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산수필

아뿔싸, 그 신비로운 것이

이청산 2009. 4. 20. 13:54

아뿔싸, 그 신비로운 것이



 마치 꿈속을 거닐다가 온 것 같았다. 그 길이며, 꽃이며, 풀이며, 나무며-.

제주 공항에 내리자마자 김 선생의 매형이 우리를 반겨 맞았다. 처남을 사랑하는 마음이다. 매형은 처남을 비롯한 우리 일행을 커다란 전망창 밖으로 장독대와 대나무 숲이 우거진 정원이 보이는 어느 식당으로 안내했다. 정원의 조경을 감상하여 전복 요리로 제주의 맛을 완미하였다. 매형이 내어준 차를 김 선생이 몰아 한라산국립공원을 향해 달렸다. 모처럼 제주를 여행하는 우리는 차창 밖으로 펼쳐지는 이국적 풍경에 가슴이 설레었지만 오랜만에 고향에 온 김 선생도 설레기는 마찬가지인 것 같았다.

길은 신비의 도로 쪽과 어리목 쪽으로 갈라졌다. '신비의 도로'를 들렀다가 어리목 방향으로 가기로 했다. 눈으로 보는 길은 분명히 내리막이었다. 반대 방향에서 오는 차가 거북이  걸음으로 올라오고 있다. 오르기가 힘이 들어서가 아니었다. 시동을 끈 채 내리막을 내려오고 있다. 신비로운 착시현상이었다. 오르막이 아니라 내리막이고, 내리막이 아니라 오르막이었다. 제주 여행의 특별한 추억이 뇌리 속에 담기는 순간이었다. 사진으로는 잘 나타나지 않겠지만 그래도 열심히 카메라에 담았다. 그 고개 위에는 흐드러지게 핀 유채 밭이 있고 관광객의 볼거리를 위하여 전설 담은 도깨비 상을 여기 저기 세워 두었다. 유채꽃과 도깨비상을 배경으로 하여 포즈를 취하기도 했다. 나중에 웃음으로 회상할 수 있는 장면들이었다.

한라산국립공원에 도착하였다. 한라산의 우람한 모습이 한가득 안겨왔다. 우리나라 최남단을 지키는 정기 어린 영산-. 길은 어리목 등산로 쪽과 어승생악으로 갈라졌다. 오후 5시, 어리목으로 한라산을 오르기에는 늦은 시각이었다. 어승생악에 올라 한라산을 바라보는 것으로 아쉬움을 달래기로 했다. 조선 정조 때, 이곳에서 용마가 나서 임금이 타는 말로 진상했다는데서 '어승생악(御乘生嶽)'이라 이름이 붙여졌다는 곳, 이름부터 신비감에 젖게 하는 곳이었다.

산의 보호를 위해 나무로 계단을 설치해 놓은 오름 길의 곳곳에 이곳에서만 사는 나무며 풀이며 새와 같은 동식물들을 그림으로 소개해 놓았다. 꽝꽝나무며 윤노리나무며 참빗살나무며, 당단풍이며 이름도 신기한 나무들을 카메라에 담았다. 고향 땅을 밟고 있는 김 선생이 씩씩하게 오르고 있다. 나무 밑에는 온통 조릿대가 자욱했다. 울릉도 섬살이 때 많이 보던 것들이다. 어쩌다 나리가 듬성듬성 보이기도 했다. 뒤돌아보는 숲 속에서 시나브로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한라산 웅장한 모습도 카메라 속에 넣었다.

드디어 정상에 올랐다. 해발 1169m, 이미 차를 타고 많이 올라온 탓인지 그렇게 높을 줄 몰랐다. 산마루의 나무와 풀들은 꽃피고 잎 필 날을 상기도 기다리고 있는 듯했지만, 한라산 한 활개를 올랐다는 감개가 꽃에 못지 않은 청량감을 느끼게 했다. 어승생악 정상 표지석을 잡고 서서 정상 등정의 감격을 카메라에 담았다. 저 건너로 백록담을 안고 있는 한라산 정상의 모습이 우뚝이 드러나고, 제주시의 모습이 안개 속에서 어렴풋했다. 백록담에 얽인 이야기며 모습을 상상하며 감회에 젖는 사이에 해는 이름도 살가운 애월(涯月)의 품속으로 잦아들고 있었다.

어승생악을 내려 왔을 때는 땅거미가 이국 같은 섬 제주도 길섶의 야자수 위에 걸려 있었다. 내일은 제주 올레가 우리를 반겨 줄 것이라 생각하며 제주의 아름다운 기억이 담긴 카메라를 보듬으며 숙소로 돌아왔다. 이튿날 성산일출봉을 오르고 올레를 걸으며 제주 그 풍정의 아름다움과 정회를 가슴에 담뿍 담았다.

잠시 동안이었지만, 정겨운 기억들을 머리와 가슴속에 한가득 담아 제주도를 떠나 일상으로 돌아왔다. 그 정감으로만 해도 한 동안은 즐거운 시간들을 보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 즐거움이 오래오래 이어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간절했다. 오래오래 기억에 담아두고 싶다. 기억은 바래지는 물빛처럼 희미해져 갈지라도, 카메라 속에 담긴 사진은 오래도록 기억을 대신해 줄 것이다.

카메라를 열어 '신비의 길'의 길이며 '어승생악'의 모습이며, 커다란 사발 모양의 성산일출봉 정상의 분화구, 정겹게 이어지던 올레의 모습이 담긴 사진을 보고 또 보며 영원히 간직하리라 생각하며, 이미지 파일을 복사도 하고 잘라내기도 하여 이리저리 옮겨 갈무리하였다. 보고 싶을 때는 어디를 열어봐도 볼 수 있으리라 생각하며 폴더를 여는 순간, 아뿔싸! 이런 변이 있나.

제주 나들이의 한 부분이, 그 추억의 한 부분이, 그 신비로운 것들이 뭉텅 날아가 버렸다. 창 넓은 어느 요리 집의 아름다운 정원이며, 오르는 것이 내리는 것이고 내리는 것이 오르는 것이었던 '신비의 도로'며, 이름도 푸나무도 이채로운 어승생악을 오르던 모습이, 그 아름다웠던 추억의 장면들이 날아가 버렸다. 어디로 날아갔을까, 어디쯤 날고 있을까, 나도 모르게 만들어진 어느 폴더에라도 숨어 있을까 하여 이곳저곳을 뒤졌지만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무엇을 원망하고 누구를 탓하랴. 그것도 지나친 욕심이었을까. 단단히 간직하고 싶은 마음이 화를 불러오고 말았다. 예리한 칼날이 가슴 한 부분을 긋고 지나가는 것 같다. 수년 전 독도에 갔을 때, 독도의 여러 가지 모습을 촬영했던 필름을 잃어버려 안타까워했던 기억이 떠올라 마음이 더욱 아팠다. 파일이 모두 없어지지 않은 것이 그나마 다행한 일이다. 없어진 그 장면들은 기억 속에서나마 오래오래 간직해 두는 수밖에 없다. 날아가지 않게 지워지지 않게 꽁꽁 묶어 두는 수밖에 없다. 무엇으로 묶어 둘까. 이 글을 쓰고 있는 소이도 기억을 메어 두는 한 수단이 될까 해서다.

이순의 고개를 넘어온 지금까지도 남 참 덩둘하게 살고 있다. 마땅히 지켜야 할 것도 옳게 못 지키고 소중히 갈무리해야 할 것도 옳게 갈무리하지 못하고 지내 온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이어지는 실수들이 한 생애를 엮어 온 것만 같다. 얼마를 더 살아야 소중한 것은 소중하게 갈무리할 수 있는 지혜를 가지고 살 수 있을까. 지혜로 살 일은 지혜로 살면서도, 꿈은 꿈대로 간직하며 꿈처럼 아름답게 살 수 있을까.

얼마를 더 살면 지혜는 지혜대로 꿈은 꿈대로 잘 건사할 수 있을까.

그렇게 살아갈 수 있을까. ♣(2009.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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