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산수필

제주 올레

이청산 2009. 4. 20. 13:59

제주 올레



 올레는 골목길이다. 마당에서 마을 앞 넓은 길로 통하는 조붓한 마을길이다. 집을 가릴 듯 말 듯 나지막한 검은 돌담이 구불구불 서 있는 정겨운 올레가 여행자의 길이 되었다. 근래에 들어 제주를 거니는 트레킹 코스로 개발되면서 골목길은 물론 해안의 자갈길도, 마소가 노니는 목장 길도 올레가 되어 여행자들이 즐겨 걸을 수 있는 길이 되었다. 지금 제주에는 모두 열두 코스의 올레가 개발되어 있다고 한다.

올레는 목적지를 정해 놓고, 할 일을 두고 걷는 길이 아니다. 그냥 걷는 길이다. 오름이 있으면 올라 보고, 바다가 있으면 바다를 보고, 새 소리도 듣고 꽃도 보면서 그저 걷는 길이다. '간세다리의 놀멍 쉬멍 걸으멍(게으른 사람이 놀며 쉬며 걷는)' 길이 올레다. 걷다가 지치면 그만 두어도 되고, 해찰도 부리고 딴청도 피우면서 '꼬닥꼬닥(타박타박)' 걸을 수 있는 길이다. 올레는 자유와 여유의 길이고, 정화와 상상력의 길이다.

성산일출봉을 내려와 십여 분을 달려 한 올레에 닿았다. 해변으로 이어진 길이다. 아침에 뿌옇게 끼었던 해무도 말끔히 걷힌 청명한 봄날 정오 무렵이었다. 하늘도 바다도 눈부시게 파랬다. 해안 언덕에 얼기설기 돌담이 서 있고, 담 너머로 널따란 평원이 보였다. 목장이었다. 갑자기 표지판 하나가 앞을 가로막았다.

"이곳은 소와 말을 방목하는 개인 소유 목장입니다. 가축의 생육에 지장을 주지 않도록 반드시 해안에 인접하여 걸으셔야 합니다. -제주올레"

허리를 구부려야 통과할 수 있는 좁고 낮은 문을 만들어 놓았다. 그래도 걸을 수 있도록 해준 목장주의 배려가 고마울 따름이었다. 제주올레 이사장 서명숙 씨가 돈 버는 일을 하는 게 아니라는 다짐을 몇 번이나 하고서 목장주에게 허락 받아 틔어 놓은 길이다. 문을 들어서니 야자수가 듬성듬성 서 있고 멀리 기다란 숲이 보이는 넓디넓은 초지가 펼쳐졌다. 몇 마리의 말이 한가로이 풀을 뜯고 있었다. 골프장으로 쳐도 그리 넓은 구장이 있을 것 같지 않은, 뭍에서도 볼 수 있는 대평원이었다. 가없는 바다와 함께 가슴을 시원스레 트여주는 들판이다.

해안 언덕을 따라 걷는다. 언덕 아래 해안에는 기묘한 형상의 바위들이 신비로운 풍광을 연출하고 있었고, 갯무 보라색 꽃이며 유채 노란색 꽃이 어울려 언덕바지를 수놓고 있는데, 바다를 바라보며 쉬고 있는 분홍색 재킷의 여인이 한 떨기 꽃으로 바위에 앉아 있었다. 그 옆을 여대생일 듯한 젊은 여성이 자주색 등산복에 배낭을 멘 청순한 모습의 젊은 여성이 타박타박 걸어가고 있었다. 그녀는 사흘째 올레를 걷고 있는 중이라 했다.

저 멀리서 걸어오고 있는 검은 옷차림의 세 여인. 일터로 가는 해녀들이었다. 물질에 필요한 옷을 입고 머리에는 수경을 쓰고 등에는 어구를 늘어뜨렸다. 얼굴 모습은 젊지 않아 보였지만 걸음걸이는 활기가 솟아나 보였다. 널따란 푸른 하늘이며 풀밭을 보며 걷는데 문득 그 넓은 초원에 단 한 송이 피어난 민들레가 눈길을 끌었다. 어디서 어떻게 날아와 이 한 송이만 피어났을까. 창해일속이 아니라 평원일화, 고적한 올레의 반가운 길 임자다.

초원 올레는 바닷가로 이어졌다. 비로소 '아름다운 제주 올레길'이란 표지판 하나가 보인다. 두꺼운 종이에 그려 붙인 것이다. 바위와 자갈이 널브러진 길이다. 누가 다듬지도 않았을 것이건만, 많은 사람들이 딛고 밟는 사이에 자갈도 가지런하고 평평히 누워버렸다. 범벅 솥의 기포처럼 송송 구멍이 뚫린 기묘한 바위, 그 구멍에 작은 몽돌을 잔뜩 끼워 놓기도 했다. 어느 모녀가 이 길을 걸었던가 보다. 바위 구멍에 파랗고 노란 리본을 달아 착한 사람되겠다며 엄마를 사랑한다고, 늘 건강하고 꿈을 이루기 바란다며 딸을 사랑한다고, 딸과 엄마가 함께 소원을 적어 놓았다. 줄기 끝에 자그마한 꽃을 종종 달고 있는 노란 꽃이 담뿍 바위틈을 메우고 있었다.

바닷가를 올라서니 동네다. 돌담길이 이어진다. 밭에는 밭담, 집에는 집담, 산소에는 산담, 어딜 보아도 나지막한 돌담이 정겹게 서있다. 돌 많은 섬, 제주의 그 돌이 모두 담이 되어 서있는 것 같다. 밭담은 집담, 산담에 비해 돌을 아무렇게나 얹어놓은 것 같지만, 현무암 그 돌은 서로 껴안는 힘이 있어 결코 무너지지 않는다. 경계도 이루면서 세찬 바람도 막아주는 밭담이다.

집인들 산소인들 모두 처소이기에 조금은 장식을 생각한 것일까. 집담과 산담은 비교적 가지런하고 정연하게 놓여 있다. 그러나 현무암의 거칠고도 정겨운 모습은 어디서나 매 한 가지다. 담은 결코 높지 않다. 이웃의 사는 모습을 다 볼 수 있다. 마당 텃밭에 무엇이 자라고 있는지, 무슨 나무가 서 있는지, 이웃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도 다 알 수 있다. 담은 내 집, 네 집을 갈라  놓기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 올레를 만들기 위해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올레는 이어진다. 어쩌면 제주의 모든 길이 올레라 할 수도 있다. 걷다가 보면 바다와 목장도 펼쳐지고, 집과 감귤 밭도 있고 오름과 무덤도 보인다. 어딜 걸어도 흑룡만리 검은 돌담을 끼고 걸을 수 있는 제주 올레-, 이 정겨운 올레를 내쳐 걷고 싶다. 상상의 샘이 다 마를 때까지 걷고 싶다. 무한정 걸을 수 없는 것은 길이 다해서가 아니라 여유로운 마음이 모자라서일 뿐이다.

차를 타고 달린다. 울창한 숯을 가로질러 길이 잘 다듬어져 있고 잘 뻗어있다. 다듬어진 지가 오래 되지 않은 듯 길도 매끄럽다. 제주가 섬이 아니라 대륙이라 할 만큼 달리고 달려도 끝이 잘 보이지 않는다. 국제 관광지로 손색이 없을 만큼 잘 개발되었다 싶으면서도 아쉬운 마음이 드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 이 매끄러운 길들이 정겨운 돌담길들을 무너뜨리지나 않았을까. 올레를 잘라먹지는 않았을까. 제주의 아름다운 풍광을 아스팔트 밑에 매몰시켜 버리지나 않았을까.

잠깐 동안이나마 여유와 평화를 안겨 주었던 제주 올레길, 올올이 말아 마음속이 깊이 넣어 두어야겠다. 사는 일이 힘들고 피곤해 지는 날, 한 올씩 꺼내어 그 여유와 평화를 걸어야겠다. 그렇게 살아가야겠다.♣(2009.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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