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는울릉도

섬·대설주의보 -여기는 울릉도·29

이청산 2008. 1. 18. 12:46

섬·대설주의보

-여기는 울릉도·29



탈출하듯이 육지를 떠나왔다. 배는 포항에서 10시에 섬을 향해 떠나는데, 출항 여부는 7시 이후에 결정 난다고 했다. 대구에서 늦어도 7시 반 버스는 타야 포항의 여객선터미널에 당도하여 섬으로 가는 배를 탈 수 있다. 출항 여부를 알고서 출발하면 버스를 탈 시간이 늦다. 일찌감치 집을 나서면서 터미널로 계속 전화를 했다.

풍랑주의보와 대설주의보가 함께 내려져 있는 섬에는 며칠째 배가 끊겨 갈 사람도 가지 못하고 올 사람도 오지 못한 채 발만 구르고 있다. 지금 섬은 온통 아우성이겠다. 희한한 설경이 주는 감탄의 아우성을 지르기도 하겠지만, 오고 가야할 발길과 물자가 끊겨져버린 그 절망의 아우성이 섬을 아프게 찌르고 있겠다.

어제는 배가 뜰 것이라는 예보를 믿고 포항을 향하여 달리다가 중도에서 예보가 바뀐 것을 알고 경주에서 되돌아오기도 했다. 앉아야 할 자리에 앉아 있어야 몸도 마음도 제 자리를 찾는 법, 오늘은 가야 하리, 꼭 가야하리-. 오늘은 배가 뜬다는 예보를 믿으면서도 기도하는 마음을 놓지 않고 포항을 향해 달렸다. 포항에 당도하여 바쁘게 택시로 갈아타고 여객선터미널로 향한다. 터미널엔 섬을 향해 가는 사람들로 만원을 이루고 있었다. 모두가 섬으로의 길이 트이기를 애타게 기다리던 사람들일 것이다.

배는 출발하자마자 파도는 숱한 군졸을 거느리고 배를 향해 달려들고 있었다. 그 공격을 따라 배는 요동치기 시작했다. 멋모른 관광객들은 요동이 호사스러운 듯 쾌재를 부르다가 이내 선실 바닥에 곤두박질치며 토악질을 해댄다. 요란한 파열음과 함께 배의 요동은 그칠 줄 모르고 승선객들은 패전 병사처럼 쓰러져갔다. 다시 기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요동을 쳐도 좋습니다. 멀미가 오장육부를 뒤집어 놓아도 좋습니다. 회항은 말아주소서, 회항만은 말아주소서. 평소보다 한 시간 가까이 더 걸린 네 시간의 항해 끝에, 다행히 회항하지 않고 섬에 당도하였다. 섬에서 다시 육지로의 출항 시간이 임박할 무렵이었다.

섬에도 치열한 엑소더스(Exodus)가 펼쳐지고 있었다. 내일을 알 수 없는 섬의 날씨. 이 배를 놓치면 또 언제 탈 수 있으랴. 들어오는 사람과 나가는 사람의 임무 교대는커녕 악수조차 제대로 나눌 경황이 없었다. 방학이라고 학교를 통 비울 수는 없어 날짜를 나누어 학교를 지키는데, 배가 뜨지 않으니 나갈 사람도 들어와야 할 사람도 하릴없이 속만 태우기란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다. 강력한 흡인력으로 섬의 사람들을 빨아들인 배는 다시 수많은 군졸들의 공격을 받으며 육지를 향해 미끄러져 갔다.

그랬다. 섬의 날씨는 내일을 알 수 없는 것이었다. 겨우 하루 사람들을 오가게 해 놓고는 다시 뱃길을 끊어놓았다. 눈이 내리고 있다. 모처럼 배가 왔다간 다음 날 아침 눈은 벌써 발목을 잠기게 했다. 백색의 가루를 쉴새없이 내리 붓고 있다. 다시 바다에는 풍랑주의보가 내리고 섬에는 대설주의보가 발효되었다. 대설주의보의 눈은 지금 사람들의 발목을 잠그고 있다. 무릎을 묻고 있다.

 

해일처럼 굽이치는 백색의 산들

……

외딴 두메마을 길 끊어 놓을 듯

은하수가 펑펑 쏟아져 날아오듯 덤벼드는 눈,

다투어 몰려오는 힘찬 눈보라의 군단,

눈보라가 내리는 백색의 계엄령.

                          -최승호, '대설주의보'

 

누구는 이 시인의 '대설주의보'를 '분쟁과 투쟁, 공권력 투입, 계엄령으로 점철됐던 시대 상황에 대한 알레고리'(정끝별, 조선일보 2008.1.15)라 했던가. 아니다. 섬사람들의 고단한 삶에 대한 공권력 투입이요, 백색 계엄령의 발효다. 누가 육지 어디에서 이토록 몰아치는 눈을 본 적 있는가. 한때 산과 들에 흰 가루를 뿌리다가 이내 잦아드는, 잠시 도회지의 포도를 달리는 차들을 기어가게 하다가 곧장 녹아 내리는 뭍의 눈에 비할 바가 아니다. 섬에는 겨울이면 눈 속에 굴을 뚫어 이웃과 교통한다는 전설 같은 이야기가 있다.* 조금만 더 내리면 그 전설이 현실로 살아날 것 같다. 지금 섬에 제 모습 보이는 것은 파도 부서지는 바다뿐, 온 천지가 눈의 해일에 잠겨 있다. 테트라포트를 거칠게 공습한 파도는 방파제를 넘어오고, 쇠말뚝에 묶인 고깃배는 하얀 눈을 뒤집어 쓴 채 휘몰아치는 눈보라에 집어등을 파르르 흔들며 몸을 떨고 있다. 어화 꺼진 칠흑의 밤바다에는 암울한 파도만 갈라지고 등대만 호젓한 몸짓으로 차가운 불빛을 내쏘고 있다. 눈 내리는 날이면 섬사람들은 등산화를 졸라 신는다. 가풀막 심한 섬의 눈길이란 마치 곡예를 하듯 걸어야 한다. 차들도 바퀴에 쇠사슬을 졸라 메지 않으면 안 된다. 저 태하령이며 사동재는 이제 터널이 뚫려 다행이라 할지라도, 북쪽으로 가는 현포령은 어찌 넘을까. 그 재 못 넘으면 섬도 남북이 갈라진다. 건조대에서 말라가던 오징어는 어찌할 것인가. 눈을 이불처럼 쓰고 차가운 날을 이겨낼 수밖에 없다. 더 큰 걱정이 있다. 이 풍랑과 눈 때문에 배가 뭍을 오가지 못한다면 먹고 입는 것은 어찌할 것인가. 거의 모든 것을 육지에서 가져다 써야 하는데, 툭하면 끊어지는 겨울 뱃길은 계엄령 내린 도시의 거리에 날리는 투석과 총성보다 더 무섭다. 더 우울하다. 눈 내린 섬은 그야말로 눈보라 군단이 만들어 내는 백색의 공포요, 백색의 감옥이다.

그러나 눈 내린 섬에 절망만 있는 것은 아니다. 경이도 있고 감탄도 있다. '생활이 그대를 속이더라도/ 슬퍼하거나 노하지 말라./ 슬픔의 날엔 마음 가다듬고/자신을 믿으라' 했던가. 이토록 많은 눈이 내린 만큼 이만한 설경을 또 어디서 볼 수 있단 말인가. 그 '백색의 공포'와 '백색의 감옥'을 마음을 조금 가다듬고 보면 온 세상이 꽃이다. 눈 부시는 은빛의 만발한 꽃 세상이다. 풀도 꽃이고 나무도 꽃이다. 산봉우리도 꽃이고 골짜기도 꽃이다. 바닷가를 지키고 있는 바위도 꽃이고 항구에 정박해 있는 배도 꽃이다. 가풀막으로 흘러내리는 섬 길도 꽃이고, 비탈에 옹기종기 몸 붙이고 사는 섬 집들도 꽃이다. 깊이 쌓인 눈만큼이나 깊고도 그윽한 설경이 섬사람들의 고단한 마음을 그나마 달래고 있다.

지금 섬에서는 나리분지에서 벌어질 첫 눈꽃축제 준비에 한창이다. 눈 조각 경연대회, 대형 눈 조형물과 눈집(이글루)만들기, 스노우 슬라이딩, 스노우 레프팅, 아이스 볼링, 눈썰매대회, 이글루 카페 등 다채로운 프로그램으로 관광객들을 맞이할 것이라 한다. 지난해에도 눈꽃축제를 하겠다고 갖은 준비를 다했지만 눈이 제 때에 오지 않아 수포로 돌아갔던 일을 생각하면, 이리 많이 내려 주는 눈이 고맙기만 하다. 어느 신문에서는 '폭설 내린 울릉도, 눈꽃축제 청신호'라며 폭설을 오히려 반기는 주민들의 표정을 보도하고 있다. 지난 여름에는 하루에도 수백, 수천 명씩이나 섬을 찾던 발길이 겨울 찬바람 따라 한산해 진 섬에, 다시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 고적한 섬 살이에 잉걸불을 지펴 줄 수 있기를 생각하면, 이 눈 이대로 며칠을 더 내려 주면 좋겠다는 바람을 가지기도 한다. 바람은 불지 말고, 파도는 치지 말고 눈만, 눈만 며칠 더 내려 주면, 길이 좀 미끄러워도, 그 미끄러움에 몇 번쯤은 넘어져도 괜찮겠다는 생각도 한다. 그리고 겨울의 많은 눈은 한 해의 풍년을 기약한다고 했지. 이 풍성한 눈처럼 올 한 해 농사도 잘 되고, 오징어도 많이 잡히고, 그래서 살림도 인정도 넉넉해지기를 눈을 보며 생각한다, 대설주의보의 눈을 보며 섬사람들은-. ♣(2008.1.16)

 

*울릉도의 눈에 대한 기록을 보면 지난 1992년 1월 총 적설량이 293㎝를 기록했으며 1일 최고 적설량은 1955년 1월21일에 관측된 150.9㎝가 최고 기록이며, 이후에도 매년 1월만 되면 평균 50∼100㎝의 적설량을 나타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