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산수필

가슴 뜨끔거림에 대하여

이청산 2009. 11. 26. 09:40

가슴 뜨끔거림에 대하여



"글쎄요, 까닭을 도무지 알 수 없군요……."

앙가슴 왼쪽 한 부분이 가끔씩 뜨끔거리는 증세를 두고 의사는 고개만 갸우뚱거린다. 벌써 수개월째 그런 증상이 계속되었다. 기침도 나고 가래가 목을 가렵게 했다. 감기인가 하여 약도 사먹고 주사도 맞았으나 효과가 없었다.

동네 병원에 가서 목이 가려우면서 기침이 나고 가슴이 뜨끔거리는 증세를 말했다. 우선 심전도검사를 해 보자고 했다. 심장에는 이상이 없었다. 식도 내시경 검사를 했다. '식도역류질환'이라는 병명이 나왔다. 위산이 식도를 타고 위로 올라와 그 게 기침도 나게 하고 가래도 끓게 한다는 것이었다. 약을 처방 받아서 먹기 시작했다. 그러나 가슴이 뜨끔거리는 증상은 개선되지 않았다.

의사는 시티 촬영을 권하며 큰 병원으로 가보라고 했다. 대학병원으로 갔다. 전 병원 의사의 진료소견서를 보여 주며 증상을 말했다. 촬영 날짜를 예약하여 가슴을 찍었다. 두어 주일 후에 결과를 보러 갔지만, 역시 폐나 심장에는 아무런 이상이 없다고 했다. 그런데도 가슴 한 부분은 여전히 뜨끔거렸다. 역류질환 치료약만 처방해 주었다. 아무 것도 아닌 걸 괜히 신경을 썼구먼, 괜찮겠지. 태연스레 생각하기를 애쓰며 처방 받은 약만 먹었다. 한 주, 두 주, 한 달, 두 달, 시간이 흘러갔다. 그러나 가슴의 증세는 없어지지 않았다.

주위에서 병원을 바꾸어 보라고 했다. 의사에 따라 진료 방법이 다를 수도 있지 않느냐는 것이다. 다른 대학병원의 소화기 내과를 찾아갔다. 입 안에 가끔 신물이 돌고, 가슴 한 부위가 간헐적으로 뜨끔거린다고 했더니, 흉부외과와 호흡기내과 진료를 권했다. 흉부외과로 갔다. 시티 촬영을 다시 해보자고 했다. 촬영 결과는 역시 별다른 이상이 없는 것으로 나왔다. 혹 가슴뼈에 이상이 있어 그런 증상이 있는지도 모르겠다면서 뼈 사진을 찍어 보라고 했다. 가슴을 비롯한 전신의 뼈를 단층으로 촬영한 결과는 역시 아무 이상이 없다고 했다. 호흡기 정밀검사도 받았다. 기구를 입에다 물고 호흡을 하고 입 바람을 불어넣고 하기를 수없이 되풀이하고 폐 사진도 찍었지만, 결과는 역시 허망(?)했다.

그렇게 촬영을 하고, 검사를 받고, 결과를 보고 하는 사이에 서너 달이 흘러갔다. 뜨끔거리는 빈도가 조금 잦아지는 듯할 때도 있어서 이제 나으려는가 생각하노라면, 또 뜨끔거렸다. 주치의 노릇을 한 소화기내과 의사는 역류성식도염 치료제만 계속 처방해 주면서, 가슴이 뜨끔거리는 것은 자기로서도 어떻게 판단할 수 없다며 난처해 할 뿐이었다.

가족들이 모일 기회가 있었다. 모두들 둘러앉아 이야기를 주고받다가 나의 뜨끔거리는 가슴이 화제에 올랐다. 형님이 말했다.

"한 기관을 맡아 운영하자면 그럴 때가 왜 없겠나? 나도 그럴 때가 가끔 있었지."

이게 무슨 말씀인가? 한 기관을 운영하다 보면 그럴 때도 있다고? 내가 한 학교의 운영을 책임지고 있음을 두고 하는 말씀인 것 같다.

형님도 그렇게 가슴이 뜨끔거릴 때가 있었다고? 나보다 열 살 맏이인 형님은 반평생 넘게 기업체를 경영해 왔다. 지금도 두 개의 기업을 거느리고 있다. 그간 온갖 고락도 많이 겪을 것이다.

"저는 별로 애 먹는 일도 없는데요."

"그렇지 않을 거야. 책임자 노릇을 하다 보면 알게 모르게 애가 쌓이게 되는 법이지."

책임감 때문에 쌓인 애가 가슴을 뜨끔거리게도 한다는 것이다. 수많은 난관에 봉착하기도 하고, 성취의 보람도 느끼면서 사업을 해오는 사이에 까닭 없이 가슴 뜨끔거릴 때가 더러 있었다고 한다. 그런 거라면 외과, 내과 의사가 그 까닭을 어찌 알 수 있으랴.

그렇다면 가슴이 뜨끔거리는 것은 몸의 병이 아니라 마음의 병이란 말인가. 생각이 몸의 병을 일게 한 것인가. 하기야 무슨 일에 대해 책임을 지고 있다고 모든 사람이 다 가슴이 뜨끔거려 하는 것은 아닐 터이다. 제 지닌 성격 탓일 것이다. 그러고 보니 우리 형제가 책임감은 남다른 것 같기도 하다. 만병이 자신에게서 비롯되는 것임을 새삼스레 깨닫는다.

문득 기억나는 것이 있다. 내가 운영을 맡고 있는 모임의 어느 날 회합에서 어떤 행사의 진행을 두고 회원들과 설왕설래하다가 돌아온 날 밤, 잠자리에 들어 자려는데 유난히 가슴이 뜨끔거렸다. 여느 때의 증세가 또 도지는 것이겠거니 싶었는데, 지금 생각해 보니 그 '설왕설래'와도 무관치 않은 것 같다. 회합이 원만하게 갈무리되지 못한 것 같은 아쉬운 느낌이 가슴에 무겁게 박혀 왔던 모양이다.

그 뜨끔거림이 성격에서 나오는 마음의 병이라면, 마음으로 다스릴 수밖에 없는 일이다. 약물로 치료하기는 쉬울지언정 마음으로 병을 다스리기가 어디 그리 쉬운 일인가. 마음을 다스릴 수 있는 능력이 있었더라면 애초에 그런 병이 찾아오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마음대로 할 수 없는 마음에 대해 잠시 절망감을 느끼다가 가만히 생각해 보니, 다행스럽게도 내가 하고 있는 일에서 물러나야 할 날이 별로 많이 남지 않았다. 그야말로 모든 책임을 벗은 자연인으로 돌아갈 수 있는 날이 멀지 않았다. 그러면 가슴 뜨끔거림에서도 자유로워질 수 있을 것이겠지. 희망으로 그 날이 기다려진다.

그러나, 마음이 가는 길을 누가 알 수 있으랴. 짐을 다 벗고 사는 그 때 가서는, 혹 지난날의 그 가슴 뜨끔거림이 살아있음의 한 증표였다고 느껴지지는 않을까. 모를 일이다.

어쨌든 뜨끔거리는 가슴에서 어서 해방되고 싶다. 편안한 가슴으로 살고 싶다.

아, 이를 어쩌나. 아내와 심하게 다툰 지난 밤, 가슴이 또 뜨끔거렸다.

아내와 다툴 일이 또 없지는 않을 터인데…….♣(2009.1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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