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산수필

승윤이의 눈물

이청산 2009. 10. 21. 16:27

승윤이의 눈물



주말을 맞아 할아비 생일을 기념한다고, 승윤이가 제 아비, 어미와 함께 왔다. 절을 하는 아비, 어미 사이에서 저도 손을 모아 넙죽 엎드리는 품이 제법이다.

팔을 벌리니 덥석 안기며 할아버지가 많이 보고 싶었다고 한다. 세 돌을 겨우 지난 것이 못하는 말이 없다. 그래, 나도 승윤이가 많이 보고 싶었어. 그 동안 밥 잘 먹고 잘 놀았냐? 하니 고개를 끄덕이며, 네! 하고 대답한다.

승윤이는 할아비와 놀기를 좋아한다. 나와 함께 있으면 다른 사람은 찾지 않는다. 할미가 은근히 샘이 나서, 이리 와 봐! 하고 불러도 돌아보지 않는다. 핏줄은 못 속이나 봐. 누구는 핏줄이 아닌가? 하하. 그래서 하는 말인지 승윤이는 유독 나를 많이 닮았다고 한다.

케이크가 놓인 두레상 앞에 둘러앉았다. 케이크에 촛불을 켰다. 시키지도 않았는데 손뼉을 치며 생일 축하 노래를 부르기 시작한다.

"생일 축하합니다. 생일 축하합니다. 사랑하는 할아버지 생일 축하합니다."

노래도 곧잘 한다. 함께 불을 끄고 케이크를 잘랐다. 내 생일을 기리는 밤이 승윤이의 재롱과 함께 즐겁게 깊어 갔다.

밤을 함께 잔 다음 날의 아침 하늘이 유난히 푸르렀다. 구름 한 점 보이지 않았다. 한나절이 지나면서 하늘은 더욱 푸르러갔다. 늘 아파트며 빌딩, 번잡한 거리의 차들만을 보고 지내는 승윤이를 위해 무엇을 해 줄까. 시나브로 황금빛으로 물들어 가고 있을 들판으로 나가 보기로 했다. 다섯 식구가 함께 가까운 들판으로 나아갔다. 잠시 달려 벼들이 고개를 숙여 가는 들판에 닿았다.

차를 세우고 논둑길을 걸었다.

"할아버지, 이게 뭐예요?" 통통하게 알이 밴 벼들을 보며 묻는다.

"이건 벼라고 하는 거야."

"벼?"

"이 껍질을 벗기면 쌀이 나와, 밥 해먹는 쌀 알지?"

그 때 메뚜기 한 마리가 포르르 날아 벼 잎사귀에 앉는다. 얼른 잡아 승윤이에 보여 주니 '무섭다'며 손을 움츠린다. 가까이 갖다 대니 뒷걸음질치며 피한다.

"싫어, 싫어!"

생전 처음 대하는 것일 터이다. 몇 마리 잡아 병에 넣고 보여 주니, 병을 이리저리 돌리며 신기하다는 듯이 들여다본다. 벼이삭 사이를 날아다니는 메뚜기를 가리키며, 저기 날아간다고 가리키기도 한다. 다시 한 마리를 잡아 다리를 잡아 쥐어주니 겨우 만져본다. 논두렁을 다니며 벼이삭을 만져 보기도 하고, 메뚜기를 보고 손뼉을 치기도 한다.

해가 기우는 것을 보고, 집에 가자고 하니 더 놀고 싶다고 한다. 이제는 벼이삭이 출렁이는 들판이며 메뚜기와 제법 친해진 듯하다. 돌아오는 차 안에서도 병 안에 든 메뚜기를 이리저리 들여다본다. 아무리 보아도 신기한 모양이다. 손뼉치고 노래도 부르며 재롱을 한껏 쏟아놓는다. 차는 승윤이의 노래를 따라 경쾌하게 달려나간다.

이제 저의 집이 있는 서울로 돌아갈 시간이다. 아내는 아이들을 위해 이것저것 챙겨주기에 바쁘다. 보따리를 차에 다 실을 때까지 승윤이는 잠시 뒤에 일어날 일을 알지도 못한 채, 마냥 즐거운 듯 노래도 하고 율동도 하며 잘도 논다.

승윤이를 안고 밖으로 나왔다. 저의 아비, 어미가 타는 차에 함께 태웠다.

"할아버지는 안 타요?"

"잘 가거라. 다음에 또 와!" 손을 흔들었다.

"엉아-!"

갑자기 울음보가 터진다. 차창 밖으로 뛰쳐나올 듯 손을 저으며 넘어갈 듯 울어댄다. 마치 감격의 해후를 끝내고 또 갈라져야 하는 이산 가족들이 다시 서럽고 쓰라린 작별을 하는 것 같다. 할아비, 할미에게 몇 번을 다녀갔지만, 헤어지기가 아쉬워 울음보를 터뜨린 것은 처음이다. 하루 날, 밤을 함께 지내는 사이에 따는 깊은 정이 든 모양이다. 이제 저도 사람과 사람 사이의 정을 알고 느낄 수 있나 보다. 그 아름다운 마음을 지닐 수 있을 만큼 자랐나 보다. 어미, 아비와의 정은 본능적으로 타고나는 것이라 해도, 할아비, 할미하고야 오랫동안 보지 않거나 간혹 보는 것으로는 정이 그리 깊지 않을 수도 있다. 함께 한 시간이야 길든 짧든 그 사이에 저는 헤어지는 것이 정녕 서러울 만큼 깊은 정을 들였나 보다. 기특하고 귀엽고  안쓰럽다. 저의 사랑을 내가 오히려 따라가지 못한 것만 같아 마음에 아프게 걸린다. 그 정, 그 마음을 언제까지라도 깊이 간직하고 살아가자꾸나. 승윤아-.

차는 승윤이의 울음을 실은 채 무정하게 떠나갔다. 그 아름다운 마음도 함께 싣고 떠나갔다. 아니, 그 마음을 고스란히 남겨두고 갔다. 할아비, 할미 가슴속에 예쁘게 두고 갔다. 그 마음 보듬으며 돌아서는 순간 할아비 눈자위에도 슬며시 물기가 젖어왔다.

"승윤아, 그 마음 잘 간직하고 있을게. 다음에 다시 만나 우리 또 즐겁게 놀자! 승윤이 사랑해!"

할아버지 사랑해요! 하는 말이 귓바퀴에서 쟁쟁히 솟아났다.♣
                                                                        (2009.1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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