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는울릉도

어둠 속의 연주회 -여기는 울릉도·28

이청산 2007. 12. 24. 14:01

어둠 속의 연주회

-여기는 울릉도·28



이름은 '독도해오름합창단'. 노래하는 사람도, 지휘하는 사람도, 반주하는 사람도 모두 섬사람들이었다. 주부도 있고, 공무원도 있고, 장사하는 사람도 있고, 농사짓는 사람도 있었다. 섬 살이 틈틈이 모여 화음을 가다듬었다. 음악을 전문적으로 공부하지는 않았을지라도, 음악을 좋아하고 노래를 사랑하여 모인 사람들이다. 지난해 창단하여 두 번째 연주회를 갖는다고 한다. 한 해가 다 저물어 가는 십이월 중순의 어느 날, 넓지 않은 군민회관에 사람들이 모였다. 자리를 다 채우지는 못했지만 노래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소담스레 모여 앉았다.

단장의 합창단 소개, 회장의 인사, 군수의 축사에 이어 연주회가 시작되었다. 남성 단원은 검은색 양복을 입고, 여성 단원들은 흰 블라우스에 검은 치마를 갖추어 입었다. 단복은 각자가 마련한 듯 한결 같지는 않았지만, 노래를 부를 때는 여러 성부의 소리들이 하나로 화음을 이루면서 고운 선율을 자아냈다. 훨훨 날아요, 나의 노래, 언덕 위의 집, 매기의 추억 등 주옥같은 외국 곡들로 프롤로그를 장식했다. 무대가 낡고 좁아 보면대와 지휘대를 세우기도 노래를 부르고 지휘를 하기에도 여간 불편하지 않았지만, 노래를 부르는 사람들도 지휘자도 그리고 청중들도 너무나 진지했다. 이런 연주회를 잘 보고 들을 수 없는 섬사람들에게는 저들의 목소리 하나 하나, 동작 하나 하나가 신기하기만 했다. 개여울, 기다림, 푸른 열매 등 귀에 익은 우리나라의 노래들을 부를 때는 청중들은 가락에 맞추어 손뼉을 치기도 했다. 많은 학생 청중 들을 위하여 나뭇잎 배, 고향 땅, 퐁당퐁당, 과수원 길 등의 동요를 연주할 때는 엄숙한 연주복을 벗고 가벼운 일상복으로 갈아입고 재미있는 동작으로 청중과 호흡을 맞추었다. 아이들은 함성을 지르며 함께 따라 부르기도 했다.

그 연주 틈틈이 색소폰 연주단을 초청하여 신나는 음악을 연주하기도 했다. 그 연주단도  중학교 교장선생님, 군청의 과장님, 선생님, 공무원, 자영업자 등의 섬사람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색소폰 연주에 특기를 가진 어느 중학교 기술선생님이 연주에 관심 있는 사람들을 모아 여가 시간을 이용하여 솜씨를 갈고 닦았다고 한다. 에델바이스, 진주조개잡이, 홀로 아리랑, 내일은 해가 뜬다 등 듣는 사람들에게도 익숙한 노래들을 신나게 연주했다. 곡이 끝날 때마다 청중들은 환호도 하면서 아낌없는 박수를 보냈다. 감미롭고도 신명이 나는 색소폰 소리로 잠시나마 이 절해고도의 고적감을 벗어날 수 있다는 것이 즐거웠던 것일까.

동요 합창 순서에 이어 색소폰 솔로 연주 순서가 되었다. 연주자가 나와 반주 음악에 맞추어 '오 데니보이'를 연주하기 시작했다. 소프라노 색소폰의 맑고도 부드러운 소리가 장내를 압도해 나갔다. 청아한 고음으로 클라이맥스를 올라가면서 청중들은 넋을 잃듯 소리에 몰입되어 가고 있었는데, 갑자기 엄청난 암흑이 모든 것을 덮어 버렸다. 개석에서는 비명이 폭발했다. 정전이 된 것이다.

"여러분, 전기가 곧 올 것입니다. 전기가 오는 대로 연주회를 계속 진행하겠습니다. 진정해 주십시오. 진정해 주십시오!" 사회자가 청중을 향하여 호소하듯 외쳤다. 그러나 전기는 오지 않았다.

청중들은 자리를 떨치고 일어서는 대신에 핸드폰을 모두 꺼내들어 무대를 향하여 흔들었다. 그리고 앙코르를 연호했다. 객석과 무대의 모습이 희미하게나마 드러났다. 난처한 모습으로 무대에 서 있던 연주자가 어둠 속의 객석을 향하여 말했다.

"예, 감사합니다. 지금 악보도 볼 수 없고 반주도 없지만, 여러분들의 성원에 보답하기 위해서 제가 평소 즐겨 불던 노래 하나 들려 드리겠습니다."

연주자는 부드럽고도 구성진 가락의 노래를 열심히 연주해 나갔다. 소리는 어둠을 뚫고 객석 구석구석을 파고들었다. 연주곡은 비틀즈의 '예스터데이'였다. 연주가 끝나자 청중들은 장내가 터져 나갈 듯한 폭발적인 박수를 치며, 다시 앙코르를 외쳐댔다. 다시 무대에 선 연주자는 엘비스 프레슬리의 '사랑에 취해'를 연주하기 시작했다. 청중들의 어둠 속의 색소폰 소리에 취하고 있었다.

테너 솔로 순서가 되었다. 연주자와 피아노 반주자가 나와 어둠에 묻힌 객석을 향해 인사를 하고, 반주자가 피아노 앞에 앉았다. 단원 중의 한 사람이 핸드폰 플래시로 악보를 비추었다. 연주자는 객석에서 비치는 핸드폰 불빛을 받으며 반주에 맞추어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순서대로 두 곡을 부르고 퇴장할 때 객석에서 큰 박수 소리가 터졌다.

마지막 합창 순서. 합창단들이 무대로 등장하는데, 손에는 모두 촛불 하나씩을 들었다. 순서를 기다리고 있는 사이에 급히 초를 구해 온 모양이다. 보면대 앞에 선 단원들은 촛불로 악보를 비추며 화음을 맞추어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옛 시인의 노래', '떠나가는 배' 등을 부르는데, 촛불이 성스럽고도 감미로운 느낌을 더해 주었다. 노래가 한층 정감에 젖어드는 것 같았다. 청중들은 모두 숨을 멈춘 듯 객석은 고요하기만 했다. 노래와 촛불이 어울려 이루어 내는 이색적인 분위기에 도취한 것 같았다. 합창이 끝나갈 무렵 갑자기 장내가 환하게 밝혀졌다. 전기가 들어온 것이 아니었다. 소방대에서 출동하여 비상 라이트로 실내를 밝힌 것이다. 합창이 끝나자 청중들은 더욱 우렁찬 박수를 쳤다.

모든 순서가 끝날 때까지도 한 번 가버린 전기는 끝내 다시 오지 않았다. 어둠 속의 연주회가 끝나고, 객석을 매웠던 청중들은 소방대의 비상 불빛을 받으며 군민회관을 떠나야 했다. 그러나 그들은 연주회의 감미로움에, 그 즐거움에 취한 탓이었을까. '군민회관'이라는 곳에 비상 발전기가 없는 것을 탓하지도 않았고, 열악한 섬의 전기 사정도 원망하지 않았다.

어둠 속에서 연주회가 진행될 때 자리를 일어서는 사람도, 객석을 떠나는 사람도 없었다. 섬 살이의 고적과 고단을, 그 험한 파도를 달래려 한 것이었을까. 청중들은 어둠 속의 연주자를 향하여 환호를 하고 앙코르를 외쳤다. 그 환호가 어둠 속에서도 연주가 계속될 수 있게 했다. 그 힘이 섬 살이의 험한 풍랑과 파도를 이겨낼 수 있게 했다.

울릉도는 애초에 어둠이었다. 125년 전 개척사 이규원이 처음으로 섬을 두드렸다. 그리고 개척민들이 들어와 섬을 일으켰다. 비로소 섬의 역사가 깊은 바다 속으로부터 수면 위로 떠올랐다. 험난한 물결을 눌러 뱃길을 트고, 험준한 산자락을 갈아 삶의 터전을 닦아 오늘에 이르렀다. 오늘은 어둠 속의 연주회를 지킨 그 청중들이 개척민이었다. 지난날의 개척민이 섬을 일으켜 오늘에 이르게 했듯, 오늘은 그들이 칠흑의 어둠 속에서도 그 감미로웠던 연주회를 무사히 끝나게 했다. 그리하여 섬에 아름다운 기억 하나를, 새로운 역사 하나를  간직할 수 있게 했다.

어둠 속의 연주회, 그것은 또 하나의 섬 개척사가 되었다.♣(2007.1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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