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산수필

쑥떡 마음

이청산 2009. 5. 22. 15:54

쑥떡 마음



"아냐, 그건 써서 못 먹어. 이런 걸 뜯어야 돼!"

쑥쑥 자라 있는 쑥대의 연한 잎을 가려 따는데 며느리와 내가 따 담는 것을 보고 아내가 소리를 지른다. 아내는 겅중겅중 따는 것 같아도 먹을 쑥, 못 먹을 쑥을 가려 잘도 딴다.

서울 사는 아들 가족들이 연휴를 맞아 모처럼 집을 찾아 왔다. 손녀의 재롱을 보며 휴일 오전을 즐기다가 오후에는 모두 함께 금오산으로 놀러 가자고 했다. 아내는 놀러 가기보다 함께 쑥을 뜯으러 가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했다. 뜬금없이 웬 쑥이냐 했더니 쑥떡을 좀 빚어야겠다고 했다. 지금 쑥이 한창 좋을 철이고, 쑥떡은 맛도 좋고 몸에도 좋은 것이 아니냐며 아이들이 왔을 때 같이 해 먹자고 했다. 그리고 '쟤가 좋아한다.'며 며느리를 가리켰다. 며느리가 빙긋이 웃었다. 떡을 좋아해 '떡순이'라 부르기도 하는 며느리는 졸깃하면서도 상큼한 맛이 도는 쑥떡을 유별히 좋아한다고 했다. 같이 먹기도 하고 돌아갈 때 좀 싸 가지고 가도록 하라고 했다.

아내는 꼭 쑥을 뜯으러 가야한다고 했다. 아내의 강권을 이기지 못해 금오산으로 가려던 길을 돌려 시가지를 지나 근교를 향하여 달렸다. 하늘은 청명하고 산야에는 신록이 싱그러운 빛을 내고 있었다. 들판이 보이는 길가에 차를 세우고 쑥을 찾아갔다.

쑥은 길섶이며 밭둑 곳곳에 자욱하게 자라 있었다. 바람이 살짝 불자 은은하고 풋풋한 풀 향기가 둔덕을 감돌았다. 앞장 선 아내를 따라 모두들 쑥을 뜯기 시작했다. 부드럽고 연한 잎을 골라 자루에 따 담았다. 한 잎 한 잎 뜯을 때마다 상큼한 향기가 손가락에 묻어 나왔다. 네 살배기 손녀는 들판에 나온 것만으로도 신이 났다. 제 눈에 비친 온갖 풀잎들이 신기하기만 한 듯 밭둑을 이리저리 뛰어다니기도 하고, 제 어미와 함께 쑥잎을 뜯기도 했다. 며느리는 평소에 쑥이며 나물을 자주 뜯어보지 않은 탓인지 뜯는 손길이 조심스러웠지만, 아내의 자루는 이내 불룩해 왔다. 두어 시간 함께 뜯으니 들고 있는 자루들이 모두 다 찼다.

집으로 돌아와 뜯어온 쑥을 한 데 모아 티와 잡초를 가려내고 다듬었다. 다듬은 쑥을 끓는 물에 넣어 몇 솥을 데쳐냈다. 쑥 익는 냄새가 거실로 번져났다. 며느리는 냄새가 참 좋다고 했다. 솥에서 건져낸 쑥을 꼭 짜서 소반에 재어 두었다. 그리고 쌀 몇 됫박을 물에 담갔다. 이튿날 아침 일찍 아내는 방앗간으로 가져갔다. 몇 시간 뒤에 아내가 가져간 쑥과 쌀은 떡이 되어 돌아왔다.

가족이 둘러앉아 쑥떡을 먹는다. 그냥 먹기도 하고, 콩가루에 무쳐 먹기도 한다. 아들과 며느리가 맛있게 먹는다. 손녀도 제 어미가 떼어 주는 것을 신기한 듯 받아먹는다.

"쑥에는 비타민이 풍부해서 몸에도 좋다더라. 피부 미용에도 좋대."

아내는 아이들이 잘 먹는 것이 즐거운 듯 한껏 권한다.

"고마워요, 어머니." 며느리가 웃으며 아내에게 머리를 조아린다.

"어제 쑥 뜯으러 가길 잘 했제? 놀러만 갔어 봐라, 이런 떡 어찌 먹어 보겠노. 집에 갈 때 싸 가지고 가서 사돈댁에도 좀 갖다 드리고 늬들도 두고 먹어라."

아이들에 대한 아내의 사랑이 자별하게 묻어났다. 난들 아이들 사랑하는 마음이 없을까만, 아내와 나의 아이들 사랑법이 같지만은 않은 것 같다.

모처럼 아이들이 집에 왔을 때 온 가족이 손을 잡고 경치 좋고 놀기 좋은 곳으로 가서 함께 놀다가 외식 한 끼 맛있게 먹고 오면 즐거운 일이 될 것이라 생각했었다. 아이들이 가보지 못했을 금오산 공원이 제격이다 싶어 함께 가자고 했다. 아이들도 좋아했다.

아내의 생각은 달랐다. 어디 가서 놀다가오는 것은 한 때의 즐거움일 뿐, 별 실속은 없는 일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굳이 쑥을 뜯으러 가자 한 것이며, 수고를 마다 않고 쑥떡을 빚는 것이며, 맛있게 먹는 아이들을 보며 즐거워하는 것들이 모두 아이들에 대한 아내 식의 사랑 표현이다.

아내는 늘 그런 생각으로만 살아온 것 같다. 나는 집 안도 좀 깔끔하게 꾸며 놓고 '문화적'으로 살고 싶은데, 아내는 '실용적'이 아닌 일에는 별로 관심을 두지 않는다. 아내의 그런 생각들이 때로는 내 생각과 조금씩 부딪칠 때도 있지만, 그럴 때마다 살림을 온전하게 꾸려 나가는 힘이라 생각하며 내가 한 발씩 물러서곤 했다.

아내가 해 준 떡을 아이들이 맛있게 먹으며 좋아하는 것을 보니, 역시 아내의 그 마음이 식구들을 따뜻하게 지켜 주고 있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아내의 그 마음-. '쑥떡 마음'이라 할까.♣(2009.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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