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는울릉도

감성만 잃지 않는다면 -여기는 울릉도·37

이청산 2008. 6. 20. 15:22

감성만 잃지 않는다면

-여기는 울릉도·37



부산에서 대구로 가는 무궁화호 열차를 탔다. 출장 볼일이 예상보다 일찍 끝났다. 저녁 무렵에 볼일이 끝나면 포항 사는 김 선생의 차를 타고 포항으로 가서 김 선생과 소주나 한 잔 하고 밤배를 타고 섬으로 돌아갈 예정이었다. 일이 일찍 끝나는 바람에 대구의 집으로 가서 자고 내일 새벽에 섬을 향해 출발하리라고 계획을 바꾸었다. 밤배를 타기엔 시간이 너무 많이 남았기 때문이다.

모처럼 기차를 타고 달린다. 역마다 다 쉬어 가는 열차의 창 밖 모습이 정겹다. 차창에는 갖가지 풍경이 유월의 신록을 배경으로 하여 싱그럽게 펼쳐지고 있다. 산이 쉼 없는 선을 그어 나가고, 들판이 펼쳐진다. 나무들이 달려나가고 교회당이 자나간다. 고가도로 위로 자동차들이 쉼 없이 달리고 있고 전봇대들이 빠른 속도로 차창을 빠져나간다. 하얀 비닐하우스가 사라져가고, 모내기를 위해 물을 대어 놓은 논이 스쳐간다. 붉은 흙 위에서 분주히 손을 놀리고 있는 부부가 영상처럼 비쳤다가 문득 외딴집 하나가 그림처럼 다가온다. 강물이 흘러가고 달리는 차륜 속으로 시간이 감겨간다.

널따란 차창에 나타났다가 사라져 가는 만상의 모습들이 새삼스럽게 신기해 보인다. 내 가슴에도 창이 있다면 저랬을 것이다. 수많은 산과 나무들이, 강과 냇물들이, 구름과 바람이,  하고많은 생명체며 사람들이 내 가슴의 창을 스치거나 뚫고 지나갔을 것이다. 사랑과 미움들이, 미소와 눈물들이, 고독과 고단이 내 가슴의 차륜 속으로 감겨 갔을 것이다.

세상은 어떻게 돌아가고 있을까, 신문을 읽는다. 기름 값 폭등의 여파로 화물연대가 파업에 돌입하여 물류에 비상이 걸렸다는 뉴스가 첫 머리를 장식하고 있다. 만사형통(萬事兄通)이라는 대통령 형님의 이선(二線) 후퇴론이 제기되고 있다는 소식이며, 잔디밭 서울광장이 연일 이어지는 촛불 시위로 인해 그 파릇파릇하던 잔디가 사라져버렸다는 답답한 소식들이 정치면과 사회면을 장식하고 있다. 문화면에서는 군 입대를 앞두고 있는 한 남자 가수의 인터뷰 기사를 싣고 있다.

"잊혀지는 것은 두렵지 않아, 내 감성만 잃지 않는다면……"

입대를 앞둔 심경을 물은 데 대한 대답의 말을 헤드라인으로 뽑았다. 대중의 인기를 먹고사는 가수가 군대 생활 동안에 대중에게 잊혀지는 것보다 감성을 잃어버릴까 봐 더 두렵다는, 그 '감성'이란 말이 새삼스레 신선한 파장을 일으키며 폐부 깊숙이 박혀 왔다. 그 말은 미국산 쇠고기 수입 반대를 외치며 청와대로 향하는 촛불 시위대를 막기 위해 도로를 가로질러 성벽처럼 설치해 놓은 컨테이너 박스와 오버랩 되기도 했고, 나의 섬살이와 중첩되기도 했다. 촛불과 컨테이너 박스, 나와 섬-. 감성의 자리는 어디일까.

기차는 밀양, 청도를 지나 경산으로 계속 달려가고 있다. 동대구역에 이르면 이 기차를 내려 집으로 돌아가야 한다. 그리고 날이 바뀌면 새벽에 집을 나서 섬으로 향해야 한다. 그렇다, 지금 내 삶이 이르러 있는 곳은 울릉도, 그 섬이다. 그러나 이제는 내 섬살이도 종착역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 섬을 살날도 얼마 남지 않은 것 같다.

나에게서 섬은 항상 그리움과 동경의 대상이었다. 섬을 향해 바다를 건너는 일은 내 삶 그 자체였다. 그래서 건넜던 바다를 다시 건너고, 그리움의 현장을 찾아 또 건넜다. 다시 찾아왔지만 섬은 언제나 아름다웠다. 그 광막한 푸른 물이 아름답고, 그 물에 둘러싸인 고독이 아름다웠다. 섬의 나무와 풀들이 아름답고 곧장 흘러내릴 듯한 화산암이 아름다웠다.

그러나, 이제야 알았다. 그리움의 현장이 그리움 그 자체는 아니라는 것을, '그리움'이란 현장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또 한 번의 섬살이를 통해서야 비로소 알았다. '그리움'이란 '그리움'으로 존재할 뿐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 뿐이랴, 우리의 삶도, 행복도, 희망도 어느 현장에 존재하는 것이 아님을, 삶은 삶 속에, 행복은 행복 속에, 희망은 희망 속에 존재하는 것임을, 그 마음 속에 존재하는 것임을 알았다. 두 번째의 섬살이가 가르쳐준 깨달음이라 할까. 그래서 이 번의 섬살이도 또 하나의 귀중한 그리움으로 남을 것 같다.

이제 다시 바다를 건너면 섬은 잊어도 좋을 것 같다. 저동항 촛대바위로 떠오르던 아침해도, 섬의 품으로 아장아장 기어 들것 같은 거북바위의 거북도, 조선해 바닷물이 좋아 깊숙이 코를 담그고 있는 코끼리바위도, 선녀 노닐던 삼선암도, 익숙한 고독의 몸짓으로 함초롬히 떠 있는 댓섬도 이제는 모두 잊어도 좋을 것 같다. 그리움은 그리움 속에 있는 것이니까. 섬은 섬에만 있는 것이 아니니까. 건너가는 곳 어디에도 섬은 있으니까.

섬에게서 잊혀져도 좋다. 내가 없어도 그 바다며 그 바위는, 그 아름다움은 그대로일 테니까. 내가 없어도 저동항 수평선 너머로 아침해는 떠오를 테니까. 행남등대 푸른 불빛은 언제나 먼바다를 비출 테니까. 명이며 부지깽이 나물은 잘 자랄 테니까. 그리고 내가 있건 없건 바다에 파도와 너울은 일 테니까. 섬살이는 늘 고독하고 고단할 테니까, 사랑도 있고 미움도 있을 테니까. 섬의 권력자들도 권력을 부리고, 시기와 음모도 여전히 꿈틀댈 테니까.

그러나 역시 섬은 '감성'이었다. 성인봉 오르는 길이 멀고 험해도, 저동항 해안 길의 난간이 파도에 휩쓸려 가도, 마가목 빨간 열매가 열리고 동백꽃이 붉게 피어나도, 고깃배가 뜨거나 못 떠도, 섬 그 가파른 비탈에 몸을 붙이고 살아도, 섬사람 인정이 아름답거나 야속해도 섬은 언제나 나에게 감성으로 다가왔다. 섬의 문화라는 것이 어설프고 척박하기 짝이 없는 것까지도 섬은 늘 감성으로 내 품을 파고들고, 나는 그 섬의 품에 안기어 들었다. 그 감성의 힘이 섬을 아름답게, 그립게 하는 것이다.

섬의 모든 것을 잊거나 섬에게서 잊혀져도 섬을 아름답게 했던 그 감성만은 잃고 싶지 않다. 그 끈을 놓고 싶지 않다. 그 감성만 잃지 않고 늘 간직할 수 있다면, 나는 영원히 섬사람이 될 수 있으리라. 영원히 나의 섬이 되리라. 어디에나 있는 나의 섬, 나의 그리움이 되리라. 바다 너머에 섬이 있는 한 나는 언제나 환한 걸음으로 바다를 건널 수 있으리라. 건너가리라.

그 감성만 내게 있어준다면-.♣(2008.6.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