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산수필

버려진 그림을 보며

이청산 2010. 2. 28. 09:45

버려진 그림을 보며



 그림이 버려져 있었다. 쓰레기 더미 위에-.

네모난 구릿빛 테 안쪽에 하얀 하드보드지 테를 겹으로 두르고 그 안에 14·5호 정도 크기의 그림을 담았다. 기와를 얹은 높다란 담이 있고, 담 너머에는 감나무인 듯한 나무 한 그루가 굵은 가지를 펼치고 서 있다. 한 덩어리로 둥그렇게 그린 잎들 사이에는 붉은 열매가 달려 있다. 아이 하나는 엎드리고, 하나는 등 위에 서서 열매를 따려고 손을 뻗치고 있다. 강아지가 한 마리가 엎드린 아이 앞에서 떨어지는 열매를 받아먹으려고 뛰어 오르고 있다. 어린 여자 아이 하나가 담 곁에서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고, 초가 지붕 위로 해가 둥실 떠 있다.

울퉁불퉁하고 두툼한 와트만지에 물감도 조금 섞어 파스텔로 그린 동화 풍의 그림이다. 단순하게 그렸지만 엎드린 아이의 힘들어하는 표정이며, 신을 벗고 올라서서 열매를 따려고 안간힘을 쓰는 아이의 표정이 재미있고, 짓고 있는 동작이며 모습들이 해맑고 순진해 보인다. 곁에 숨어 보고 있는 여자아이의 모습도 미소를 짓게 한다. 이 아이들의 일을 모른 체 하고 점잖게 떠 있는 해의 모습도 인상적이다. 그 곱고도 정겨운 풍경을 보고 있노라니 어린 시절의 기억 한 자락이 솔솔 풀려나올 듯도 하다.

화랑 어느 한 자리에, 혹은 누구네 집 거실 벽 한 곳에. 혹은 아롱다롱 꾸며진 아이들 방의 벽에 걸려 있어야 할 그림이 골목길 전봇대 아래 어지럽게 쌓여 있는 쓰레기 더미 위에 있다. 쓸모 없는 쓰레기로 생각하여 누가 버렸다. 색깔도 바래지 않아 선명하고, 그린 이의 서명도 뚜렷한 그림이 지금 쓰레기가 되어 있다.

버린 사람은 왜 쓸모가 없다고 생각한 걸까? 왜 버린 걸까? 아, 저것 때문에 버린 걸까? 액자 오른쪽 아래 한 부분이 조금 떨어져 나갔다. 그래서 쓸모 없다고 생각하고 버렸나 보다. 그렇다면 그림의 주인이 보고 있었던 것은 그림이 아니라 액자였단 말인가. 벽에 좋은 그림 하나를 걸어 두었던 것이 아니라, 사각의 구릿빛 액자 하나를 걸어 두고 그 액자를 감상하고 즐기다가, 액자의 한 귀퉁이가 조금 깨어지니 보기 싫어져 버린 것인가. 그래서 쓰레기 더미에 버린 것인가.

불교의 선가 법어에 '견지망월(見指忘月)'이란 말이 있다. 손가락으로 달을 가리키는데 달은 보지 않고 손가락만 본다는 말이다. 불교적인 의미는 따로 있겠지만, 사물의 본질은 보지 못하고 주변만 기웃거린다는 말도 될 것이다. 사소한 일에 정신을 팔다가 정작으로 중요한 일은 소홀히 하는 어리석음을 뜻한다고도 볼 수 있다. 누구나 그런 어리석음을 범할 수는 있지만 깨어진 액자로 인하여 그림까지 내다버린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지나친 일인 것 같다.

그렇게 버린 것을 보니 화랑이나 화가에게서 비싼 값을 치르고 산 것 같지는 않다. 화가한테서 기증을 받았거나, 소유자에게서 얻어 가진 모양이다. 대가를 치르고 산 것이라면 쉽게 비릴 리가 없을 것이다. 얻은 것이라 하더라도 준 사람의 성의를 저리 박대할 수 있을까. 화가나 기증자가 저 버려진 그림을 본다면 심정이 어떠할까.

정년으로 일손을 놓아야 할 날이 다가오고 있다. 그동안의 생애를 기념하여 써 온 글들을 모아 책으로 묶는 게 어떻겠느냐고 주위 사람들이 권하기도 한다.

몇 년 전에 수필집 한 권을 내어 여러 사람들에게 나누어준 적이 있다. 책을 내고 나누어주는 과정에서 적잖은 힘이 들었다. 글을 쓰기도 어려운 일이지만, 책으로 묶는 일도 쉽지 않다. 책을 만들어 내고 난 다음에 배포하는 일은 더 어렵다. 서점에 깔아 날개 돋친 듯 팔릴 책이면 모르되, 그렇지 않으면 기증본이 대부분인데, 주고 싶은 사람을 찾아 주는 일이 여간 어렵지가 않다. 따는 심혈을 기울여 쓴 글들인데 아무나 줄 수도 없고, 사람들을 가려 누구는 주고 누구는 주지 않자니 마음이 많이 갈린다.

책을 받아 알뜰히 읽으면서 쓴 이의 심정에 공감해 주면 참으로 고마운 일이고, 공감은 못해도 열심히 읽어주면 또한 고마운 일인데, 관심 없이 책장만 주르르 넘기거나 아예 책장조차도 거들떠보지도 않는다면 그보다 더 서운한 일이 없을 것이다. 혹은 장롱 받침으로 끼워버리거나 쓰레기 속에 던져버린다면 그보다 더 참담한 일도 없을 것이다.

그 때 내가 나누어준 책 중에서도 '고마움'으로 읽힌 책도 있겠지만, 모르긴 하되 '서운함'과 '참담함'을 겪어야 했던 것도 없지 않을 것이다. 어느 쪽이 더 많고 적을지는 모르겠으나 '무명 수필가의 책을 누가 그리 열심히 읽었으랴' 하고 생각하면 다시 책을 내는 일이 선뜻 내키지가 않는다. 골목길 쓰레기 더미 위에 버린 그림을 보니 더욱 그러하다.

손가락으로 달을 가리키면 손가락을 볼 것이 아니라 달을 유심히 볼 줄 아는 사람을 만나면 좋을 일이련만, 액자가 깨어졌다고 그림을 버리는 사람을 만나면 책의 운명 또한 얼마나 참담하게 될 것인가. 손가락이 아니라 달을 진실로 볼 줄 아는 사람, 액자가 깨어져도 그림을 소중하게 여겨 줄 사람을 만나기란 쉬운 일만은 아닐 것 같다.

그럴 바에야 쓴 글을 인터넷 온라인 위에 띄워 놓고 관심 있는 사람이면 누구나 찾아와 읽을 수 있도록 하는 것이, 글을 쓴 사람도 읽는 사람도 즐거운 일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출판비가 들지 않으니 책을 팔아야 할 일도 없고, 전자 문서로 읽는 것이니 책을 사야 할 일도 없다. 그러면서도 쓴 이와 읽는 이가 서로 교감하며 읽을 수 있으니 얼마나 좋은 일인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 하여 쓰레기 더미에 버릴 일도 없으니 더욱 좋은 일이 아닌가. 어떤 전자 문서는 악성 댓글 때문에 버려지는 것보다 더 큰 고통을 겪는 경우도 있지만, 작품으로 쓰는 글에야 누가 굳이 악의적인 댓글을 붙일 것인가. 감상 후 남긴 평설이라면 기꺼이 받아들일 수도 있는 일이다.

살아가면서 보고 느끼고 생각한 일들을 글로 쓴다. 쓰레기 더미 위에 버려진 그림을 생각하며, 그 화가 심정을 상상하며 인터넷 카페며 볼로그에 정성을 모아 글을 올린다. 버려지지 않을 글을 써서, 버려지지 않을 책을 내고 싶다. 그러나 버려지고 싶지 않은 것은 나의 욕심일 뿐, 읽는 이의 뜻은 아니다. 그래서 버리지도 않고 버려지지도 않을 인터넷 글 집이 좋다. 정년도 없는, 정년의 생애를 기념해야 할 필요도 없는 인터넷 글 마당이 좋다.

오늘은 누가 나의 카페를 찾아올까. 내일은 누가 나의 블로그를 찾아와 마음을 나눌 것인가. ♣(2010.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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