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는울릉도

방파제 위의 풀꽃 -여기는 울릉도·39

이청산 2008. 7. 3. 22:37

방파제 위의 풀꽃

-여기는 울릉도·39



바람이 불고 비 내리는 절해 고도의 일요일은 참으로 고적하다. 문을 열면 잿빛 바다, 문을 닫으면 적막뿐이다. 바다에는 파도가 부서지고 방안에서는 적요가 파도 친다.

아, 비가 잦아든다. 부두에라도 가 봐야겠다. 비가 조금 흩뿌리기는 하지만 옷은 젖지 않겠다. 부두로 나갔다. 계선 말뚝에 묶인 배들은 하릴없이 물결 따라 흔들리고 있고 바람만 스쳐가고 있는 빈 물양장 지붕 슬래브에는 어업인들의 아우성이 파도 치고 있었다.

"울릉 어민 다 죽는다 정부지원 빨리 하라"

"금융이자 어찌 갚냐 정부에서 책임져라"

"비싼 기름 출어 포기 긴급 자금 지원하라"

"늘어간다 빚 덩어리 죽어간다 우리 어민"

어업인들의 절규를 담은 플래카드가 부두를 지나가는 바람결에 너울지며 나부꼈다. 고단한 바다살이를 호소하는 플래카드는 물양장 앞 게시판에도 걸려 있었다.

"전 어업인 다 죽는다 정부는 책임져라"

"저 넓은 바다 농토 내 죽으면 누가 짓나"

기름 값이 자꾸 오르는 바람에 고기를 잡으러 나갈 수가 없다는 것이다. 웬만큼 잡는다 해도 연료비를 제하고 나면 남는 게 없고, 잡히는 것도 예전 같지 않아 배를 가진 사람들은 빚만 자꾸 늘어간다는 것이다.

오징어가 부두에 보이지 않은지는 몇 달이나 되었고, 지금은 꽁치가 조금 잡히지만 그렇게 잡혀서는 도저히 먹고 살 수가 없어 어업인들은 다 굶어 죽을 판이라고 호소하고 있다. 화물연대가 파업을 하자 정부에서 화물차를 매입한다, 연료비를 보조한다는 둥의 대책을 세우면서 어업인들을 위해 대책은 왜 세워주지 않느냐는 볼멘소리다.

하늘에는 검은 구름이 잔뜩 끼어 있고, 바람은 일없이 부두에 빼곡이 메어져 있는 배를 흔들어댄다. 출어의 고동을 힘차게 울리며 바다로 나가 신나게 고기를 잡아 올려야 할 배들이 항구에 몸을 묶어 놓고 있다. 바람 따라 흔들리는 조상기며 집어등이 마치 촛불을 든 시위대 같다. 바다를 향해, 하늘을 향해 절규를 쏟아내고 있는 것 같다.

방파제 위를 걷는다. 아침저녁으로 걷는 산책길이다. 항구 들머리에 서 있는 등대를 돌아오면 반시간쯤 걸리는 길이다. 딱딱한 콘크리트길이지만 항구 마을 고즈넉한 풍경이며 광막하게 펼쳐진 바다를 바라보며 걷다보면 아늑하고도 시원스런 정감에 젖어 들게 된다. 먼바다를 바라보며 묵묵히 항구를 지키고 있는 촛대바위 아래로 파도가 쳐 오른다. 각돌 사이로 하얗게 부서진 파도는 다시 바다를 향해 밀려 나간다. 밀려 나간 파도는 이내 달려와 다시 바위를 때리고 갈라진 물보라 덩이가 방파제를 기어오를 듯 달려들기도 한다. 마치 어린아이가 어미 품을 달려드는 것 같기도 하고, 할말 많은 답답한 가슴을 가진 사람이 내 속 좀 보아라며 밀고 닥치는 것 같기도 하다.

방파제 끝자락 하얀 등대 저 멀리로 장군의 투구 같은 북저바위가 떠 있고, 커다란 꽃신 같은 죽도가 바다를 배경으로 은은한 풍경을 이루고 있다.

문득 걸음이 멈추게 하는 것, 방파제 콘크리트 틈새에 피어난 풀꽃 하나-. 흙 한 줌 없는 이런 곳에 이 풀꽃이 피어나다니, 놀랍고도 신비롭다. 먼지들이 허공을 떠다니다가 콘크리트 벌어진 틈새에 내려앉고, 풀씨 하나 허공을 날아다니다가 먼지 속에 떨어져 이렇게 싹을 틔우고 잎을 피워냈구나. 그 작은 씨앗에서 저 줄기며 잎을 송골송골 피워내다니! 자양으로 삼을 흙도 없는 저 콘크리트 틈새에서 노란 꽃망울까지 단 잎과 줄기를 피워내다니! 때로는 방파제를 걷는 사람의 발에 밟히기도 했을 것이면서 생명의 끈을 끈질기게 잡아 이 파란 것들을 피워내다니! 씨앗이 가지고 있는 생명 에너지가, 생명 현상이 경외스럽기까지 하다.

섬사람의 살아온 모습이 저와 같지 않을까. 지금부터 일백이십여 년 전, 씨앗이 이리 척박한 곳에 뿌리를 내리듯 섬사람들은 이 절해고도에 발을 내렸다. 섬의 역사가 아직도 물 속에 잠겨 있을 때였다. 비로소 섬에 개척령이 반포(1882)되고, 이규원(李奎遠) 검찰사가 섬을 살피고 간 뒤 개척민들이 섬에 들기 시작하면서 섬의 역사가 물 위로 오르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가풀막 외진 비탈에 밭을 일구고, 조그만 배 하나에 목숨을 걸면서 섬을 일구어나갔다. 그 때의 개척민들이 저 풀꽃의 씨앗 같지 않았을까. 뭍으로부터의 멀고먼 물길을 파도를 헤치고 배를 저어와 아무도 살지 않았던 곳에, 살기가 너무도 팍팍했던 곳에 발을 내려 뿌리를 꽂고 살아온 섬사람들의 모습이 바로 이 풀꽃의 모습이 아니었을까.

허공중의 풀씨처럼 섬에 발을 내린 개척민들은 이 콘크리트 틈새의 풀꽃처럼 섬을 살아오면서 파도를 막아 항구를 만들고, 길을 뚫어 차들이 달리게 하면서 끈질기게 섬을 지키고 살아왔다. 이 풀꽃 같은 사람들이 울릉도도 지키고 독도도 지키고 동해도 지켜냈다. 그러나 지금 섬사람들은 한숨을 쉬고 있다. 답답한 가슴을 뜯고 있다. 농사를 지어도 소득이 옛날 같지 않고, 출어를 해도 어황이 지난날 같지 않다. 게다가 기름 값은 나날이 치솟고 있으니, 살아나갈 방도를 찾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 나라의 도움 없이는 해결책이 없다는 것이다.

이따금 이슬비가 방파제 위에 내려앉고 있다. 방파제 위의 풀꽃에도 빗물이 내려앉는다. 이 빗물이 저 풀꽃의 마른 목을 적실까, 그리하여 꽃술 곱게 피어나게 할까. 저 풀꽃은 결코 마르지 않을 것이다. 콘크리트를 뚫고 피어난 저 풀꽃이 어찌 쉽사리 마를 것인가. 저 끈질긴 생명의 끈이 어찌 쉽사리 놓여질 수 있을 것인가. 풀꽃은 단단한 콘크리트 틈새에 더욱 굳센 뿌리를 내리고, 더욱 질긴 줄기를 세우며 바다를, 방파제를 항구를 지키고 있을 것이다. 고적하고 고단한 섬살이 속에서도 끈질기게 삶을 일구어 온 섬사람들처럼-.

바다는 하얀 파도를 일으키며 밀려왔다가 밀려 갈 뿐 말이 없다. 묵묵히 섬의 전설을 담고 있을 뿐 말이 없다. 묵묵히 섬을 지켜온 섬사람들처럼-.♣(2008.6.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