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산수필

승윤이의 휴일

이청산 2009. 6. 2. 11:22

승윤이의 휴일



겨울 같으면 하얀 눈이 덮여 있을 썰매장엔 결 고운 인조 잔디가 새파랗게 깔려 있다. 제 아비와 함께 썰매에 앉은 승윤이가 썰매장을 쏜살같이 미끄러져 내려온다. 즐거운 비명이 바람을 가르며 썰매장을 퍼져나간다. 썰매에서 내린 승윤이는 가슴을 활짝 편 채 파란 잔디 위를 환호하며 달린다. 널따란 초원이 모두 제 세상이 된 것 같다.

승윤이가 제 아비, 어미와 함께 연휴를 맞아 할아비, 할미를 찾아왔다. 네 살배기 승윤이가 벌써 유치원을 다니고 있다. 네 살배기라지만 서너 달 뒤에야 겨우 세 돌을 맞을 수 있을 뿐이다. 좀 이른 감은 있지만 고만한 아이들은 다들 유치원을 다니고 있다고 한다. 학업(?)에 메인 처지가 된 승윤이에게 이제 휴일은 소중한 시간이다.

그 소중한 틈을 타서 할아비, 할미에게 왔다. 나날이 달라지는 그 깜찍한 모습을 대할 수 있는 것만으로도 참 즐거운 일인데, 하나하나 하는 짓들이 여간 귀엽지가 않다. 품에 덥석 안겨 어리광하듯 재롱을 부리기도 하고, 노래도 곧잘 부르고 율동도 잘한다. 아침에 일어나서 유치원에 가기까지, 그리고 유치원에서 놀고 배우는 일을 노래로 엮어 내기도 한다. 세상의 어떤 활동사진보다 더 재미나고 감동적인 장면을 승윤이가 만들어 내고 있다. 크는 아이들은 하루가 다르다더니 지난겨울에 왔을 때보다 훨씬 더 영리해진 것 같다.

승윤이의 휴일을 무엇으로 즐겁고 뜻 깊게 해줄까. 온 식구 함께 문경에 가 보기로 했다. 문경은 나의 퇴임 후를 의탁한 땅이라 앞으로 저들도 자주 드나들어야 할 곳이고, 저들이 사는 서울에서는 쉽게 볼 수 없는 자연의 모습들을 대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문경을 향하여 달려갔다. 승윤이도, 제 아비 어미도 기대에 부풀었다. 문경새재 나들목에서 고속도로를 내려 마성의 어느 한적한 마을을 찾아 들었다. 두어 해 뒤에 우리 노친네들이 살아갈 땅을 둘러보았다. 뒤는 산이고 앞은 들판 너머로 강이 흐르고 있는 곳이다. 아들 내외는 부모가 노후를 의지할 땅이라고 지형이며 지세에 유별한 관심을 가지고 보았다. 저 어린것이야 어찌 알랴, 훗날 저며 저의 아우들이 마냥 뛰어 놀 곳임을-.

새재 쪽으로 갔다. 점심때가 되어 어느 식당에 들었다. 이곳 고유의 전통 음식으로 선정되어 있는 산채 비빔밥을 주문하여 맛있게 먹었다. 맛있게 느낀 것은 어른들일 뿐 승윤이는 잘 먹지 않았다. 그런 것을 먹어 본 적이 없기 때문이리라. 언젠가는 맛나게 먹게 되겠지.

잔디 썰매장으로 올라갔다. 제 아비, 어미와 그리고 할아비와 번갈아 가며 탔다. 할아비와 타고서는 좀 무서웠던 모양이다. 아비와 미끄러져 내려오고는 잔디밭을 소리치며 신나게 달리더니, 할아비와 타고는 조금 소침해졌다. 할아비의 썰매 조종 기술이 좀 어둔했던 모양이다.

문경새재에서는 도자기축제가 열리고 있었다. 주흘관 길목에는 오가는 사람들로 붐볐다. 빽빽이 설치된 뾰족 지붕의 부스들에서는 여러 가지 전시품들이며 체험 프로그램들이 사람들의 눈길과 발길을 잡았다. 부스마다 관람객들로 들끓었다. 승윤이는 돌림판 위에 얹힌 진흙덩이가 빙글빙글 돌면서 그릇으로 만들어지는 모습을 신기하다는 듯 바라보았다.

사람들 사이를 벗어나 자연생태공원으로 갔다. 곳곳의 우리 안에는 갖가지 날짐승, 길짐승들의 모습이 보이고, 산야에는 온갖 야생화며 야생초들이 자연 그대로의 모습으로 무리 지어 있었다. 승윤이가 문득 손뼉을 쳤다. 원숭이 우리 앞에서였다. 반가운 이를 만난 듯한 표정이다. 책에서 많이 봤던 것을 직접 만난 기쁨과 즐거움의 손뼉인 것 같았다.

풀이며 꽃 이파리 하나하나, 눈에 비치는 모든 것들이 승윤이에게는 참으로 신기하게 보이는 모양이다. 또르르 달려가더니 무얼 하나 주워 든다.

"이것 봐!" 제 눈가에 갖다 대면서 신기한 듯이 보여주는 것은 솔방울이다.

"그래 참 이상하게 생겼지? 소나무에 열리는 솔방울이라는 거야."

침이 숭숭 달린 소나무를 다시 한 번 쳐다본다.

차를 타고 달리면서 승윤이는 노래를 불렀다. 옆에 앉은 제 어미와 할미가 흥에 겨운 듯 박자를 맞추며 손뼉을 친다.

다음 날은 쑥떡을 해 주고 싶다는 할머니를 따라 들판으로 가서 쑥을 뜯기도 하고, 산으로 가서 숲 속을 걷다가 아비 손을 잡고 모험 놀이 시설을 타기도 했다. 승윤이는 활짝 핀 얼굴로 깔깔거리며 웃기도 하고 환호를 지르기도 했다. 승윤이의 기쁨과 즐거움은 오롯이 할미, 할아비의 기쁨과 즐거움으로 옮아왔다.

천진무구란 저런 모습을 두고 하는 말일까. 천사의 표정이며 몸짓이 저러할까. 승윤이의 표정이 너무 맑고 귀엽다. 살아가면서 겪어야 할 세상의 바람이 아무리 세차고 거칠어도 저 얼굴 저 모습은 영원히 저의 것이 되었으면 좋겠다.

며칠을 할아비, 할미와 보낸 승윤이는 아비, 어미와 함께 저들이 사는 서울로 다시 떠났다. 많은 사람들 속으로, 온갖 차들이 분주히 다니는 번잡한 거리가 있는 곳으로 돌아갔다. 날이 새면 또 유치원도 가야 할 것이다.

불과 며칠 안 되는 시간들이었지만, 맑고 밝은 마음과 아름다운 꿈을 가꾸는 시간들이 되었을까. 잘 가거라, 언제 휴일 봐서 다시 또 오고. 저들과 두 늙은이는 서로의 모습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손을 흔들고 또 흔들었다.♣(2009.5.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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