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산수필

은퇴가 아니라 졸업이다

이청산 2009. 10. 26. 15:22

은퇴가 아니라 졸업이다



'연금과 함께 하는 행복한 실버'라는 주제로 강의를 하는 연금관리실장 최 박사가 연수생들을 향해 '퇴직은 은퇴가 아니라 졸업'이라고 힘주어 말했다. 그리고 '졸업'이란 새로운 입학을 예비하는 것이 아니냐고도 했다.

버스를 탔다. 몇 지방의 정류장을 거치면서 고속도로도 달리고 국도도 내달았다. 차창 밖으로는 산이며 들, 도시며 촌락의 여러 가지 풍경들이 내 살아온 삶 속에 깃들여 있는 온갖 기억들처럼 파노라마로 지나갔다.

두 시간 반 남짓 달려 온천으로 유명한 수안보에 닿았다. 연금공단에서 운영하는 어느 호텔에 들었다. 그야말로 각계각층에서 온 백팔십 명의 사람들이 모였다. 생김새도, 생활방식도, 하고 있는 일도, 생각하는 것도 다 다른 사람들이다. 공통점이 있다면 근무하고 있는 직장에서 불원간 퇴임할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평생을 살아온 세상을 뒤로하고, 새로운 세상으로 나아가야 할 사람들을 위 한 연수가 시작되었다. 바깥세상의 일들을 미리 좀 엿보고 거기에 적응할 마음의 준비를 하기 위한 연수다. 이름하여 'New Life 미래설계교육'이라 했다.

웰빙원예, 주말농장, 웰빙건강, 실버재테크 등의 과정이 있는 중에 나는 '주말농장'반을 택했다. 퇴임 후에 다른 것은 못해도 텃밭은 조금 가꾸어야 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것은 내 소박한 꿈의 한 부분이기도 했다.

퇴직 후 맑고 한적한 시골 어느 곳에 조그만 집을 하나 지어 마당을 쪼아 텃밭을 일구고, 그 밭 가꾸기를 한 소일거리로 삼아 살아가리라는 생각을 오래 전부터 해왔다. 그래서 지난봄엔 내륙 어느 한촌에 좁다란 것이나마 집터를 구해 놓기도 했다.

연수 과정은 친환경 농업, 작물 재배 경험담, 텃밭 가꾸기, 특용작물 재배, 실버 농업 등의 농작물 재배에 관련된 과목과 함께 연금 운용, 건강 관리, 퇴직 생활 체험 사례 등의 생활과 관련된 내용, 그리고 친교의 시간, 우리소리 한마당 등의 놀이 프로그램으로 짜여 있었다.

강사들은 저마다 열성을 다해 강의를 했다. 강의 내용에는 새로운 세상을 살아가는데 아주 필요하겠다고 느껴지는 것도 있고 그렇지 않은 것도 있었지만, 어떤 것이든 참고가 될까 하여 모든 것을 열심히 들으려고 애썼다.

작물 가꾸기에 있어서 강사들의 공통적인 조언은, 재배하기가 까다로운 작목은 선택하지 말고 쉽게 가꿀 수 있는 것부터 시작하고, 나무 심기 등 장기적인 계획에 의해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은 시도하지 않는 것이 좋겠다고 했다. 힘에 겹게는 하지 말라고 했다.

늙어가면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건강관리라 했다. 무슨 작물을 어떻게 가꾸든 소득보다는 건강 유지에 중점을 두고 일을 하라고 했다. 일도 건강 생활을 위하여 하는 것으로 하고,  규칙적이고 절제 있는 생활로 건강을 도모해야 할 것이라고 했다.

강의를 들어나가다가 보니, 이게 어느 나라 이야기인가, 나와 관련이 있는 일들인가 하는 의문이 문득 들었다. 강의의 모든 내용이 노후 생활을 주제로 이야기하는 것이었다. 내가 노인이란 말인가? 아니면 곧 노인이 되어야 한단 말인가? 나에게는 무척 생소한 이야기들인 것 같았다. 아직은 해야 할 일을 해나가면서 힘이 부쳐 못하겠다는 생각을 해본 적 없고, 복잡한 시내버스를 타도 자리를 양보 받아 본 기억이 별로 없는 내가 아닌가?

그러나 다시 생각해 보면 '노인'이란 곧 '늙음'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닌 것 같다. 지금까지 내가 소년, 청년, 장년의 역정을 살아왔듯이 노인, 노년도 내가 살아가야 할, 살아갈 수밖에 없는 인생의 한 역정인 것만은 부정할 수 없을 것 같다.

지금도 시간은 흐르고 있다. 시간의 속성이란 모든 것을 변화, 노화시키는데 있는 것이고 보면, 그 속성을 따라 하던 일을 놓고 퇴임을 해야 하고, 다시 새로운 세상 속으로 나아가야 하는 일은 자연스러운 일일 수도 있다. 새 세상을 어떻게 갈무리해 나갈 것인가가 남은 과제일 뿐이다.

퇴직 생활 체험담을 들려준 어느 강사는, 자기는 3S로 십여 년째의 퇴직 생활을 건강하게 하고 있다고 했다. 즉 첫째는 Sports로 적당한 운동과 규칙적인 생활을 하는 것이요, 둘째는 Study로 꾸준한 자기 연찬을 하는 것이요, 셋째는 Service로 나눔의 생활, 봉사의 생활을 하는 것이라 했다. 지금도 이를 실천하기 위해 애를 쓰며 살고 있다고 했다.

그러한 생활의 덕분인지 그 강사께서는 여든에 가까운 나이에도 불구하고 신체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건강한 모습을 유지하고 있는 것 같다. 저 모습처럼 늙어갈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연수는 나흘 밤을 자면서 닷새에 걸쳐 진행되었다. 중간에 하루는 '현장 탐방'이라 하여 바깥나들이를 하였지만, 다른 날은 종일을 두고 실내에서 강의를 들었다. 하루는 비가 많이 왔는데, 강의실이 지하에 있어 비가 오는 것도 몰랐다. '우리소리 한마당' 시간에는 흥겨운 우리의 민요를 강사와 함께 목청 높여 부르며 흥겨워하기도 했다.

마지막 날, 서울사이버대학교 총장님의 '아름다운 노후 설계와 건강관리'라는 제목의 특강으로 모든 연수 일정이 끝났다. 총장님은 "인간은 자신의 죽음을 미리 생각할 수 있다는 점에서 동물보다 우월하다"는 파스칼의 말을 인용하면서 아름다운 죽음을 준비해야 할 것이라고 했다. 어떻게 하는 것이 아름다운 죽음을 준비하는 일이 될까.

연수 과정을 돌이켜 본다. 때로는 강의 시간이 지루하게 느껴지기도 했지만, 새로운 삶을 밝히는데 도움이 될 것이라는 기대를 놓치지 않았다. 내가 노년에 들고 있다는 새삼스런 자각에 약간의 허무감이 느껴지기도 했지만, 새롭게 맞이해야 할 또 다른 내 삶의 모습을 전망해 보고, 새 세상에 대한 '희망'과 '기대'에 한 발짝 다가설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을 것 같기도 했다.

'실버 농업'을 강의한 전직 농업기술센터 소장은 강의를 끝내며 '인생'이라는 가요를 함께 부르며 마치자고 했다.

"……돌아본 인생 부끄러워도 지울 수 없으니/ 나머지 인생 잘 해봐야지/ 나머지 인생 잘 해 봐야지"

'나머지 인생 잘 해보자'는 말에 눈시울을 뜨거워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랬다. 지금의 자리에서 물러나는 것은 결코 생애의 업에서 멀찌감치 물러나기만 하는 은퇴가 아니라, 한 과정의 수료요, 졸업일 뿐이다. 새로운 과정에 들기 위한 하나의 매듭일 뿐이다.

이제 얼마 남지 않은 소임에 성심을 다해야 할 일이다. 그리고 다음 과정을 희망과 의욕으로 맞이할 일이다. 건강하고 따뜻하게 살아갈 일이다.♣(2009.1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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