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산수필

오늘도 걷는다

이청산 2009. 4. 15. 10:07

오늘도 걷는다



 "오늘도 걷는다마는 정처 없는 이 발길……"이라는 노래가 있다. '-마는'이라는 말은 앞의 사실을 인정을 하면서도 그와 어긋나는 상황을 나타내는 보조사다. 이 말에 의해 이 노래는 설움과 절망, 고독과 비탄이 서린 내용으로 이어지고 있다. 이 노래에 등장하는 나그네는 일제 강점기에 나라 잃은 설움 속을 살고 있는 식민지 백성의 모습에 다름 아니다. 그러나 '오늘도 걷는다'라는 말속에는 건강과 활력이 있고, 만남과 자유로움의 기쁨이 있다. 오늘도 나는 걷는다. 나의 걸음은 고독과 절망이 아닌 활기와 희열, 자유와 사색의 걸음일 뿐이다.

아침에 일어나면 우선 체조를 한다. 그리고 밖으로 나가 골목길을 걷다가 어느 초등학교 운동장에 이른다. 운동장을 걷는다. 어디 조용한 산책길이 있으면 좋으련만, 이 도회에서 이른 아침에 가볍게 걸을 수 있는 길이 마땅치가 않다. 다람쥐 쳇바퀴 돌 듯 운동장 둘레를 도는 것이 그리 재미있는 일은 아니지만, 하루가 시작되기 전의 고요한 운동장을 걷는 것도 상쾌한 자유를 느끼기에는 모자람이 없다. 운동장 넓은 공간이 모두 나의 길이다.

몸만 걷는 것이 아니라 생각도 함께 걷는다. 지난밤의 부질없었던 생각들이란 다 사라져버렸다. 어제 못다 한 일은? 오늘 할 일은? 쓰고 싶은 그 이야기의 실마리는 어떻게 풀어 나가지? 빌딩 위로 해가 맑은 빛살을 뿌리며 솟아오른다. 햇살이 곱다. 운동장 가장자리의 잔디들이 새싹을 뾰족이 내민다. 좀 있으면 푸른 싹 같은 아이들이 몰려 올 것이다. 총총 걸음으로 집으로 향한다. 다리며 어깨가 한결 가볍다. 경쾌한 걸음으로 출근할 수 있을 것 같다.

출근길을 나선다. 물론 걸어서 가는 길이다. 집이 일터에서 멀지 않은 데 있는 것이 참 다행이다. 사람들의 걸음이 바쁘다. 달리는 자동차들이 속도를 더한다. 그 바쁨이 숨막히게 생각되다가도, 열심히 살려는 모습들인 것 같아 정답게 느껴지기도 한다. 등교하는 아이들의 말소리가 새소리처럼 들린다. 교문 앞 네거리에서 노란 깃대를 든 아이들이 교통정리를 하고 있다. 수고! 미소를 주고받으며 길을 건넌다. 봄 아침의 햇빛이 연분홍 진달래꽃을 닮아 가고 있다.

퇴근을 한다. 내 일과는 끝나지 않았다. 산길을 걸을 일이 남았다. 날마다 오르는 산이다. 동네를 지나 산자락에 이른다. 나지막한 야산이지만 내 걸음을 정겹게 안아 주는 산이다. 조붓한 오솔길을 지나면 가파른 오르막이 다가선다. 오르막이 있어 산이 아닌가. 추위가 이제 끝났는가 싶더니 어느 새 익은 봄이다. 푸른 솔숲 속에 자욱히 핀 진달래가 낙조를 받으며 선혈처럼 붉어진다. 보여주고 싶다,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바람의 촉감이 여인의 살결 같다. 무엇이 미움이고 무엇이 사랑인가. 세상은 붉은 꽃과 푸른 나무뿐인 것을. 무엇이 거짓이고 무엇이 진실인가. 바람소리, 새소리뿐인 것을. 산마루에 올라선다. 전봇대 밑의 쓰레기며 빌딩의 벽에 너덜너덜 붙은 광고지는 다 어디로 가버렸는가. 정연하게 늘어선 높고 낮은 빌딩들이 저마다의 삶을 갈무리하고 있을 뿐이다. 내리막길 숲 속의 생강나무 작은 꽃이 한결 노랗게 보인다.

땅거미 내려앉은 동네로 돌아온다. 팍팍한 포장길이다. 자동차들이 과속 방지턱을 넘나들며 분주히 달리고 있다. 귀가 길을 달리고 있는가 보다. 길가의 마트며, 교회당이며, 순대국밥집이며, 노래방에 네온사인이 명멸하고 있다. 삶의 모습들이 네온 불빛을 타고 있다. 낮의 세상과는 다른 세계를 이루며 저마다의 삶이 빛을 내고 있다. 다툼이며 미움 같은 것만 없으면 아름다운 불빛이겠다. 내 걷는 길의 꽃이 될 수 있는 불빛이겠다.

늘 같은 시간대에 같은 곳을 걷다보면 한결 같지는 않을지라도 낯익은 사람들을 볼 수 있다. 가게 주인이 그렇고 운동장을 걷거나 달리는 사람들이 그렇다. 아침 출근길에서 마주치는 사람도 그러할 때가 많다. 늘 그 사람이다. 그 사람들도 날 보고 '늘 그 사람'이라 할 것이다. 타방으로 출장 간 날 말고는 바람이 부나, 비가 오나 나는 그 길을 걸었다. 나를 보는 사람들은 '저 사람이 보이는 걸 보니 또 때가 되었나 보군.'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자신의 습관을 고집스레 지키려 했던 칸트 늘 정한 시간에 정한 곳을 산책했다. 동네 사람들이 칸트의 산책 걸음을 보고 시계의 시각을 맞출 정도였는데, 그런 칸트가 산책 시간을 두 번 어겼다고 한다. 한 번은 프랑스 혁명(1789)에 관한 신문 기사를 읽다가, 또 한 번은 루소의 '에밀(Emile)'을 읽다가 시간 가는 줄 몰랐었다고 한다. 나는 다른 무엇에 심취하여 걷기를 잊어본 적이 없다. 걷는 일이 나에게는 무엇보다 먼저이기 때문이다.

솔직히 고백컨대, 내가 걷기를 시작한 것은 몸의 건강을 다스리기 위해서였다. 나이가 들수록 건강을 지켜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건강을 보전하기 위해서는 운동이 제일이라 생각했고, 내게 가장 적합한 운동은 걷기라 판단했다. 중매 결혼을 해도 살다보면 정도 들고 사랑도 생기는 것처럼 걷다가 보니 걷는 일을 사랑하게 되고, 그 사랑에 흠뻑 빠지게 되었다. 몸이 가벼워지면서 건강도 유지해 나갈 수 있게 되었다. 이제 내 생활에서 걷기를 빼버린다면 내 삶의 칠팔 할이 사라진 것이나 진배없을 것 같다.

오늘도 나는 걸으면서 육신의 건강을 돕는 일로 많은 시간을 바치고 있다. 정신의 건강을 증진하는 일로는 얼마나 많은 힘과 시간을 들이고 있는가. 걷는 일만한 노력을 읽고 쓰는 일에 쏟았더라면 어느 정도의 학문적, 예술적인 경지를 성취했을 것도 같다. 스스로 부끄러워지기도 하지만, 이러할 때 나는 다비드 르 브르통의 '걷는다는 것은 침묵을 횡단하는 것'이며, '보행은 가없이 넓은 도서관'이라는 말을 변명과 위안으로 삼고 있다.

오늘도 걷는다. 육신의 건강을 보전하기 위하여, 침묵을 가로질러 만날 자유와 사색을 위하여, 그 가없는 도서관에 들기 위하여 아침을 걷고 저녁을 또 걷는다. 골목길을 걷고, 운동장을 걷고, 산길을 걷는다. 끝없는 그 길을 걷는다. 그 생명의 길을 걷고 걷는다.♣(2009.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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