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산수필

제주 산담

이청산 2009. 4. 20. 13:56

제주 산담



 잠시 제주도를 다녀왔다. 제주도를 여행하면서 가장 많이 본 것도, 가장 인상이 깊었던 것도 돌담이었던 것 같다. 번화가를 조금만 벗어나면 어디서나 볼 수 있는 것이 돌담이다. 집에는 집담, 밭에는 밭담, 산소에는 산담이 있다. 모두 숭숭 구멍이 뚫린 현무암 덩이들을 얼기설기 쌓고 포개고 얹어 담으로 지어 놓은 것이다. 돌, 바람, 여자가 많아 삼다의 섬이라는 제주 '삼다'의 으뜸이 바로 돌인 것 같다. 숱한 역사의 바람을 겪은 제주 사람들의 투박하면서도 의지에 찬 얼굴 같은 그 돌들을 쌓아 이룬 담-.

이 중에 산담은 무덤 주위를 돌로 쌓아 정방형으로 둘러친 담을 말한다. 산담은 방목을 많이 하고 있는 제주 사람들의 생활 방편에 따라 가축들로부터 무덤을 보호하기 위해서 혹은 산불의 피해로부터 무덤을 보호하기 위해서 쌓았다고 하지만, 밭담이 그랬던 것처럼 무덤 자리에도 지천으로 있는 돌들을 처지하기 위해 수단으로 담을 쌓기 시작했던 것으로도 보인다.

산에 있다고 산담이라지만, 꼭 산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기생화산 오름 자락에 있는 것들도 있지만, 오히려 집 곁에, 밭 가운데 더욱 많이 분포하고 있는 것 같다. 처소나 일터 가까이에 무덤을 두고 있는 경우가 많다. 제주 사람들의 부모들은 노후에도 자식에 얹혀 사는 것을 부담스럽고도 부끄럽게 여긴다고 한다. 그래서 자식이 결혼하면 모두 분가를 하게 하고, 부모들이 따로 생업에 종사하면서 독립적으로 생활해 나간다는 것이다. 죽어서야 비로소 자식의 보호를 받게 되는데, 자식들은 살아 생전에 부모를 가까이 모시지 못한 게 한이 되어 사후에나마 부모를 가까이에 모시기 위해 사는 집 근처나 매일 나가서 일하는 밭에 무덤을 많이 쓴다고 한다. 제주 사람들은 객지에 나가 살면서 부모의 생신 때는 직접 와서 뵙지 못하는 경우가 있어도 제사 때는 반드시 찾아온다고 하는데, 이 또한 무덤을 가까이 두려는 마음과 함께 부모님의 사후를 더욱 애틋하게 생각하는 마음이라 할 수 있을 것 같다.

담의 두께가 두어 자는 될 정도로 겹겹이 쌓아 놓은 것도 있고 겨우 한 켜로 얽어 놓은 얇은 것도 있다는데, 제주 사람들 사이에 전해 오는 말에 의하면 집안의 덕망의 정도에 따라 두께가 달라진다고 한다. 옛날 살기가 아주 어려웠던 시절에 사람이 죽으면 다른 것은 부조하기 곤란하여 산담 쌓는데 필요한 돌을 부조하는 풍습이 있었다고 한다. 평소에 인심을 많이 얻은 집안은 돌 부조가 많이 들어와 두꺼운 담을 쌓고 그렇지 못한 사람은 얇고 낮은 담을 쌓았다고 한다. 사실인지 아닌지는 알 수 가 없다. 지금 보이는 무덤에는 유별히 두꺼운 담도 없고, 그리 얇게 쌓은 담도 보이지 않 는다. 다만 돌을 편편하고 가지런하게 잘 정돈해 놓은 담이 있는가 하면 그렇지 않게 쌓은 담이 보일 뿐이다. 쌓은 이의 정성의 차이라 할 수 있을까?

무덤 가에 담을 쌓으면서 영성을 부여하기도 하여 영혼의 집인 무덤을 보호하는 울타리로 생각하게 되었다고 한다. 울타리가 튼튼하면 영혼이 잘 지켜질 것이라 생각하고 튼실하게 잘 쌓으려고 애썼을 것 같다. 지난날에는 '신문(神門)'이라고 하여 무덤의 한 쪽을 조금 틔어 영혼이 드나드는 문으로 삼았는데, 지금은 신문이 거의 보이지 않는다. 과학의 발달이 눈에 보이지 않는 영적인 존재에 대한 믿음을 약화시켰기 때문은 아닐까.

세상의 변화와 맞추어 무덤의 모습도 변해 가고 있다. 요즈음은 투박한 돌로 힘들여 담을 쌓기가 거추장스럽게 생각된 까닭인지 콘크리트로 테를 둘러 경계만 표시한 무덤도 보인다. 뿐만 아니라 녹지 공간을 너무 많이 차지하거나 경관 보존에 지장을 준다 하여 산담의 구축을 권장하지 않는 추세에 있다고 한다. 언젠가는 산담의 풍습이 사라지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세월이 흐를수록 사라지고 달라져 갈 것은 어찌 산담만이랴. 제주의 고유하고 특이한 풍물들의 장래가 어떻게 될 것인지 알 수가 없다.

지금 이 시각에도 여객기가 제주의 창공을 가르고 있다. 하루에도 수십 번 비행기며 배가 하늘과 바다를 오간다. 빈번하게 이어지는 하늘길이며 물길 따라 제주와 육지가 점점 가까워지고 있다. 뭍과 제주가 하나로 되어 가고 있다. 삶의 모습도 점점 별 다름이 없어져 가고 있는 것 같다. '다름'이야말로 제주의 매력이요, 신비가 아니던가. 그 '다름' 때문에 우리는 제주도가 그립고, 보고 싶고, 가고 싶다.

육지에 없는 것이라고 제주에 있는 것이 없어지지나 않을까, 없어도 좋을 것까지 육지에 있는 것이라고 제주에 생겨나려 하지나 않을까. 그런 일은 없었으면 좋겠다. 언제라도 제주에 가면 올레길 돌담이며 산담을 볼 수 있고, 그 서린 이야기들을 들을 수 있으면 좋겠다. 그 고유하고도 정겨운 삶의 모습을 마주할 수 있으면 좋겠다. 그리하여 일상의 일탈을 꿈꾸는 뭍 사람들의 신선한 이상향으로 영원히 남았으면 좋겠다.♣(2009.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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