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산수필

아름다운 손길

이청산 2009. 11. 18. 15:35

아름다운 손길



여섯시 반, 오늘도 아침 걷기를 나선다. 벽마다 너절한 광고지들이 너풀거리는 골목길을 지나 학교 운동장으로 간다. 이 도시에서 그래도 맑은 공기를 마시며 아침 산책을 할 수 있는 곳은 학교 운동장이다. 학교로 가는 골목길 전신주 밑에는 밤새 내어다 놓은 쓰레기가 그득하다. 길 위에는 밤새 마구 뿌려놓은 전단지며 아무렇게나 버린 휴지, 포장지 조각들이 널브러져 있다.

빨간 마티즈의 그 여인이 거기 있다. 차의 뒷자리를 아예 들어내고 널따랗게 만든 트렁크에는 여러 가지 청소도구와 커다란 비닐 봉투가 실려 있다. 자그마한 체구의 그 여인은 머리에는 수건을, 품에는 앞치마를 두르고 길 위에 버려져 있는 쓰레기를 줍거나 쓸어 담는다. 아이들이 볼까 두려운 낯뜨거운 광고지며 휴지들은 줍고, 어지럽게 버려진 음식물 찌꺼기며 흉한 폐기물들은 쓸어 담는다.

수습한 쓰레기들을 쓰레기자루 더미로 가져간다. 자루에 빈틈이 있으면 더 채워 다시 묶어놓고, 모든 자루들을 가지런히 정리해 놓는다. 남은 쓰레기는 자기 차의 트렁크에 싣는다. 마티즈 여인의 할 일은 여기까지다. 쓰레기 수거 차량이 오기 전까지 모든 일을 마쳐야 하는 일이다. 차는 쓰레기 자루만 싣고 가면 된다.

마티즈 여인도 쓰레기차 인부들과 마찬가지로 청소 용역회사의 직원이다. 제 할 일을 하고있을 뿐이지만, 그녀의 손길에는 자기 집 마당이며 안방을 쓸고 닦는 듯한 정성이 묻어나고 있다. 그 손길이 참 고와 보인다. 이른 아침 골목길을 걷다가 마주하는 그녀의 손길은 잠에서 채 덜 깬 내 눈을 상쾌하게 뜨이게 한다. 그 여인을 만난 날은 한결 가벼워진 걸음으로 아침을 걷는다.

출근길을 나선다. 앞집 어린이집에 어린아이들이 모여든다. 집집마다 찾아가 태워온 아이들을 반갑게 맞이하는 원장님, 아이들의 배꼽 인사에 함박 웃음을 지으며 한 아이도 놓치지 않고 '참 예쁘다'며 모두들 다정스레 쓰다듬거나 얼싸 안는다.

"이제 출근하십니까? 좋은 하루 되세요."

출근하는 이웃에게도 인사를 빠뜨리지 않는다.

"예, 좋은 하루 되십시오."

원장님 부부는 언제 누구를 보아도 반갑다, 안녕하시냐, 이제 오시냐, 어딜 가시냐며 안부 묻기를 마다하지 않는다. 집 앞 골목길엔 원장님 부부가 있어 언제나 미소가 꽃핀다. 여름날의 능소화처럼 화사하게 피어난다. 천사의 손길이 저러할까, 아이들을 쓰다듬는 원장님의 손길이 참 정겨워 보인다.

등교하는 아이들과 함께 교문을 들어선다.

"안녕하십니까?" "그래, 안녕! 좋은 아침."

날마다 듣고 해도 즐거운 말들이다. 아이들은 총총 교실로 든다. 아침 맑은 햇살이 아이들의 등을 감싼다.

"드르르 드르르르"

출근하여 창문을 열자 들려 오는 기계 소리. 이 선생이 화단의 풀을 깎는 소리다. 이 선생은 학교의 기능직 사무원이다.

"아침 일찍부터 수고하시네요."

"예, 수업 시작 전에 마쳐야지요."

소음으로 수업을 방해하지 않겠다는 말이다. 이 선생에게는 시킬 일이 별로 없다. 시키기 전에 할 일을 찾아 다 해버리기 때문이다. 그에게는 자잘한 할 일이 참 많다. 학교 구석구석을 둘러보고 있어야 것이 제 자리에 있는지, 어디 못이라도 하나 빠져 있지 않은지, 늘 살피고 챙겨야 한다. 이 선생은 할 일을 놓치는 법이 없다. 학교에 필요한 일들을 훤하게 꿰뚫고 있다. 이 선생은 잠시도 그냥 놀고 있을 때가 없다.

이 선생은 학교에서만 부지런한 게 아니다. 집에서도 잠시를 쉬지 않고, 틈틈이 텃밭도 가꾼다. 가끔씩 손수 기른 것이라며 푸성귀를 가져와 동료들에게 나누어주기도 한다. 이 선생은 꽃도 잘 가꾼다. 가을에는 여러 종류, 여러 빛깔의 국화를 잘 가꾸어 학교 안 곳곳에 두고 아이들이며 선생님들이 보고 즐기게 한다. 일하는 이 선생에게 '수고한다'고 말하면 '뭘요.'하면서 씩 웃는 모습이 어디선가 본 마애불상의 미소와도 흡사하다. 제 할 일에 성실을 다하는 모습이 참 아름답다.

신문 펼치기가 겁이 난다. 답답하고 섬뜩한 일들 투성이다. 경제와 정치가 답답하고, 사회면의 소름끼치는 기사들이 섬뜩하다. 북한에서 댐의 물을 예고도 없이 방류하여 갑자기 불어난 물이 남쪽 사람들의 목숨을 무참히 앗아가기도 했다. 전에 없던 신종플루가 창궐하여 모든 일들을 움츠려 들게 했다. 참 우울하고도 무서운 소식들이다.

그래도 세상은 살 만하다. 그 답답하고 섬뜩한 일들이 뉴스가 되는 것은 세상에 흔치 않는 일들이기 때문이다. 세상에는 신문에 나지 않는 수많은 사람들의 향기롭고 아름다운 손길이 있다. 따뜻한 마음들이 있다. 어질러진 아침을 말끔하게 쓸어내는 아름다운 손길이며, 정다운 인사로 골목길을 환하게 밝히는 따뜻한 손길이며, 제 할 일을 열심히 하는 성실한 손길이 있는 한 세상은 살만하지 않은가.

그 손길과 마음들이 있기에 세상의 아침은 밝다. 출근길의 걸음은 가볍다. 살만한 세상 속으로 걷는 걸음이 상쾌하다. ♣(200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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