할 수 있다.'는 말로 병마용갱을 격찬하고 있다.

진시황의 현세와 내세를 아우르는 만수무강과 권력 유지에 대한 집착은 병마용갱의 건설과 함께 방대한 능묘의 건설에도 국력을 모으게 했다. 병마용갱을 나와 서쪽으로 1.5㎞ 떨어진 진시황릉을 찾아갔다. '秦始皇帝陵'이라는 표지판과 성문만 없었다면, 숲이 우거진 하나의 작은 산으로만 볼 뻔했다. 능 전면에 정상까지 오르는 200m의 돌계단이 축조되어 있고, 계단 섶으로는 커다란 석류나무들이 서 있었다. 진시황릉을 봉토한 사실(史實)을 기록한 안내판이 서 있고 찌든 몰골의 노파가 수예 소품을 들고 팔아줄 것을 애걸하고 있다. 정상에 오르니 테니스장 만한 평탄한 공간이 나타나고, '秦始皇陵地宮'을 안내하는 표지판이 서 있고, 지하 궁전의 모습을 평면도로 보여 주는 표지석이 비스듬히 누워 있었다. 지금은 능의 경계가 동서 345m, 남북 360m, 봉토의 크기는 동서 160m, 남북 120m, 높이 79m로 작은 산만한데, 최초의 경계는 동서 508m, 남북 535m로 훨씬 넓었고, 사서의 기록에 따르면 높이도 115m(50여장) 이상이었다고 하지만, 당나라 말 황소의 난 때 크게 훼손되고, 국공(國共) 내전 당시에 국민당이 이곳에 참호를 구축하는 등으로 세월이 흐르는 사이에 크게 훼손되었다고 한다. 시황제는 봉토 주위에 이중의 성벽을 쌓아 回자 형으로 황궁처럼 꾸몄는데, 축조 당시에는 면적이 내성은 785,900㎡, 외성은 2,035,100㎡에 이르렀고, 내·외성 모두 성벽으로 둘러싸고 있었다고 하지만, 성과 성벽은 항우(項羽)가 모두 불태워버렸다고 한다.

진시황릉은 외형의 규모만 엄청난 것이 아니었다. 병마용박물관팀의 연구 결과에 따르면 시황제릉은 거대한 지하도시를 이루어 면적이 2㎢에 이른다고 한다. 사마천(司馬遷, BC 145?∼BC 86?)의 '사기(史記)'에 의하면, 온 나라에서 끌려온 70만 명으로 하여금 지하 궁전을 짓게 하면서, 온갖 보물이 가득 차 있는 황제의 관 주위는 구리를 녹여 두르고, 이 벽을 뚫고 들어가는 사람은 화살 세례를 피할 수 없게 설계하여 만들었다고 한다. 또한 수은으로 만든 하천과 호수를 조성하였으며, 인어 기름으로 만든 초가 황제의 영정을 밝히게 했다고도 한다. 그리고 지하궁전 구조의 비밀을 유지하기 위해 공사를 끝내고 나오는 장인들에게 현실(玄室) 안의 널길을 봉쇄하게 한 후 현실 밖의 널길도 완전히 봉쇄하여 한 사람도 살아 나오지 못하게 했다고 한다. 사마천의 이 기록은 근래까지 진위 여부의 논란을 일으키다가 ,2003년11월 중국고고학회에서 로봇에 의한 내부 촬영으로 사마천의 기록이 사실임을 밝혀냈다고 한다.

지금까지 무수한 도굴이 시도되었지만, 다행히 지하궁전까지 도달한 도굴꾼은 없다고 하며, 중국 정부는 능의 훼손 가능성을 우려하여 발굴을 미루고 있다고 한다. 1987년에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기도 한 진시황릉이 발굴되면 세계에는 또 하나의 기적이 나타나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부단한 '기적'을 창출해 온 진시황은 이로 인해 중국 역사상 15년간이라는 역사상 제일 단명한 왕조의 역사를 기록하게 된다. BC 210년 진시황은 순행 도중 사구팽대(하북성 광종현 경내)에서 50세의 나이로 병사하고 말았다. 아들 호해(胡亥)가 형 부소(扶蘇)를 모살하고 왕위를 차지하여 진2세가 되었으나, 그 때 진왕조는 이미 막다른 길에 처해 있었다. "왕후장상에 어찌 따로 씨가 있겠는가?(王侯將相 寧有種乎?)"하고 외치며 진승(陳勝)과 오광(吳廣)이 중국 최초의 농민반란을 일으키자 전국 각지에서 농민들이 봉기하면서 진시황의 통일대업은 허무하게 스러지고, 항우를 물리친 유방(劉邦, BC 247?∼BC 195)에 의하여 한나라가 건설되었다. 진나라 멸망의 원인은 사형과 육형만도 수십 종에 달하고 참혹하기 이를 데 없는 가혹한 법률과 혹형의 남용, 그리고 통일 후 10년간 오령(五嶺) 수비에 50만, 장성 축조에 50만, 북방 흉노 방어에 30만, 아방궁과 능묘 건조에 70만 등 당시 전국 인구의 10%를 차지하는 200여 만의 인부를 징발하여 국력을 소진하게 만든 대규모 토목공사와 함께 극심한 가렴주구와 착취 때문이었다고 역사가들은 말한다.

진시황의 역사적 공과에 대해서는 오늘날까지도 논란이 분분한 터이다. 그러나 현실 세상은 물론 지하 세상에서까지 한사코 놓지 않으려 했던 황제의 권위와 권력을 오로지 백성의 삶을 유린함으로써 누리려 했고, 이로 말미암아 제국을 멸망에까지 이르게 한 역사적 과오는 부인할 수 없다. 문득 한 줄의 기록조차 남기지 못하고 역사의 심연 속으로 침몰해버린 앙코르제국(802 1431)이 떠오른다. 거대한 건축물을 위하여 수많은 인민들이 희생의 제물로 받치고 왕의 명령에 복종하지 않는 사람을 참혹하게 처형하는 장면을 새긴 앙코르와트의 지옥도에는 지금도 간혹 벼락이 친다고 한다. 민심을 외면한 권력은 허무하게 멸망하는 것임을 앙코르의 역사뿐만 아니라 진나라의 역사도 웅변하고 있는 것 같다.

황릉의 정상에 서서 서안을 내려다본다. 황제에 얽힌 풍운의 역사를 아는 듯 모르는 듯 광활한 벌판에 인가 몇 채가 고즈넉이 앉아 있다. 저 동쪽 벌판 어디쯤에 황제의 지하 군단이 버티고 있을 것이다. 그 철갑의 지하 군단도, 보물 가득할 지하 궁전도 한 사람의 부귀와 영화를 영원히 지켜 주지는 못했다. 무엇이 이 세상에서 영원할 수 있는가. '공자 아카데미'가 주선한 중국 여행을 하고 있는 지금, 영원한 것은 어떠한 권력도 물질도 아니라 오직 인간의 '어진[仁] 마음과 생각'뿐이라는 너무나 평범한 진리를 다시 한번 뇌면서 쓸쓸히 황릉을 내려온다.

오늘 만찬은 서안의 별미를 맛보게 해준다는 만두집 '덕발장'에서 베풀어진다고 한다. 그 만두에서 우리는 또 어떤 중국을 만날 수 있을까?♣(2010.2.15)

 

■ 중국 여정기, 다음 링크로 계속 됩니다.

    중국연수기

    천단공원의 놀라움

    고궁과 이화원 그리고 서태후

    지하 세상의 군단과 궁전

    만두집 덕발장

    화청궁의 사랑과 눈물

    대안탑과 서안성

'중국 여행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만두집 덕발장  (0) 2010.03.01
화청궁의 사랑과 눈물  (0) 2010.03.01
고궁과 이화원 그리고 서태후  (0) 2010.03.01
천단공원의 놀라움  (0) 2010.03.01
중국 연수기  (0) 2010.03.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