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는울릉도

공모제 그리고 섬 살이 모놀로그 -여기는 울릉도·36

이청산 2008. 6. 11. 21:48

공모제 그리고 섬 살이 모놀로그

-여기는 울릉도·36



저의 섬살이도 이제 일 년 반이 가까워 가고 있군요. 길지 않은 세월이지만 실로 영욕이 무상했던 시간들이었습니다. 만약 손익계산서를 써 본다면 그래도 욕됨보다는 영화와 보람이 더 많은 것 같아 스스로 위안을 느낍니다. 저의 섬 정주(定住)를 시기하는 몇 섬사람들에 의해 제가 겪어야 했던 고단은 욕된 것이었지만, 그래도 제가 몸담은 학교의 내·외 모습이 날로 발전해 가고, 섬의 역사상 처음으로 문학 단체가 생겨 날 수 있게 했던 것은 저의 소중하고도 큰 보람이라 할 수 있습니다.

섬살이 일 년 반이면 섬을 떠날지 더 살지는 저의 선택의 문제입니다. 그 욕된 것에 대한 서운함을 생각하면 미련 없이 섬을 떠나고 싶기도 하지만, 제가 벌여 놓은 학교의 여러 가지 일들을 제가 마무리하고 싶고, 제가 만든 섬의 '문학회'도 좀더 발전시켜 놓고 싶은 마음은 떠나는 일을 쉽사리 결정할 수 없게 합니다. 저에게는 갈등스런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상부 기관에서 제가 섬에 더 머물 것이냐, 뭍으로 나올 것이냐를 묻는 전화가 왔더군요. 그 건 왜 묻느냐고 했더니, 제가 만약 뭍으로 나오겠다면, 우리 학교에 교장 공모제를 시행했으면 좋겠다는 것입니다. 저는 별 망설임 없이 "좋습니다! 그렇게 합시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첫째는 섬을 '더 살고 안 살고'의 갈등스런 판단을 남에게 맡기는 것이 저의 갈등을 줄이는 일이 될 것 같고, 둘째는 우리 학교가 좋아 '스스로 원하여' 오는 사람에게 제가 못 다한 뒷일을 맡기는 것도 괜찮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울릉문학회' 일이 걸리긴 하지만 제가 씨를 뿌려 놓고 나가면 섬사람들에 의해 꽃은 피어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또 한 가지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보다 우리 학교를 더 사랑하여 저의 학교 사랑과 섬 살이를 마음 편치 않게 생각했던 분이 있다면, 그래서 제가 섬을 떠나는 것을 계기로 우리 학교에 오고 싶어하는 분이 있다면, 우리 학교로 무혈 입성할 것이 아니라 학교 경영 비전을 밝히는 '학교경영계획서'를 제출하고 그것을 심사 받고서 오는 것도 학교 발전을 위해 나쁘지 않을 것 같군요. 공모지원서, 자기소개서, 학교경영계획서의 제출은 '교장 공모제'에서 요구하고 있는 사항이기 때문입니다. 학교에 대한 애틋한 사랑 때문에 드는 저의 생각입니다.

교장공모제를 시행하면 저의 어려움도 있을 수 있겠지요. 우리 학교에 '교장공모제'를 실시한다는 것은 제가 섬을 따나는 것을 기정 사실화하는 것이고, 제가 미처 섬을 떠나기도 전에 후임자가 결정되면, 섬을 떠나기까지의 시일 동안 학교 경영이 어려워질 수 있습니다. 말하자면 '레임덕(lame duck)' 현상이 우려된다 할까요. 그러나 학교가 무슨 권력 기관이라고, 교장에 무슨 대단한 권력이 있다고 그런 것까지 우려해야 할까요. 어차피 권력으로 학교 경영을 이루어가고 있는 것이 아닌 바에야 크게 염려할 일은 아닐 것이겠지요.

상부 기관의 지시와 저의 결정만으로 '교장 공모제'를 실시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학교 운영위원회의 동의를 얻어야 합니다. 운영위원회를 소집하여 제가 당장 섬을 떠난다는 말은 하지 않고, 제가 만약 섬을 떠날 경우에 우리 학교는 학교 발전을 위해 원하는 사람이 스스로 찾아와 학교를 경영할 수 있는 교장공모제를 시행하는 것이 좋겠다고 위원들에게 양해를 구했습니다. 위원들도 공감을 했습니다. 그들은 제가 언젠가는 학교와 섬을 떠나야 할 사람임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시행 시기는 지금 당장이 될 수도 있고, 내년이 될 수 있고, 매년 두 차례 있는 교장의 인사이동 시기에 맞추어 시행될 것이라 했습니다. 위원님들은 제가 이 학교를 떠나고 싶어 그런 생각하는 것이 아니냐며 펄쩍 뛰었습니다만. 이런 제도는 우리가 원하면 언제든지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기회가 주어질 때 시행하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설득했습니다.

우리 학교는 지금 '교장 공모제' 시행에 필요한 절차를 이행해 나가고 있습니다. 그 절차가 차질 없이 시행되고, 적절한 응모자가 있어서 저의 후임자가 결정되면 저는 미련 없이, 혹은 아쉬움을 뒤로 한 채 이 섬을 떠나야합니다. 그러나 만약 응모자가 없거나 적격자가 나타나지 않으면, 섬을 떠나고 머물고의 선택은 다시 저에게 돌아오게 되고 다시 갈등을 겪어야 합니다.

'미움'으로 마음을 채울 것인가, '아름다움'으로 마음을 채울 것인가? '미움'은 한 때 머물다가 사라질 감정이지만, '아름다움'은 영원히 마음을 편하고 곱게 해 줄 것입니다. '미움'을 택하여 덜컥 섬을 떠나 버리면, 지난 7년 전의 섬 살이를 내내 그리워하다가 다시 섬을 찾아왔듯, 또 섬을, 그 이름다움을 그리는 가슴앓이를 해야 할지도 모를 일입니다.

마음을 정리할 일입니다. 제 나이가 올해로 환갑입니다. 어떤 말을 들어도 귀가 순할 수 있다는 '이순(耳順)'의 나이입니다. 미운 것에도 너무 마음을 두지 않고, 아름다운 것에도 너무 여린 감성으로 대하지 않을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속 좁은 소인의 마음을 가지는 것도 부끄러운 일이고, 사춘기와 같은 감성을 이 나이까지 가지고 있는 것도 마음이 너무 자라지 못한 일이 될 것입니다. 떠나면 떠나서 좋고, 머물면 머물러서 좋은 그런 마음을 가질 일입니다. 그러면 오늘의 섬 살이를 언제 다시 돌이켜 보아도 내내 새기고 싶은 기억으로 남을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래요. 마음 고르기를 애쓰겠습니다. 망념과 집착을 버린 맑고 깨끗한 마음, 그 청정(淸淨)을 얻을 수 있기를, 그 마음이 될 수 있기를 애쓰겠습니다. 떠나도 그 마음으로 떠나고, 머물러도 그 마음으로 머물 수 있기를 애쓰겠습니다.

생애의 영원한 아름다움을 위하여,

그 아름다운 그리움을 위하여,

내 사랑 울릉도를 위하여-.♣(2008.6.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