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산수필

아버지를 위한 작은 선물

이청산 2007. 11. 27. 14:58

아버지를 위한 작은 선물



회의가 진행되고 있는 중에 평소 잘 알고 지내던 ㅇ 일보 ㅈ 기자로부터 전화가 왔다.

"선생님, 학교 학생 중에 아주 훌륭한 학생이 있더군요. 좋은 뉴스입니다."

"무슨 좋은……?"

"간질환을 앓고 있는 아버지를 위해서……"

금시초문이었다. 바깥에서 먼저 아는데 내가 모르고 있다니, 너무나 민망한 일이었다.

뭍으로의 출장을 위해 어제 울릉도를 출발하여 배를 탈 때까지도 전혀 듣지 못한 일이다. 선생님들은 알고 있었을까. 알고 있으면서도 나에게 이야기를 하지 않은 것일까? 내가 너무 소홀하게 학교 일을 처리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자책감과 자괴감이 함께 엉겼다.

그 선행을 굳이 남들에게 알리고 싶지 않았던 그 학생과 부모님들의 마음 때문은 아니었을까. 학교로 전화를 하니 담임선생님도 그 일의 전말은 명확하게 파악하고 있지는 못했다. 입원 중인 아버지의 간병 때문에 중간고사를 친 이후에 학교에 나오지 못했다는 정도만 알고 있었다. ㅈ 기자는 보도를 위해 필요하다며 그 학생의 사진을 한 장 보내달라고 요청했다.

 

ㅅ 군의 아버지가 평소 앓아오던 황달 증세가 갑자기 위중해져 어머니와 함께 황급히 배를 타고 육지로 나갔다. 어느 대학병원에 입원하여 검진을 받으니 간경변 3기로 간 기능이 이미 90% 정도가 손상되어, 치료를 위해서는 다른 사람의 간을 이식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청천벽력 같은 진단이었다. 아버지의 병세가 그토록 악화되어 있는 것도 충격적인 일이지만, 누구의 간을 이식한단 말인가. 아버지의 병세는 점점 깊어만 가고 온 가족은 걱정과 불안에 휩싸였다.

ㅅ 군은 아버지의 활짝 웃는 모습이 떠올랐다. 잘못을 저질렀을 때는 무섭게 꾸중도 하지만, 장난도 같이 치고 운동도 함께 하던 모습이 생각났다. 아버지가 없는 세상은 상상할 수도 없었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계시는 서울의 병원을 향하여 달려갔다.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서 버스며 기차를 타고 달려가는 동안 ㅅ 군의 머리 속에는 오직 아버지뿐이었다.

"아버지, 제가 달려갑니다. 아버지에게 선물을 드리러 갑니다. 여태껏 아버지는 저희들을 위해서 많은 것을 해주셨잖아요. 이제는 제가 드릴 차례예요, 아버지!"

병원에 이르렀다. 아버지는 극심한 고통에 시달리며 숨쉬기조차 힘들어하고 있었다. 아들이 왔다며 손을 잡았지만, 겨우 눈을 떠볼 뿐이었다. 어머니는 눈물을 감추기에 애를 썼다. 의사에게 달려갔다. 자기의 간을 이식할 수 있게 해 달라고 간청했다.

가급적이면 가족 중 누구의 것을 이식하면 의학적으로도, 윤리적으로도 좋은 일이 될 수 있으리라 판단한 의사는, 이식을 하기 위해서 조직 검사부터 해보자고 했다. 여러 가지 검사를 거친 끝에 이식 적합 판정이 내렸다. 어머니와 다른 가족들은 한창 성장해야 할 ㅅ 군의 건강을 염려하여 만류했다. 삼촌들과 고모들도 서로 이식하겠다고 나섰지만, ㅅ 군은 어떠한 경우가 있더라도 꼭 자기의 것을 아버지에 드리고 싶었다.

문제가 생겼다. 의료법상으로 만 16세 이전에는 시술을 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 때를 기다리려면 한 달 가까이 지나야 한다. 아버지의 병세를 보면 하루를 넘기기도 어려운데, 그 긴 시간을 어떻게 기다려야 할지 막막하고 아득했다. 그보다 더 절망적인 것은 병원 측에서, 막상 법정 연령이 되었다고 해도 성장기의 청소년을 대상으로 이식 시술을 하는 것에 난색을 보였다. 법정 연령을 겨우 채워 이식을 실행한다면 ㅅ 군은 최연소 장기 제공자로 기록이 된다. 병원 측에서는 사회적인 이목에도 부담을 느끼는 것 같았다.

"선생님! 저는 운동도 잘하고 아주 건강합니다. 그리고 얼마든지 회복할 자신이 있습니다. 꼭 아버지께 드릴 수 있도록 해주십시오."

ㅅ 군은 의사선생님께 매달리다시피 하며 사정을 했다. 생일인 10월17일을 기다리기가 너무나 초조하고 불안했다. 아버지의 병세는 날로 위중해지고, 의료진에서 어떤 결정을 내릴지도 알 수 없어 더욱 초조했다.

"ㅅ 군의 정성에 감동했습니다. 어린 학생이 참 기특하군요. 시술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의사 선생님이 ㅅ 군의 손을 잡고 말했다.

생일이 하루 지난 10월18일, 아버지와 함께 나란히 수술대에 올랐다. 그리고 두 부자는 깊은 잠에 빠졌다. 시간도 공간도 그들에게서 멀리 떠나버렸다. 눈을 떴을 때는 수술을 시작한 한 지 반 하루쯤이 흐른 뒤였다. 병실로 나왔을 때, 눈물과 미소로 범벅이 된 어머니의 얼굴이 망막 속에 흐릿하게 들어왔다.

"수술은 아주 잘 되었대. 많이 아프지?"

"아버지는요?

옆에 누워 있던 아버지가 어렵게 팔을 움직여 손을 뻗쳐왔다. ㅅ 군의 손을 꼭 잡았다. ㅅ 군은 무사한 아버지가 너무나 고마웠다.

 

가끔씩 부모에게 장기를 기증한 아들, 딸 들의 이야기가 가끔씩 뉴스를 장식할 때가 있다. 대입 수능을 앞두거나 포기를 하면서, 심지어는 올림픽 대표 선발전 출전을 포기하면서 아버지에게 간을 이식한 아들과 딸 들, 역시 간이식으로 효를 실천한 어느 해병대원의 이야기, 아버지에게 간을 이식하기로 했지만 수술비가 없어 애를 태워야 했던 어느 여고생의 사연, 상금과 함께 효행대상을 받은 어느 여가수가 그 상금을 아버지에게 간을 이식한 어느 고등학생에게 쾌척한 이야기…….

정치인들의 싸움질 모습 아니면, 사기와 폭력 사건으로 얼룩진 신문 기사들의 틈새에 끼어 있는 그 이야기들을 만날 때면 한파 몰아치는 겨울날 발갛게 피는 잉걸불을 만난 듯, 폭염 내리쬐는 여름날 깊은 계곡 석간수를 만난 듯 참으로 따뜻하고도 청량했다.

자신의 장기를 아낌없이 어버이에게 바치는 아들, 딸 들의 일은 물론 지극한 효성에서 비롯된 것이겠지만, '효도'라는 윤리적, 규범적인 의식만으로 이루어질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인간에 대한 사랑과 신뢰가 없이는 행해질 수 없는 일이다. 그 아들, 딸 들이 병든 아버지를 위하여 장기를 내 놓을 때, 부모에게 효도를 한다는 생각보다는 자식을 사랑해 주시는 아버지, 가정을 굳건히 지켜주시는 아버지의 모습을 먼저 떠 올렸을 것이다. 그 사랑이 더 큰 사랑을 낳게 하는 것이다. 아내가 남편을 위해, 남편이 아내를 위해, 혹은 아껴주고 싶은 연인을 위해 장기를 받친 이야기도 간혹 들린다. 그것은 오직 사랑일 뿐이다. 사랑으로 주고 사랑으로 받을 뿐이다.

 

ㅅ 군의 아버지를 간병하고 있는 어머니에게 전화로 문병의 인사를 드렸다. 아버지는 나날이 호전되고 있는데 회복 속도도 매우 빠르다며 기뻐했다. 모두가 사랑의 힘일 것이다. 수술을 성공적으로 해 낸 일을 축하드렸다.

"……사랑의 꽃이 활짝 핀 것 같습니다. 평소에 아이들에게 사랑을 많이 주셨기 때문이겠지요."

"저희들은 자식을 위해서 아무 것도 한 것이 없습니다……." 오히려 송구스럽다고 했다.

ㅅ 군은 건강한 모습으로 학교로 돌아왔다. 참 장한 일을 해내었다고 칭찬했더니 '아버지에게 드린 작은 선물'일 뿐이라며 겸연쩍어 했다. 아버지께서 어서 빨리 회복되어 온 가족이 예전처럼 건강하고 즐겁게 지낼 수 있으면 좋겠다고도 했다. ㅅ 군의 얼굴이 참 맑고 편안해 보였다.

잦은 강풍주의보로 하얀 갈퀴를 세우며 부서지기만 하던 저동항 앞 바다가 오늘은 거울처럼 맑고 푸르러 효녀의 전설을 간직한 촛대바위 그림자만 묵묵히 담고 있다. 잔잔해진 바람 결 따라 언덕 위의 동백꽃이 한껏 붉은 빛깔로 송이를 벌었다.

기자들이 ㅅ 군을 만나러 왔다. ㅅ 군은 저 동백꽃보다 더 붉게 얼굴을 물들여야 할 것 같다.

"아버지를 위한 작은 선물일 뿐인데……."♣(2007.1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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