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산수필

노객의 충고

이청산 2007. 3. 23. 11:53

노객의 충고



새벽 6시, 집을 나선다. 촛대비위가 미명의 바다를 향해 기지개를 켜고 있다. 수평선 한 점에 발그레한 빛이 돌기 시작한다. 봉래폭포를 향하여 오른다. 저동천을 따라 오르막길을 을 올라간다. 새벽 물소리가 청아하다. 모든 길이 산에서 나오는 섬 길은 거의가 가파른 비탈길이다. 폭포로 향하는 길도 무릎이 팍팍할 정도로 경사가 심하다. 섬에 온 이후 새벽마다 등행을 하다가 보니 아침 운동을 나온 동네 사람들과 만나서 서로 인사를 주고받게도 되었다.

어제 아침엔 제법 많은 눈이 내렸다. 눈이 해풍에 휘날렸다. 동네에 내리는 눈은 이내 녹아버리더니 오를수록 길을 깊이 덮었다. 매일 만나는 어떤 이가 눈 속에서 걸어 내려왔다. 일찌감치 폭포까지 갔다가 내려오는 모양이다.

"대단하십니다. 이런 날 올라오시는 분은 선생님뿐이시군요."

"어르신도 대단하십니다. 저보다도 일찍 다녀오시네요."

그는 눈이 오나 비가 오나 하루도 거르지 않고 올라온다며, 내일 또 만나자면서 손을 흔들고 눈발 속을 총총히 내려갔다. 나이는 좀 되어 보임 직한데, 걸음걸이에는 힘이 있고 자세도 꼿꼿했다.

폭포 매표소 입구에 닿을 무렵 햇빛이 훤하게 비쳐왔다. 그가 내려오고 있었다.

"안녕하십니까?" 거의 동시에 인사를 나누었다.

"울릉도에는 언제 오셨습니까?"

"두어 주일 지났습니다." 그는 반가운 표정을 지으며 웃었다.

"반갑습니다. 우리 매일 만납시다. 저는 삼십 년 넘게 이 길을 올랐지요……"

나이가 칠십이라고 했다. 내 나이보다 더 들어 보이지도 않는데 칠십이라니, 놀라웠다. 말을 이어가는 목소리가 분명하면서도 부드러웠다.

"한 말씀 드려도 되겠습니까? 걸을 때는 말이지요, 턱은 당기면서 멀리를 보세요. 그리고 숨을 쉴 때, 세 걸음을 들이쉬고 한 걸음을 내쉬는 게 좋아요…….

그러면 허리도 꼿꼿해지고, 폐활량도 커진다는 것이다. 그리고 스트레칭을 하는 법까지도 친절하게 일러주었다. 그 분의 말속에서 정성이 묻어 나오는 듯했다.

며칠을 마주치면서 본 나의 걸음걸이가 불안하게 보였던 모양이다. 그러고 보니 나는 늘 땅을 보면서 뒷짐을 지고 걸었다. 적당히 걷기만 하면, 그래서 등판에 땀이 돋기만 하면 운동이 될 것이라 생각했다. 땀을 흘린 게 기분이 좋아서 산을 다녀오면 즐거워했다. 섬으로 오기 전, 나는 매일 미친 듯이 마성의 주지봉을 올랐었다. 하루라도 오르지 않으면 온몸이 가려워지는 것 같은 일종의 금단증상을 느끼기도 했었다. 그렇게 산을 오르는 것으로 내 몸은 충분한 운동감에 젖을 수 있는 것으로 알았다.

나는 매사를 그렇게 살아온 것 같다. 내가 생각하는 대로, 그것이 최선의 길이라 여기며, 그렇게 사는 것이 나름의 성실이라 믿으며 살아왔다. 그래서 주어진 일을 꾸벅꾸벅해 낼 수도 있었지만, 시행착오도 많이 했다. 무슨 일을 나대로는 열심히 하는 것 같아도, 남이 볼 때는 어설프기도 하고 불안해 보이기도 했을 것이다.

칠십 노객의 충고는 몽롱한 잠을 일깨우는 청량한 경종으로 울려왔다. 그 분은 평생 섬을 살면서 평탄치 못한 섬 길을 그렇게 바르고 꼿꼿한 자세로 걸으며 섬 살이의 고단을 이겨내었는지도 모른다. 그 분의 말씀은 이제 다시 섬 길을 걷기로 한 내 삶의 한 빛살이 되어 가슴속을 파고드는 것 같았다.

"고맙습니다. 명심하고 멀리 보면서 걷도록 하겠습니다."

"실례했다면 용서하세요."

그리고 그는 손을 흔들며 내려갔다. 아닙니다. 오늘 참으로 좋은 말씀을 들었습니다. 감사합니다. 내려가는 등뒤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내일 아침에 만나면 내 이름을 말하고 정중하게 다시 인사를 드려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분이 말한 대로 세 걸음을 들이쉬고 한 걸음을 내 쉬며 저 멀리 하얗게 눈 덮인 성인봉을 바라보며 남은 길을 올랐다.♣(2007.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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