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산수필

아버지의 세월

이청산 2009. 10. 31. 10:51

아버지의 세월



남매들과 권솔 모두 아버지의 제상 앞에 꿇어 엎드렸다. 초헌례에 이어 축문을 낭독했다.

"때는 바야흐로 기축년 구월 초여드레 효자 효균은, 감히 돌아가신 아버님, 어머님께 밝게 사뢰나이다. 세월은 흘러 돌아가신 아버님의 제삿날이 돌아왔습니다. ……."

해마다 올리는 제사요, 그 때마다 낭독하는 축문이지만 오늘은 감회가 달랐다. 올해는 아버지가 영면에 드신 지 삼십 주기가 되는 해이기 때문이다.

시간의 흐름은 모든 것을 바꾸어놓기 마련이지만,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강산이 세 번이나 바뀌는 세월이 흐르는 사이에 우리 가족사도 숱한 변전을 거듭해 왔다. 슬하 오 남매 중에 셋은 아버지가 돌아가실 때의 연치를 훨씬 넘어버렸고, 넷째인 작은아들도 작년에 회갑을 맞이했고, 막내도 지명의 중반 고개를 바라보고 있다.

아버지는 예순아홉에 돌아가셨다. 아버지의 생애는 풍운과 역경의 연속이었다. 일찍이 신병을 얻어 간고를 겪으시면서도 의지와 패기로 싸우고 인내하며 험난한 세파를 이겨내셨다. 아버지의 중년에는 풍운의 세월을 정리하고 고향 낙동강 강가에서 농사를 짓고 계셨다. 어느 해 가을 큰물이 져서 수확을 앞두고 있던 널따란 땅콩밭이 모두 떠내려 가버렸다. 그 때 아버지는 '이놈의 농사 믿고 있다가는 아이들 글자 하나 못 가르치겠다.'는 생각을 하셨다. 그리고 이듬해 봄에 세간붙이를 정리하여 정든 고향을 떠났다.

이후로 아버지에게는 다시 천신만고한 삶의 이력이 지난하게 쌓여갔다. 그 이력의 품에 안겨 큰아들이 대학을 졸업하고서 나름대로 사회적인 성취를 해나가기 시작했고, 세월이 두께를 더해 가는 사이에 작은아들도 대학을 졸업하여 중등학교 교사로 나아갔다. 모두 거친 세파를 온몸으로 받아낸 아버지, 어머니의 지난한 세월의 결정임은 물론이다.

그 세월 사이에 아버지의 신고도 깊어져갔고, 마침내 와병에 드시고 말았다. 병원을 오가시기도 하고, 어느 요양원에 의탁하시기도 하면서 치병에 애를 쓰셨지만, 종내는 쇠잔해진 기력으로 자리보전을 하셔야만 했다.

나는 그때 대구에서 다섯 시간 정도 버스를 타고 달려야 하는 산골 어느 지방의 고등학교 교사로 근무하고 있었다. 시월 어느 토요일 아침 출근을 하니 학교에 조기가 게양되어 있었다. 밤새 대통령이 횡사했다는 엄청난 뉴스가 보도되었다. 그 아침에 대구의 형수씨가 전화를 했다. 아버지의 병세가 위중하니 빨리 와보라고 했다. 부랴부랴 달려 대구 집에 당도하니 날이 저물었다. 아버지는 혼수에 드신 듯 했고 남매들이 아버지를 둘러싸고 있었다.

어머니께서 '작은아들 왔소!'하고 외치시니 겨우 손을 들어 내 손을 잡으셨다. 체온이 아버지에게서 이미 빠져나간 뒤였다. "아부지! 저 왔습니다."하고 소리치니 입술을 움직이시며 무슨 말을 하실 듯했지만, 말씀은 입 속을 빠져나오지 못했다. 작은아들을 기어이 보고 가시려고 곧 넘어 가려는 숨을 붙들고 계셨던 것 같다. 서너 시간 뒤인 시월 이십팔일 새벽 한 시 반에 다시는 돌아오시지 못할 잠 길에 드셨다. 기대고 섰던 벽이 갑자기 무너져버린 듯한 절망감이 집안을 휘덮었다.

아버지의 병증을 지켜본 가족들은 대통령 서거 뉴스를 들으신 이후 기력이 갑자기 뚝 떨어지신 것 같다고 했다. 아버지는 대통령을 참 좋아하셨다. 같은 고향 사람이라는 친근감도 있었지만, 그보다는 백성들을 잘 살게 하려고 애쓰는 대통령의 모습을 더욱 좋아하셨다. 대통령의 서거 소식이 세상에 알려진 뒤 아버지는 하루를 온전히 못 넘기시고 눈을 감으셨다.

그리고 삼십 년이 흘렀다. 그 후 나라는 눈부시게 발전했다. 사람들은 그 대통령 덕분이라고 했다. 그러나 대통령은 그 눈부신 발전을 볼 수가 없었다.

우리 가족에게도 참으로 많은 변화가 찾아왔다. 미처 출가시키지 못한 막내딸이 시집을 가서 지금은 장성한 외손을 두고 있고, 어렸던 손자손녀들이 성취하고 출가하여 그 자식들까지 거느리게 되었다. 두 사위가 타계하는 아픈 일도 있었지만, 두 아들이며 손자들은 저마다의 사회적인 역할들을 가지고 성실하게 살고 있다.

섬유회사를 경영하면서 칠순을 넘긴 맏아들은 가정과 회사를 잘 지키면서 이웃을 위한 일에도 힘을 쏟고 있다. 중등학교 교사로 사회생활을 출발한 작은아들은 몇 해 전부터 학교의 경영자로 봉직하면서 정년퇴임을 한 해 정도 앞두고 있다. 두 형제 집안에 하나씩뿐인 손자들은 모두 박사가 되어 제 할 일들을 열심히 해내고 있다. 세상을 움직일만한 권세나 명예, 부유는 얻지 못했다 할지라도 모두들 나름대로의 성취를 얻어 큰 탈 없이 살고 있다.

우리 형제와 자손이 이러한 형편을 얻기까지는 부모님의 가없는 희생과 사랑이 바탕이 되었음은 말할 나위 없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여유 있는 웃음을 지을 수 있는 삶을 별로 살아보신 적 없이 오로지 자식 위한 희생과 사랑만을 남겨 놓으시고 떠나셨다. 어리석은 풍수지탄일 터이지만, 오늘 우리의 형편을 보여드리고 자식 걱정을 조금이라도 덜어드리게 할 수 없음이 안타깝고 서러울 뿐이다.

아버지의 삼십 주기를 맞는 오늘, 여든을 바라보고 있는 맏딸은 몸이 불편하여 제사에 참례를 못했다. 자식이 벌써 거동을 마음대로 할 수 없을 정도의 노령이 되어있다. 아버지 돌아가신 후 한 세대가 바뀔 수 있는 세월이 흘러간 것이다. 이제 내가 불원간 직장을 물러나야 하는 것처럼, 새로운 세대에게 자리를 물려주고 떠나야할 시간들이 시나브로 다가오고 있음을 생각하니 아버지, 어머니가 사무치게 그립다.

"……추모의 정이 오늘 더욱 간절하여 저 하늘도 다함이 없나이다. 삼가 맑은 술과 갖은 음식으로 정성을 드리오니 두루 흠향하시옵소서."

떨리는 손길로 잔을 올리고 사신의 예를 드린다.

아버지, 어머니 이제야 말로 편히 쉬시옵소서. 아버지, 어머니께서 큰 음덕을 주시어 자식들이 나름의 몫을 다하며 살 수 있는 것처럼, 슬하 아이들에게도 그늘을 남길 수 있도록 남은 세월을 성심으로 살아가겠습니다.

모든 걱정 떨치시고 편히 쉬시옵소서.

평안히 쉬시옵소서.♣(2009.1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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