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산수필

세상 밖의 세상

이청산 2009. 7. 2. 10:46

세상 밖의 세상



꿈이 하나 있었다. 은퇴와 더불어 경치 좋고 공기 맑은 곳에 한 이백 평쯤의 땅을 사서 조그만 집을 짓고 텃밭이나 가꾸며 한적하고 평화로운 노후를 사는 것이었다.

나의 그 '경치 좋고 공기 맑은 곳'은 어디일까. 그곳 어드메에 이백 평 반듯한 땅이 있을까. 다가오는 퇴임의 날을 꼽아보면서 아내와 나는 시시로 궁리에 잠겼다. 어느 날 우리는 비장한 결심을 하기에 이르렀다. 고속도로가 멀지 않는 내륙 깊숙한 어느 시골 마을을 노후의 안착지로 삼기로 했다. 근무처를 따라 두 해를 살았던 곳이다. 그곳은 산천도 수려하고 공기도 아주 맑다. 전혀 생판인 곳보다는 살아본 곳이 나을 것 같고, 서울 사는 아이들과의 왕래도 큰 불편이 없을 것 같았다.

퇴임 전에 땅이라도 마련해 두어야 할 것이라 생각하고, 틈틈이 적지를 찾아 헤맸다. 드디어 찾아내었다. 십여 가구가 오순도순 살고 있는 동네, 뒤에는 산이 둘러싸고 앞에는 냇물이 흐르는 곳, 늘 볕이 잘 드는 곳, 친환경마을로 지정되어 있는 곳이었다. 무엇보다 다행인 것은 지난날 내가 날마다 오르던 산봉우리가 자리잡은 동네라는 것이다. 그러나 세상일이 다 그러하듯 모든 것이 만족스러운 것은 아니었다. 넓이는 내가 이상적으로 그리고 있는 데에 반에도 채 미치지 못했다. 만족할 수 있는 부분을 얻으려면 꿈의 한 부분은 떼어내 놓아야 할 것 같았다. 텃밭은 집을 짓고 난 다음에 따로 구해 보기로 하고, 그 땅을 가지기로 마음먹었다. 평생 처음으로 나의 땅, 우리의 땅을 갖게 된 날 아내와 나는 그리운 사람을 만난 것 마냥 설레는 가슴을 쓸어 내렸다.

아, 그런데 덩둘하게만 살아온지도 모를 내 생애가 다시 돌아 보이게 하는 일들이 내 곁에서 꿈틀거렸다. 지난 세월 동안 내가 해 온 일은 무엇이었던가. 아침이면 집을 나와 일터로 가서 종일 일에 매달리다가 해질 녘에는 집으로 돌아오는 일, 그리고 가끔씩 모주 길에 나서는 일 말고는 무엇을 할 줄 알았던가. 한 가지 더 있다. 시답잖은 글줄을 끼적거리면서 사는 것의 의미를 새겨 보려 하는 일-. 그 일들이 내 여생을 위해 무엇을 이바지해 줄까.

땅을 사는 일은 백화점에서 물건을 사는 것과는 같지 않은 모양이었다. 매도인이 있고 매수인이 있고 그 사이에 중개업자가 있었다. 중개업자는 매도인과 매수인 사이에 다리를 놓아주고 그 대가만을 받는 사람은 아닌 것 같았다. 치열한 상혼을 휘두르며 이윤을 추구하는 상인일 수도 있다는 사실을 나는 까마득히 몰랐다. 지금까지 내가 살아왔던 세상 밖의 낯선 풍경이 아닐 수 없었다.

법무사 사무소에 가야했고, 취득세며 농어촌특별세, 등록세며 교육세를 물어야 했다. 익히 들어보지 못한 어휘들이 머릿속을 혼란스럽게 했다. 나의 지나온 삶 속에서는 별로 등장할 겨를이 없었던 말이요, 제도들이었다. 세상살이 이치에 밝고, 법을 잘 아는 사람들은 그런 나를 보고 숙맥불변이라 할까, 천진무구라 할까.

그런 세상을 섭렵하지 못한 것은 내가 잘못 살아왔기 때문일까. 솔직히 고백하면 내가 사는 세상에만 전심했을 뿐, 밖에 또 다른 세상이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을 두지 않은 채 한 생애를 살아왔다. 가히 우물 안 개구리로 살아온 셈이라 함 직하다. 그러나 온 세상일을 다 알고서야 내 생애의 일들에 오로지 몰입하면서 어찌 살아올 수 있었으랴.

집을 지으려면 땅의 경계를 확실히 알아둘 필요가 있다고 했다. 측량을 해 보니, 나의 땅은 뜻밖에 길에도 들어 있었고 이웃집에도 들어 있었다. 내 땅인들 길을 어찌 내어 놓으라 할 수 있을까. 이웃 간에는 또 어찌해야 한단 말인가. 내 땅에 대한 설렘의 한 쪽엔 마음 가볍지 않은 일들이 똬리를 틀고 있다. 이 또한 내가 살아온 세상 밖의 세상에 있었던 일들이다.

뿐만 아니다. 집은 또 어떻게 지을 것인가. 어느 업자를 어떻게 불러 어떤 모양으로 지을 것인가도 나한테는 여간 부담스러운 일이 아니다. 일찍이 겪어본 적도 없고, 겪어 볼 수도 없었던 일이다. 무슨 재료로 어떻게 지을 것인가 하는 문제는 차치하고라도 시공업자와 벌여야 할 신경전이 걱정이다. 믿고 맡길 수밖에 없는 일이겠지만 일은 적당히 하면서 벌이만 밝히려는 사람을 만난다면 당해 낼 방도가 있을 것 같지 않다.

두렵다. 생각이 맑지 못한 사람들에게 속임을 당할지도 모르는 것만이 두려운 게 아니라, 오래 전부터 그려왔던 내 꿈이 깨어질까 봐 더욱 두렵다. 작지만 아담한 집, 햇살이 잘 드는 따뜻하고 아늑한 집, 마당에서 자라고 있는 채소며 꽃들이 잘 보이는 창 넓은 집을 짓는 것이 집에 대한 처음이자 마지막 꿈이다. 언제 또 다시 내 집이라고 지어볼 수 있으랴. 그 꿈이 잘 이루어질 수 있을까. 내 살아온 세상 밖의 새로운 세상이 조금은 힘겹게도 느껴진다.

그러나 어찌하랴. 아직 나에게는 걸어가야만 할 새로운 세상의 길이 기다리고 있지 않은가. 이제 나는 세상 밖의 세상으로 나서지 않으면 안 된다. 세상 밖에 있는 그 세상을 또 다른 나의 세상으로 만들어 가지 않으면 안 된다. 그 세상의 바람이 좀 차가울지라도 견뎌내고 이겨내지 않을 수 없다. 당해 낼 힘이 모자라면 모자란 대로, 힘 다해 새로운 세상과 화합해야 하리라.

평생의 과업을 마감해야 할 날이 서서히 다가오고 있는 지금, 지난 세월을 돌이켜 보면 번듯하게 이루어 놓은 게 없는 것이 아쉽긴 해도 외곬으로 살아온 것에 그리 큰 회한은 없다. 온갖 어려운 일을 겪으면서도 내가 살아야 할 세상을 지금까지 살아왔듯이, 그렇게 또 살면 되지 않으랴. '모든 것은 오로지 마음이 지어내는 것'이라 했다. 세상 모든 일은 내 마음에 달린 것이 아니겠는가. 누가 나를 숙맥이라 하면 어떤가. 나를 그렇게 보는 것은 그 사람의 눈이요, 마음일 뿐이다. 세상에는 모두 나를 힘겹게 할 사람만 있지는 않을 터, 그 중엔 따뜻한 이웃도 없지 않을 터-.

오는 주말에 우리 땅에 가 보아야겠다. 어느 방향으로 어떻게 집을 앉혀야 할지 다시 한번 가늠해 보아야겠다. 이웃이 될 사람들과도 다정한 인사를 나누어야겠다. ♣(2009.6.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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