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산수필

영양은 다 그래

이청산 2009. 9. 14. 16:30

영양은 다 그래



검마산 개울가에

학교 다 마치고 초등 교사된

막내딸 1학년 적 담임선생님

전라도서 오신단 말 어제 듣고

열 일 접어두고 마음까지 다 내 주고

또 부족해 하시던 본신마을 토박이 할배

 

영양 인정은 다 그래

                       -김경종 : '영양은 다 그래'(영양문학 24집)

 

김경종 시인은 영양문협 회장을 역임한 영양 토박이다. 여자중학교 미술교사이면서 시인이다. 영양은 내가 삼십여 년 전 초임의 고등학교 교사로 부임하여 여섯 해를 살았던 곳이다. 그 때 김 시인은 내가 담임했던 반의 학생이었다. 가끔씩 옷자락에 물감을 묻히고 다니기도 하며 그림 그리기를 좋아하고, 항상 너그러운 표정으로 빙긋이 웃기를 잘 했었다. 세월이 흘러 김경종 시인은 학교를 졸업하고 나는 영양을 떠나왔다.

다시 세월이 흘러갔다. 내가 김 시인의 얼굴을 볼 수 있었던 것은 텔레비전에서였다. 몇 년 전 어느 날 무슨 프로그램에서, 시인으로서 영양문협 회장이 된 김 시인이 영양을 찾아온 타방의 문학인들을 안내하고 있었다. 미대를 나와 화가가 되어 여학교의 미술교사로 근무하고 있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시인이 되어 있는 줄은 몰랐다. 놀랍고도 반가웠다.

문학의 고장 영양을 사는 예술가가 시인이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일 듯도 했다. 영양에 이름난 시인, 문학가들이 어디 한둘이던가. 예술적인 상상력이며 감수성이야 시인들 그림인들 어찌 서로 통하지 않으랴. 향토의 문학적인 분위기 속을 살고 있던 김경종 화가는 시로서도 천부의 예술적 재능을 드러내게 되면서 어느 날 그의 화실에 '영양문인협회'의 간판이 걸리기까지에 이르게 된다.

뒷줄 왼쪽으로부터 김경종 시인, 이원기 회장선주문학회에서 문학기행에 나서기로 했다. 기행의 여정을 영양으로 잡는데 주저하지 않았다. 영양이야말로 문학 여행의 적지이기 때문이다. 김경종 시인이 생각났다. 전화가 통했다. 실로 오랜만에 들어보는 서로의 목소리가 물기 어린 감격과 감회에 떨었다. 모월 모일에 바쁜 일 없겠느냐고 했더니, "아무리 바빠도 선생님은 제가 모셔야지요." 어서 오라고 했다. '열 일 접어두고' 우리 문학회의 기행을 안내하겠다고 했다.

두 시간 여를 달려 영양 석보 두들마을에 닿았다. 소설가 이문열이 태어난 곳으로 이름난 마을이다. 김 시인이 영양문협 이원기 회장과 함께 기다리고 있었다. 해후의 악수를 감격으로 나누는데, 오호진 선생이 달려왔다. 여중 영어교사로 역시 그 옛날의 제자다. 오 선생은 신문, 잡지에 난 나의 글을 읽고 가끔씩 전화를 하곤 했었다. 지난날 저의 선생을 잊지 않는 마음을 고맙게 생각하고 있던 터였다. 영양의 문학적 향기를 맡기 전에 인정과 사랑의 향기에 먼저 젖어 들었다. 학업에 성실한 고등학생이었던 그들도 지금은 지천명의 연륜을 안고 있었다. 김 시인이 그린 시화

마음만 가져와도 고마운 일인데 선물도 듬뿍 들고 왔다. 이원기 회장은 문협 회지 '영양문학'을 들고 오고, 김 시인은 영양을 자랑할 여러 가지 기념품과 함께 조지훈 육필 원고 영인지에 손수 그림을 그려 넣은 시화를 우리 일행 수만큼 만들어서 가져왔다. 이십여 장에 서명까지 넣어 하나하나 그리기가 쉬운 일이었을까. 회원들의 박수로써 정성을 고마워 할 따름이었지만, 참으로 감동적인 선물이 아닐 수 없었다.

영양의 문학과 문화의 향기를 찾아가는 우리의 여정은 소설가 이문열, 항일시인 이병각과 이병철의 문학이며, 이문열 소설 '선택'의 주인공 정부인 장씨의 행적을 더듬었던 석보 두들마을에 이어 입암 연당리의 서석지, 오일도 시공원에서영양 감천의 오일도 시인 생가와 시공원, 일월 주실마을의 조지훈문학관이며 지훈시공원과 생가로 이어졌다. 서석지는 예정에 없던 곳이었다. 김 시인이 영양의 명소와 특산물을 소개하면서 조선조 광해군 때 정영방이라는 은둔지사가 축조한 서석지가 매우 아름다운 곳이라고 설명하자 호기심을 못 이긴 회원들의 강력한 요청으로 기행의 발길을 더하게 되었다. 김 시인의 설명대로 전남 담양의 소쇄원, 보길도 부용원과 더불어 한국의 삼대 정원으로 꼽히는 서석지는 자연석을 이용해 축조한 연못과 아담한 정자가 어울려 미려하고도 그윽한 운치를 자아내고 있었다.

김 시인은 안내에 이력이 난 것 같았다. 영양 출신 문필가들의 문학적 이력이며 문학사적인 의의까지 훤하게 꿰뚫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지역의 이름난 곳이며 그 곳에 읽힌 설화, 고추를 비롯한 특산물들에 이르기까지 소상하게 소개했다. 영양을 찾아온 수많은 사람들을 안내했던 경험이 조지훈의 승무 시비설득력을 더욱 깊게 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경험만 가지고 될 수 있는 일은 아니리라. 문학에 대한 열정과 고향에 대한 애정이 없이는 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일행은 전문 여행 안내자 못지 않은 능숙한 안내에 경탄했다. 모두들 오늘 문학 기행을 더욱 감명 깊게 한 안내라며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김 시인은 이원기 회장, 오호진 선생과 더불어 석보에서 입암, 영양을 거쳐 일월에 이르기까지 줄곧 우리 일행과 걸음을 함께 하며, 안동의 육사문학관을 향해 떠날 때까지 한 가지라도 더 우리에게 보여주고 들려주기를 애썼다. 그러면서도 우리에게 좀더 베풀어주지 못한 것을 안타까워했다. 언제 다시 한번 만나자면서 손을 잡고 흔들며 아쉬운 마음으로 헤어졌지만, 김 시인의 안내는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안동의 육사문학관 사무국장 이위발 시인과도 친숙한 김 시인은 그에게 우리의 여정을 알려 해 다 저문 늦은 시간까지 우리 일행을 기다려 반갑게 맞이하도록 해 주었다. 조영일 관장까지 나와 육사의 문학과 생애를 소상하게 안내해 주었다.

왼쪽 셋째부터 이원기 회장, 김경종 시인, 필자, 오호진 선생조지훈문학관 앞에서 헤어질 때, 지난날의 선생을 그냥 보낼 수 없다고 생각했던지 김 시인과 오 선생은 나의 손에 작은 정성이라며 선물 하나씩을 쥐어주었다. 내가 줄 수 있는 것은 마음뿐이었다. 이 사람들아, 정말 고맙네-. 이원기 회장과도 굳게 잡은 손으로 석별의 정을 나누었다. 영양의 문학적 향기에서 느꼈던 감동과 함께 또 하나의 감동이 가슴 한 복판으로 들어앉았다. 그 사람들이 바로 '마음까지 다 내주고 또 부족해 하시던 본신마을 토박이 할배' 같은 영양 사람들이었다.

가슴 깊은 곳으로부터 메아리 하나가 울려 나왔다.

영양 인정은 다 그래-.♣(2009.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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