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는울릉도

아, 이경종 선생 -여기는 울릉도·30

이청산 2008. 2. 17. 16:49

아, 이경종 선생

-여기는 울릉도·30


1월 17일, 천부를 향하여 달려간다. 섬은 솜이불을 덮어 쓴 듯 며칠을 두고 내린 눈에 깊게 잠겨 있었다. 산은 활짝 핀 눈꽃으로 경이로운 설경을 자아냈지만, 바다는 연신 거센 파도를을 일으키며 해안을 향해 하얀 거품을 내뱉고 있었다. 멀고 가까운 산봉이며 크고 작은 바위 들이 빚어내는 신비로운 설경에 한껏 마음을 빼앗기며 달리다가 태하를 지나 현포령에 이른다. 열두굽이 오르막을 오르려는데 차가 앞으로 나가는 것이 아니라 뒤로 미끄러지려 한다. 마치 깊은 꿈에서 깨어난 듯 화들짝 눈이 크게 떠진다. 산등성이며 나물 밭은 높고 낮음, 깊고 얕음이 분간되지 않게 많은 눈들이 쌓여 있고, 차가 달려야 할 도로에도 엄청난 눈이 덮였다. 차가 미끄러지면서 곧장 곤두박질쳐버릴 것 같다. 엉금엉금 기듯이 올라가고 있는데 구세주가 나타났다. 제설차가 재만등으로부터 눈을 휘몰아 날리며 내려오고 있는 것이다. 안도의 한숨을 쉬며 제설차가 닦은 길을 따라 올라 재를 넘었다. 내려가는 길도 제설은 되어 있었지만 응달이라 긴장을 늦출 수 없었다. 현포항이며 노인봉 그리고 송곳산이 빚어내는 절경에 눈을 줄 겨를도 없이 속도를 적절히 조절하며 조심조심 내려갔다. 해안 길은 가끔씩 파도에 밀려 올라오는 바닷물 덕분인지 많이 녹아 있다. 평리, 추산을 지나 천부에 이른 것은 저동을 출발한 지 한 시간도 넘게 걸려서였다. 이경종 선생은 이 엄동의 눈길을 어떻게 걸었을까.

 

이경종 선생의 32주기 추모제가 열리는 날, 천부초등학교도 두터운 눈에 깊고 고요하게 묻혀 있다. 설원을 이루고 있는 운동장의 가운데로 난 길을 따라 교정의 언덕을 오르는데, 여러 선생님들과 함께 순직비 앞에 제물을 차리기에 여념이 없는 김영희 교장의 모습이 보였다. 순직비는 장방형의 하얀 화강암 위에 반달형의 검은 돌이 동그란 돌 두 개를 안고 있었다. 두 제자를 가슴에 품고 있는 형상이다.

임학빈 교육장과 교육청 직원들이 박경래 울릉중 교장, 울릉서중의 박석환 교장과 함께 오고, 북면의 면장과 우체국장, 북중 이환 교장이 참석했다. 11시. 김 교장, 임 교육장이 나란히 서고 뒤에 천부초등 학생 대표들과 추모객들이 도열한 가운데 천부초등 김은수 교감의 사회로 추모제가 시작되었다. 김 교장이 제상에 놓인 촛대에 불을 밝히려 했지만 설원을 불어오는 찬바람은 점촉을 허락하지 않았다. 고인의 거룩한 뜻을 기리고 명복을 비는 묵념으로부터 시작한 추모제는 이경종 선생의 약력 소개로 이어졌다.

 1941년7월23일 대구시 노곡동에서 태어난 이 선생은 대구사범학교 본과를 졸업하고 1959년 8월31일 영천군 지곡국민학교 교사로 첫 발령을 받은 이래, 군복무 기간 1년을 제외하고는 줄곧 영천 관내의 초등학교에서 봉직하다가 낙도 울릉도 근무를 자원했다. 1973년 3월1일 천부국민학교 교사로 부임하여 3년이 지난 1976년에 순직하기까지 35년의 길지 않은 삶과 15년 3개월의 교직 생애를 소개했다.

 

학생 대표가 나와 추모비의 비문을 낭독했다. 아동문학가 김진태 선생이 지은 글이다.

“푸른 파도가 넘실거린다. 높새바람이 분다. 넘실거리는 파도를 들여다보면 어른거리는 모습이 있다. 우는 바람 고요히 귀를 기울이면 애끊는 흐느낌이 들려온다.

자기 목숨을 돌보지 않고 어린 양들의 목숨을 구하려던 갸륵한 이경종 님의 얼굴이다. 사랑하는 어린이의 이름을 애타게 부르짖던 스승의 목소리다.……"

그랬다. 이경종 선생은 '어린 양'들을 위해 스스로의 목숨을 바쳤다. 사랑하는 제자를 위해, 위기에 빠진 제자를 구출하기 위해 거센 파도 휘몰아치는 천부 앞바다에 한 목숨을 기꺼이 던져버렸다. 바다 속 깊은 곳으로 잠겨 가는 순간까지 제자를 놓지 않으려던 이 선생의 절규와 몸부림이 생생히 들리고 보이는 듯하다.

 

"1976년 1월 17일 그 날 한겨울 절해의 고도 울릉도는 깊은 눈 속에 잠들고 있었다. 세찬 높새바람은 기승을 부리고 성난 파도는 한 입에 섬을 삼켰다 토했다 하였다. 혹한과 거친 기상보다 더 뜨거운 것은 책임감이다. 노한 파도의 위협보다 더 굳센 것은 스승의 사랑이다. 공무의 무거운 임무는 그를 만덕호를 타게 하였고, 스승으로서의 뜨거운 사랑은 한 떨기 사도(師道)의 꽃을 푸른 물결에 숨지게 하였다."

32년 전의 오늘의 일이다. 그 때도 오늘처럼 폭설이 내려 있었고, 높새바람 세차게 불고 파도는 섬을 삼켜버릴 듯 거세게 몰아쳤다. 3년 전인 1973년 천부국민학교에 부임한 이 선생은 사고 당시인 1976년에는 6학년 담임을 맡고 있었다. 내일이면 도동의 농협으로 가서 직원들의 봉급을 수령해야 하는 날, 경리 담당 교사인 이 선생은 1976년 1월 16일 1월분 봉급 수령을 위한 출장 명령을 받아 오전 수업을 마친 후 청부 이석룡과 함께 학교를 출발했다. 산 넘어 도동으로 가서 일을 보기 위해서는 하루 전에 길을 나서야 한다. 날씨와 선편을 예측할 수 없기 때문이다. 섬의 북쪽을 왕래할 수 있는 교통 수단이란 산길 걷기 아니면 배편 밖에 없을 때였다. 죽암 뒷재로 올라 석포를 거쳐 산중 길을 걸어 내수전으로 향했다. 오른쪽도 왼쪽도 가파른 낭떠러지라 눈이 깊게 쌓인 길이 여간 위험하지 않았다. 자칫 발을 헛디디면 급경사 눈 비탈을 미끄러져 바다로 추락해버리기 때문이다. 눈 속을 헤치며 저동을 지나 도동에 이르기까지 14Km의 길을 힘 다해 걸어 목적지에 당도하니 날은 저물고 온몸이 땀으로 흠뻑 젖었다. 하숙에서 밤을 새우면서도 어려운 형편 때문에 중학교 진학을 포기하려는 두 제자의 모습이 잠시도 잊혀지지 않았다. 이튿날 농협으로 달려가서 학부모로부터 어렵게 빌려 마련한 그들의 입학금을 먼저 납부하였다. 그리고 15명 직원의 1월분 급료 1,552,000원을 수령하였다. 이제 천부로 돌아가면 된다.

 

엄청난 눈이 덮인 산길을 다시 걸어 돌아갈 일이 엄두가 나지 않았다. 도동 부두에 나가 돌아갈 배편을 알아보니 마침 어선 만덕호가 천부로 간다고 했다. 도동항을 출발할 때는 잠잠하던 해면이 저동항을 지나 선창 앞 바다에 이르자 삼선암 너머에서 하얀 갈퀴를 세운 난파도가 무섭게 몰아쳐 왔다. 배가 심하게 요동했다. 배에 탄 사람들은 모두 겁에 질린 채 비명을 토했다. 천부항 앞에 이르자 바람은 북동풍으로 돌변하며 더욱 거세졌다. 켜켜이 밀려오는 노도가 바위에 부딪치면서 천파만파의 하얀 물기둥을 치솟게 했다. 입항에 실패한 만덕호는 일단 후퇴하여 거센 파도를 피하려는 했다. 그 때 배가 심하게 요동치는 바람에 뒤 갑판 위에 사려둔 밧줄이 스크류에 휘감기면서 기관의 시동이 꺼져버렸다. 배는 항구를 불과 2,30m 앞둔 곳에서 진퇴양난에 빠지고 말았다. 다시 성난 파도가 빠른 속도로 뱃전을 치며 커다란 폭발음과 함께 거대한 물 폭발을 일으켰다. 폭발이 가라앉자 배는 바다 속으로 무참히 빠져들었다. 승객과 화물이 한꺼번에 바다 속으로 쏟아지면서 천부항은 일시에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학창 시절 수영 선수였던 이 선생은 기민한 동작으로 기를 쓰며 파도를 헤쳤다. 마침 물 위에 뜬 승강용 목판(길이5m, 넓이40cm, 두께5㎝)을 잡을 수가 있었다. 뭍을 향해 나아가려던 찰라 좀 떨어진 곳에서 제자 최병춘 군과 신현진 군이 탈진 상태로 허우적이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재빨리 다가가서 한 명씩 가까스로 끌어당겨 목판을 붙잡게 하고, 이 아이들과 함께 몰아치는 파도를 이겨내기 위해 사투를 벌이고 있었다. 배의 난파 소식을 들은 동네 사람들이 해안으로 몰려나와 지켜보고 있었지만, 150m이상 떨어진 바다 가운데의 상황이라 비명과 고함으로 발만 동동 구르며 속수무책의 애간장만 태울 뿐이었다. 이 선생은 두 제자를 감싼 채 노도를 물리치기 위해 필사의 힘을 다했다.

파도는 폭발하는 화산이 되어 거대한 물기둥을 이루며 치솟다가 산산이 부서져 내리고 부서진 파도는 다시 엄청난 폭탄이 되어 치솟았다. 폭발하고 부서지기를 거듭한 뒤의 바다에는 부서진 배의 조각들만 떠다닐 뿐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제자의 이름을 애타게 부르며 절규하던 이 선생의 손길도 더 이상 찾아 볼 수 없었다. 배에 탄 57명 중에 목숨을 건진 사람은 19명 뿐, 나머지는 종적을 찾을 수 없거나 익사체로 떠올랐다. 이 선생의 시신은 닷새 뒤인 22일 천부항 부근의 천년포 해안에서 인양되었다. 시신은 바다 속에서 침윤되고 파훼되어 신원을 분별할 수 없었지만, 비보를 받고 뭍에서 달려온 미망인에 의해 남보다 큰 발과 다리의 점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비문을 낭독하는 학생의 목소리가 고조되며 이어졌다.

"지금도 푸른 파도는 넘실거린다. 그러나 넘실거리는 물결에는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참스승의 모습이 어른거린다. 지금도 높새바람은 애타게 흐느낀다. 거룩한 사랑의 사도(使徒)인 이경종 님의 이름을 되씹고 있다. 그는 작은 나를 버리고 영원한 나를 택하였다. 그는 자기의 목숨을 던져서 숭고한 사랑을 살렸다.”

그는 참스승이기 전에 따뜻한 가슴을 가진 정 많은 사람이었다. 그 따뜻한 마음이 제자들을 위한 험난한 길에 나설 수 있게 한 것이다. 그러나 정만으로 나설 수 있는 길은 아니었다. 그는 용기 있는 사람이었다. 위기를 당면했다 하여 아무나 선뜻 나설 수는 없는 일이다. 자신의 목숨을 담보해야 하는 일임에야 더욱 큰 용기가 필요할 터이다. 그러나 그 일촉즉발, 전광석화의 순간에 '사랑'이며 '용기'를 어떻게 깨달아 생각할 수 있었으랴. 굳이 생각으로 새기지 않아도 가슴에 몸에 배어 있었으리라. 어쩌면 그는 사랑과 용기의 화신이었을지도 모른다. 아니, 그는 이미 그 화신이었다. 그것이 바로 그를 '참스승'에 이르게 한 것이다.

 

추모객들은 하얀 국화를 제상에 받치며 그의 아름다운 넋을 기렸다. 오늘의 이 눈부신 백설은 고결한 그의 인품이요, 받쳐지는 꽃은 '사람 사랑'의 아름다운 마음이었다. 그를 아는 사람들의 증언에 의하면, 어린이들에게 동화책 읽어주기를 즐겨 했고, 언제나 온후하여 '꾸짖지 않는 선생님', '자애로우신 선생님'으로 일컬어졌으며, 불우한 어린이를 돕는 일에도 남다른 정성을 다했고. 학교 곳곳에 꽃을 가꾸어 사철 꽃 피는 학교를 만드는 일에도 열성을 기울였다고 한다. 어쩌면 그가 바로 한 떨기 꽃이었던지도 모른다.

김 교장과 임 교육장의 추모사가 이어졌다. 그들은 하나같이 스승의 참사랑을 실천궁행으로 보여준 이 선생의 살신성인의 정신을 이어받아 아름다운 사랑을 실천하는 스승이 되고, 훌륭한 인격을 닦는 학생이 되자고 당부했다. 그리고 추모제가 끝났다. 사람들은 음복의 잔을 나누고, 이 선생의 '그 날'을 생각하며 다시 눈 두텁게 덮인 현포령을 넘었다.

 

그가 이 세상을 떠난 뒤 그의 아름다운 인간애를 추앙하는 사람들에 의해 상과 훈장이 주어지고 순직비가 세워졌다. 오늘 같이 눈이 천지를 덮는 그 날이 오면 빗돌 앞에 제수를 차리고 꽃다발을 바쳤다. 그리고 2백5십만 년 전 화산섬 울릉도를 흘러내린 용암보다 더 뜨거웠던 그의 순수와 열정 어린 사람 사랑을 기리고 새겼다.

세월이 천부항에 밀려오고 밀려가는 파도 속으로 잠겨갔다. 그가 간 지 서른 두 해가 흐른 지금, 빗돌이 기울고 있다. 마치 이 선생의 꽃다운 넋이 망각의 늪 속으로 매몰되어 가기라도 하듯 한 쪽 지면이 침하되면서 조금씩 기울어지고 있다. 저렇게 기울다 보면 기단 위에 얹힌, 이 선생의 품에 안긴 아이들이 추락해 버릴지도 모른다. 기울게 해서는 안 된다. 저 아이들이 이 선생의 품을 떠나게 해서는 안 된다. 언제나 반듯하게 서서 사람 사랑의 불타는 열정을 증언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는 엄숙히 그 증언을 들어야 한다.♣(2008.1.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