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산수필

제 살 자리

이청산 2009. 8. 3. 13:24

제 살 자리



 안시리움이 없어졌다. 엊그제까지만 해도 현관문 밖 뜰의 볕이 잘 드는 곳에 밝고 맑은 모습으로 놓여 있었다. 며칠 출장을 다녀와 보니 감쪽같이 사라져버렸다. 행방을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 본래의 기운을 회복해 가며 아름답고 화사한 자태를 보여주던 품이 참 생광스럽게 느껴지던 것이었다.

지난해 가을, 이곳으로 임지를 옮겨왔을 때 많은 사람들이 영전을 축하한다며, 전보며 편지 그리고 화분 들을 보내 주었다. 화분은 난초가 대부분이었지만, 그 중에 안시리움과 인삼펜더를 보내준 분도 있었다.

며칠이 지난 뒤 축하 리본을 모두 벗겨 내고, 난초 화분 몇 개와 함께 안시리움과 인삼팬더를 사무실의 탁자 위에 정갈하게 얹어놓았다. 나도 보고 즐기려니와 내방객에게도 즐거움을 줄 수 있을 것 같아서였다. 가끔씩 물을 주며 그 모습들을 완상하는데, 안시리움과 인삼펜더의 아리땁고 익살스런 모습이 보는 이로 하여금 미소를 짓게 한다.

인삼팬더는 사람의 하체를 닮은 작달막하고 통통한 두 갈래의 뿌리가 서로 꼬듯이 어우러져 있고 그 위에 가는 가지들이 동백꽃잎 모양의 잎새들을 모일조밀 달고 있는 모습이 여간 귀엽지 않다. 뿌리는 인삼 모양을 닮고 잎은 팬더고무나무를 닮아 인삼팬더라 한다지만, 팬더고무나무는 본 적이 없어 모르겠고, 내가 보기에는 동백나무 작은 잎과 흡사하다.

안시리움은 가느다란 잎자루 위에 손바닥만한 푸른 잎이 고개를 조금 숙인 채 달려 있고,  꽃인 듯 잎인 듯한 작고 빨간 꽃턱잎 위에 노란색 크레파스처럼 생긴 꽃 기둥을 피어 올리고 있다. 잎을 보면 싱그러운 처녀의 모습 같다가도, 꽃을 보면 열 칠팔 세의 홍조 띤 소녀 모습 같기도 했다.

난초는 이따금 물을 주었지만, 안시리움이나 인삼팬더에 덮여 있는 이끼가 마를까 보아서도 매일 조금씩 물을 주었다. 파란 이끼에 발목을 잠그고 서 있는 두 식물은 예쁘고도 귀여운 모습을 잘 유지해가고 있는 듯했다. 날이 가고 달이 가고 계절이 바뀌어 갔다.

두 식물에 변화가 보이기 시작했다. 무엇 때문인지 안시리움은 넓적한 이파리 가장자리가 테를 두르듯 노랗게 말라 들어가고 가운데에는 까뭇한 반점이 일기도 했다. 인삼팬더는 가을날 낙엽 지듯 잎이 한 잎 두 잎 떨어져 앉았다. 일시적인 현상이겠거니 하고 두고 보다가 햇볕을 쏘이지 못해 그런가 싶어 창이 가까운 곳으로 옮겼다. 그러나 별로 좋아지지 않았다. 이 두 식물이 원래 열대나 아열대 기후 지역에서 생장하는 것임을 한참 뒤에야 알았다. 사무실의 답답한 공기가 저들의 체질에 잘 맞지가 않았던 모양이다. 그런 현상들이 바로 저들의 괴로운 처지를 호소하고 절규하는 몸짓이었던 것 같다.

문 밖의 뜰로 들어내었다. 시원한 바람과 함께 여름의 따끈한 햇볕을 마음껏 받으면 나으리라는 기대에서였다. 볕이 내려 쬐면 볕을 맞고, 바람이 불면 바람을 쐬고 비가 내리면 비를 맞았다. 두 식물에 다시 변화가 나타났다. 생기를 찾아가는 것이었다. 말라가던 부분이 푸른빛을 찾아가고 떨어진 잎 자리에 다시 새 잎이 돋아나기 시작했다. 신기한 변화였다. 아니 저들에겐 당연한 변화였다. 안시리움이 더욱 활기를 찾아갔다. 잎사귀에도 윤기가 흐르고 고사해 가던 빨간 꽃턱잎이 새롭게 돋아나면서 노란 꽃이 뾰족이 올라왔다. 사무실은 제 살 자리가 아니고, 지금 놓인 그 자리가 그래도 살만 한 자리인 것 같다. 역시 동물이든, 식물이든 제 살 자리에 살아야 제 노릇을 다할 수 있는 모양이다.

사람인들 다르랴. 제 생각과 처지에 맞는 자리를 잡아 살아갈 수 있을 때 제대로 살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삶의 보람도 느끼며 살 수 있지 않은가. 주어진 환경에 잘 적응하는 것도 중요한 일이지만, 적절한 환경을 잘 찾아 앉는 것도 못지 않게 긴요한 일이다. 운명을 개척하고 역경을 이겨내는 의지도 있어야 하지만, 처해야 하고 처하지 말아야 할 자리를 잘 가리는 지혜도 없어서는 안 된다. 물고기가 산에 올라서는 살 수 없고, 산 짐승이 물에 들어서는 살 수 없는 이치와 다를 바 없다. 군자가 있어야 할 자리에 소인이 처하기 어렵고, 소인의 자리에 군자가 처해서는 안 되는 것과도 같은 이치다. 제 살 자리를 잘 가려 앉을 줄 아는 사람이라야 삶도 인격도 빛을 발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탐스러운 모습을 보여주던 안시리움이 어느 날 갑자기 보이지 않는다. 현관문 밖의 뜰은 누구나 드나들 수 있다. 드나들던 사람 중의 누가 욕심이 발동하여 가져 간 것임에 틀림없다. 사라진 안시리움이 안쓰럽고도 아쉽다. 아름다운 것을 보고서도 탐욕을 내는 인간의 마음이 야멸스럽고 원망스러우면서도, 한 편으로는 탐이 날 만큼 좋아하여 가져 간 것이라면 오히려 다행스러운 일이 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사랑스런 마음에 잘 돌보아 줄 것 같기 때문이다. 그렇게 사랑을 받노라면, 흑심이 만든 자리일지언정 저의 살만한 자리가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사랑하는 이를 만나 잘 살 수 있기를 기대하면서 안도의 숨을 가누어 본다.

제 살 자리를 잘 찾는 일이란 곧 운명을 결정짓는 일이기도 하고, 그것을 개척하는 일이기도 하다. 지금 나에게는 한 생애를 살아온 삶의 자리를 마감하고 새로운 삶의 자리를 마련해야 할 시점이 다가오고 있다. 기대와 불안이 얽히고 설킨다. 겪어보지 못했던 다른 세상은 어떨까.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

누가 날 좀 데려가 주었으면 좋겠다. 사라진 안시리움처럼 누가 나를 사랑하여 새로운 세상으로 가져가 주었으면 좋겠다.♣(2009.7.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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