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산수필

손녀의 신기한 세상

이청산 2008. 2. 17. 16:50

손녀의 신기한 세상



승윤이는 제 어미의 등에 업혀 있다가 살포시 눈을 떴다. 승윤이는 이제 태어난 지 열일곱 달된 우리 손녀다.

'승윤아'하고 부르며 팔을 벌리니 저도 팔을 들며 어미의 등에서 빠져 나와 품에 덥석 안겼다.

"하부지, 이오!"

'이오'는 음료의 이름이다. 지난 초겨울 집안 혼사에 참석하기 위해 제 아비, 어미와 함께 할아비, 할미를 찾아왔었다. 그 때 제가 좋아한다는 이오를 사주었더니, 그 후로는 할아비 생각이 날 때마다 '하부지, 이오'를 함께 부른다는 것이다.

못 본 지 한 달 만에 다시 만난다. 서울에 출장길이 있어 아내와 함께 아들네 집을 찾았다. 아들 내외의 사는 모습이 보고 싶기도 했지만, 승윤이의 모습이 더욱 보고 싶었다. 아들은 출근하고 며느리가 승윤이와 함께 우리를 맞았다.

거실에는 동화책이며 장난감이 그득했다. 승윤이는 서가에 꽂힌 동화책들을 꺼내어 나에게 준다. 읽어달라는 뜻인가 싶어 펼치고 읽어주려니 다시 또 한 권을 뽑아준다. 이런 책을 보고 있노라며 자랑하는 것 같다.

"승윤이, 참 착하네, 이런 책도 다 읽고!"

칭찬을 해 주니 방긋 웃는다. 목마에 올라 몸을 앞뒤로 끄덕이기도 하고, 자동차에 올라 뛰뛰빵빵 경적을 울리며 운전도 하고 미끄럼틀에 올랐다가 주르르 미끄러지기도 한다. 제 어미가 '텔 미! 텔 미!' 노래를 하니 팔을 뒤로 한 채 몸을 흔들며 춤을 춘다. 그동안 어미와 함께 갈고 닦은 실력(?)을 유감없이 발휘하는 것이다.

제 혼자 장난감을 주물럭거리다가 방으로 들어가더니 건전지 두 알과 드라이버를 들고 나와 나게 준다. 그리고 자동차 모양의 장난감을 내민다. 무슨 뜻인가 싶어 의아해 하니, 제 어미가 통역을 해준다.

"제 아버지가 건전지 갈아주는 모습을 보고 그러는가 봐요."

아, 그렇구나. 장난감에 달린 스위치를 켜도 움직이지 않으니 건전지를 바꾸어 달라는 것이구나. 아직 말은 못해도 머리 속에서 생각은 다 하는 모양이다.

문득 대구 우리 집에 왔을 때의 한 달 전의 일이 생각난다. 소녀와 함께 거실에서 놀고 있는데, 화장지통에서 화장지 한 쪽을 빼어 와서는 내 얼굴 한 부분을 닦아주었다. 무엇이 묻었기에 닦으려는가 싶어 내가 문질러보니 아무 것도 없었다. 아니 점이 하나 있었다. 얼굴에 난 점이 저의 눈에는 뭐가 묻은 걸로 보였고, 처음 발견한 모양이다. 고 조그만 것이 할아비 얼굴을 닦아주는 품도 귀여웠지만, 그런 생각을 했다는 것이 신기하고 놀라워 박장대소로 칭찬해 주었다. 닦은 휴지는 쓰레기통으로 가져가서 얌전하게 버리기까지 했다.

서울에서의 이튿날, 승윤이와 함께 마트에 갔다. 유아용 가트에 태우니 한사코 걷겠다고 한다. 상품 진열대로 뛰어 가더니, 진열된 물건을 쓰다듬기도 하고, 찔러보기도 하며 하나하나 다 만져 본다. 제 어미는 제 아이의 행동을 말리려 했지만, 물건을 상하게 하지 않으면 두고 보라고 했다.

문득 갑자기 유치환의 '아기'라는 시가 생각이 났다.

 

 아기야, 너는 어디서 온 나그네냐? 보는 것, 듣는 것, 만 가지가 신기롭고 이상하기만 하여 그같이 연거푸 물음을 쏟뜨리는 너는,----몇 살이지?----네 살? 어쩌면 네가 떠나 온 그 나라에선 네가 집 나간 지 나흘째밖에 아닌지 모르겠구나!

 

승윤이가 만약에 네 살쯤 되어 말을 잘 할 수 있다면, 얼마나 많은 물음을 쏟아 놓을까. 태어난 지 한 해 남짓한 시간이 흘렀지만, 만물의 모습과 소리가 제 눈과 귀에 들기 시작한 것은 불과 얼마 되지 않을 것이다. 지금 보는 거의 모든 것이 저에게는 처음 보고, 듣는 것일 터인데, 그 모든 것이 얼마나 신기하고 이상할까. 말을 못하니 만져보면서 촉감으로라도 느껴보고 싶을 것이다. 이 세상을 제 것으로 느껴보고 싶어 하는 저 모습이 얼마나 대견하고도 기특한 모습인가. 그렇게 세상을 탐구하고 이치를 캐보려는 마음이 세 살, 네 살 아니 스물, 서른이 될 때까지라도 이어져서 세상의 일을 잘 알아 지혜롭게 살 수 있는 사람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간절했다.

집으로 돌아와 책상 위의 책꽂이에 보니 켄 블렌차드의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라는 책이 꽂혀 있었다. 제 어미에게 읽어보았느냐 물으니 읽었다고 했다. 샴이라는 돌고래의 조련 과정을 통하여 인간의 능력 개발과 인간관계의 개선에 대해 이야기한 책이다. 그 책에 '고래 반응'이란 말이 나오는데, 그것은 '잘 한 것'을 알아보고 즉각적으로 적절하게 칭찬하면 3톤이 넘는 고래도 신나게 춤을 출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잘 못한 것'은 가능한 한 빨리 정확하게, 책망하지 않으면서 설명해 주어야 하는데, 그것을 '전환 반응'이라고 했다. 책에서 읽은 것처럼 승윤이에게도 그렇게 해 주라 그랬더니, 그리 애를 쓰고 있다고 했다.

아들네 집을 떠나올 때 승윤이는 아주 평화로운 새근새근 자고 있었다. 제 어미가 깨우려는 것을 그냥 두라고 했다. 고운 꿈에 젖어 있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아름다운 꿈 많이 꾸고 무럭무럭 튼튼히 자라기를 빌며, 저의 꿈도 잘 실현하고 남의 꿈도 잘 보듬어 줄 수 있는 사람으로 자라나기를 빌며 아들네 집을 나왔다.

뒤에서 승윤이의 소리가 뒤따라오는 듯했다.

"하부지, 이오! 빠이빠이!"♣(2008.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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