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산수필

촌스러운 아줌마 수전 보일의 꿈

이청산 2009. 4. 27. 17:42

촌스러운 아줌마 수전 보일의 꿈



 지금 살고있는 지옥과는 다른 모습일 거라고/ 지금 느끼는 것과는 완전히 다른 삶일 거라고/ 내 삶을 꿈꾸어 오곤 했었지만,/ 이제 삶은 내가 꿈꾸던 꿈을 죽여버렸네요.

(I had a dream my life would be / So much different from this hell I'm living /So different now from what it seemed /Now life has killed the dream I dreamed. )

 

뮤지컬 '레미제라블'에서 미혼모인 팡틴이 지난 시절의 짧았던 행복을 그리며 불렀던 노래 '나는 꿈을 꾸었네(I dreamed a dream)'의 마지막 부분이다. 공장에서 힘들게 일하며 어린 딸 코제트를 키워야 하는 자신의 처지를 한탄하는 내용으로 많은 사람들의 심금을 울렸던 노래다. 이 노래를 시골 아줌마 수전 보일(Susan Boyle)이 티 없이 맑고 고운 목소리로 불렀다. 그녀가 그토록 아름다운 목소리로 이 노래를 부를 줄은 누구도 몰랐다. 그녀가 영국 ITV '브리튼즈 갓 탤런트(Britain's Got Talent)'라는 프로그램의 무대에 등장할 때만 해도 심사위원들과 관객들은 냉소를 보냈다.

수전은 런던에서 10시간 정도 걸리는 영국 북동쪽에 있는 소도시 블랙번(Blackburn)에서 고양이 한 마리를 데리고 살고 있었다. 블랙번은 스코틀랜드에서도 가장 가난한 지역에 위치한 인구 5천 명 정도의 작은 마을이다. 그녀는 가수가 되고 싶은 꿈이 있었으나 마흔이 넘을 때까지 홀어머니를 부양하면서 살아오느라 꿈을 실현할 기회를 얻지 못했다. 결혼도 못했을 뿐만 아니라 이성과 키스도 해 본적도 없다고 했다. 직업도 얻지 못한 채 정부보조금으로 겨우 집세를 내며 가난하게 살고 있었다.

그녀가 수많은 관객들 앞에 섰다. 제대로 빗지 않은 듯한 머리와 뚱뚱한 몸매에 전혀 세련되지 않은 외모와 허름한 옷차림이 보는 이들의 웃음을 자아내게 했다. 심사위원이 '꿈이 무어냐?'고 물었을 때 그녀는 '전문 가수(Professional singer)'가 되는 것이라고 거침없이 말했다. 심사위원들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더욱 황당한 것은 '누구처럼 성공을 거두고 싶은가?'라는 물음에 '엘런 페이지처럼 되고 싶다.'고 하는 말이었다. 엘런 페이지는 웨스트엔드의 여왕으로 군림해 온 영국 최고의 뮤지컬 스타로, 웨스트엔드는 미국의 브로드웨이에 버금가는 영국 뮤지컬의 본향이다. 수전의 말에 관객들은 측은한 표정을 짓기까지 했다. 세상 물정 모르는 사람의 순진하기 짝이 없는 말로 들렸던 것 같다.

인터뷰가 끝나고, 수전의 목소리가 마이크를 타고 흘러나오자마자 감탄의 소리가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청아하고 호소력 짙은 가창력에 소름 끼치는 감동을 느낀 관객들은 참을 수가 없다는 듯 탄성을 지르며 열광의 도가니 속으로 빠져들었다. 그녀를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던 심사위원들도 넋을 잃은 듯 입을 다물지 못하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노래가 끝나자 일제히 일어서서 우레와 같은 박수를 보냈다. 심사위원 피어스 모건은 "이 쇼의 심사를 맡은 3년 동안 이렇게 놀란 적은 없다. 당신의 목소리와 호소력은 그 누구와도 견줄 수 없을 만큼 환상적이다."라며 절찬했고, 평소 독설과 야유로 참가자들을 힘들게 했던 심사위원 사이먼 코엘조차도 "이제 얼굴을 높이 들고 당당히 고향으로 돌아가도 되겠다."고 극찬했다. 이 프로그램의 참가자 누구에게도 'YES'라 해본 적이 없는 피어스며 모든 심사위원이 'YES'로 평가했다. 수전도 뜻밖의 결과에 놀란 듯 휘둥그레진 눈으로 주먹을 불끈 쥐고 발을 동동 굴렀다.

수전은 벽촌 고향 마을로 돌아왔다. 사람들은 2년 전 못생긴 외모와 어눌한 말투에도 불구하고 이 프로그램에 출연하여 오페라 가수로서 성공한 휴대폰 판매원 폴 포츠를 연상하며 '여자 폴 포츠가 탄생했다.'고 찬사를 보냈다. 그녀의 일상에 커다란 변화가 일어났다. 방송사로부터 출연과 인터뷰 요청이 빗발치고, 출판사와 음반사로부터 숱한 제의가 쏟아졌다. 그녀는 출연 동기를 묻는 기자의 질문에 "돌아가신 어머니를 위해 도전했어요. 어머니에게 내 삶에서 나도 무언가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거든요. 그런데 이렇게 반응이 좋으리라고는 상상도 못했어요, 난 그냥 노래만 불렀을 뿐인데……."라며 겸연쩍어했다. 수전은 뜻밖에 얻은 인기와 명성이 오히려 불편하게 느껴졌다. 누추한 자신의 집에서 세계 각지에서 몰려온 취재진과 인터뷰하는 일보다 그들에게 정성스럽게 차를 끓여 대접하는 일이 더 편안하게 여겨질 정도였다.

수전은 멋진 노래로 전 세계를 감동에 젖게 했지만, 어릴 때 성당의 성가대에서 잠시 활동했을 뿐 노래를 전문적으로 배워본 적은 전혀 없었다. 오히려 학창 시절엔 학습 장애를 겪으며 친구들로부터 놀림감이 되었던 적도 있었다. 그러나 수전은 노래 부르기는 매우 좋아했다. 동네 허름한 호텔의 노래방에 들러 부르고 싶은 노래를 마음껏 부르곤 했다. 수전을 지켜본 호텔 지배인은 "수전은 재능을 주체하지 못했다. 노래할 수 있을 때는 언제나 노래를 불렀다."고 했다. 수전은 노래에 대한 열망이 뜨거웠다. 타고난 재능도 물론 있었겠지만, 노래에 대한 불타는 열정이 오늘의 수전을 있게 했을 것이다.

수전의 한 이웃은 '수전은 진짜 따뜻한 성품을 가진 소박한 영혼'이라고 하면서 "요즈음 수전처럼 부모를 헌신적으로 돌보는 사람이 어디 있느냐"며 효녀중의 효녀라고 칭찬했다. 가톨릭 집안에서 아홉 남매 중의 막내로 태어난 수전은 부모에 대한 효성이 지극하여 결혼도 미룬 채 정성을 다해 홀어머니를 부양하면서 살아왔다. 프로그램에 참가한 것도 2년 전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면서 '모험을 하라'고 당부했던 것을 지키기 위해 용기를 낸 것이라고 했다. 수전은 순수한 영혼과 따뜻한 마음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 아름다운 마음에서 천상의 소리라 극찬 받은 목소리가 나온 것 같다.

그녀는 낙천적이며 긍정적인 사람이었다. 자신의 촌스러운 외모를 두고 놀리는 사람들의 시선에 대해 신경이 쓰지 않는다고 했다. 47세의 나이도 자기의 한 단면일 뿐이라며 쾌활하게 웃었다. 외모지상주의를 뒤집은 그녀의 모습은 보는 이들에게 또 하나의 감동으로 다가오게 했다. 그녀가 부른 노래처럼 자기에게는 '희망이 가득하고 삶은 풍만한 가치가 있는(When hope was high And life worth living) 것'이라 믿고, '사랑은 결코 죽지 않으리라 꿈꾸며(I dreamed that love would never die)' 살아왔을 것이다. 사람들로부터 주목을 받는 것이 좋다고 하면서도 그것에 결코 넋이 빠지진 않을 것이라 했다. 그 낙천성과 긍정적 사고의 힘이 촌스러운 노처녀 아줌마를 세계적인 스타가 되게 했을 것이다.

'레미제라블'의 팡틴은 '꿈이 죽은 삶'을 애절하게 노래했지만, 그 노래는 수전에게로 와서 사랑과 희망의 따뜻한 메시지가 되었다. 그녀에게는 꿈이 있었다. 삶은 그녀를 힘들게 했지만 결코 힘들어하지 않고, 그 꿈을 위하여 열정을 다했다. 힘든 삶 앞에 굴하지 않고 끊임없이 노래를 불렀다. 대중 앞에 나서는 일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많은 사람들 앞에서 노래를 불러 듣는 이들을 열광시키고 싶어했다. 부단한 노력이 준 희망이요, 용기일 것이다.

세상에는 역경을 극복하고 위인이 된 사람은 많다. 그러나 그들은 대부분 보통 사람들과는 다른 비범성을 지닌 영웅들이었다. 그들은 또한 전설적인 유래담 같은 것을 가지고 있기도 했다. 그러나 수전은 비범하지도 않고 영웅도 아니다. 평범하기 짝이 없는 우리의 많은 이웃 중의 한 사람일 뿐이다. 그녀에게는 아무런 전설도 없다. 꿈과 아름다운 마음과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생각을 가지고 살았을 뿐이다.

사람들은 세상일이 마음대로 안 된다고 고통스러워한다. 세상이 살기 어렵다고 힘들어한다. 그 고통과 힘듦을 이기지 못해 좌절하고 절망한다. 그리하여 돌아올 수 없는 길을 가버리는 사람들도 없지 않다. 이 때 우리는 스코틀랜드의 작은 마을 블랙번으로 달려 가보자. 고양이와 함께 살고 있는 촌스럽고 수수한 뚱보 아줌마 수전을 만나보자. 그녀의 꿈을 한 번 들여다보자. 그리고 그녀의 노래를 들어보자. 그 목소리에도 취해보자…….

내일 아침, 가벼운 걸음으로 출근길을 나서고 싶다.♣(2009. 4.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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