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는울릉도

내일은 배가 뜬다 -여기는 울릉도·27

이청산 2007. 12. 24. 13:55

내일은 배가 뜬다

-여기는 울릉도·27



 교무실에서 작은 파티가 벌어졌다. 탁자 위에 오징어요리며 통닭이며 김밥으로 조촐한 상을 차렸다. 주말에 뭍으로 나갔다가 일요일 섬으로 와야 할 사람들이 배가 안 뜨는 바람에 월요일에야 들어왔는데, 지각 귀도한 사람들의 추렴으로 자리를 마련했다는 것이다.

"앞으로도 늦게 들어오는 분이 많기 바라면서 다 같이 건강을! 위하여-"

친목회장의 우렁찬 건배사로 모두 종이컵을 들고 잔을 맞추었다. 그리고 박수를 치면서 한바탕 웃었다. 자리를 마련한 사람들도 계면쩍어 하며 함께 웃었다.

토요일 오전에 섬으로 온 배가 오후에 포항으로 출항해야 하는데 거센 풍랑 때문에 나가지를 못하고, 일요일 오후에야 나갈 수가 있었다. 따라서 일요일에는 섬으로 들어오는 배가 뜰 수 없게 되었고, 뭍에서 섬으로 와야 하는 사람들은 발만 구르는 수밖에 없었다.

대부분의 선생님들은 가족을 모두 뭍에 두고 혼자서 섬 살이를 하고 있다. 가끔씩 뭍으로 가서 그리운 가족들과 만나기도 해야 하지만, 입고 먹을 것에 관한 채비도 꾸려 와야 한다. 요즈음은 격주로 돌아오는 휴무 토요일이 있어 그래도 육지 나들이가 예전보다는 덜 어려운 편이다. 휴무 토요일 전날 저녁 배를 타고 뭍으로 나가면 토요일 하루를 가족들과 보내다가 일요일 아침 배로 오면 된다. 그럴 요량으로 휴무 토요일이 낀 주말에는 뭍으로 나가려는 사람이 많다.

그러나 하늘은 육지로의 내왕 길을 섬을 사는 사람들의 뜻에만 맡겨 놓지는 않는다. 바람이 불고 물살이 일어 바다에 파도가 부서지면 그토록 기다리던 뭍으로의 발길을 거두지 않으면 안 된다. 뭍으로 나가서도 마찬가지다. 섬으로 돌아와야 할 길이라도 배가 뜨지 않으면 애만 태울 뿐 어찌할 도리가 없다. 가족과 머물 수 있는 시간이 늘어나니 다행이라 할 수 있을까. 그러나 마음 속속들이 편하게 해 주지는 못하는 시간들이다. 동료들에게 대신 짐 지워야 할 섬의 일들이 마음 한 쪽을 불안하고 송구하게 하는 것이다.

섬사람들은 항상 날씨와 더불어 산다. 하늘이 화창하고 바다가 고요한 날엔 섬사람들의 마음도 맑다. 뭍을 향한 그리움도, 사랑하는 이들에게로 향하는 사모의 정도 잔잔한 바다처럼 가라앉힐 수 있다. 그러나 먹장구름 드리운 하늘에 거센 바람이 몰아치고, 바다가 갈퀴를 세우면서 하얗게 부서지는 날은 쓸쓸해지고 황량해진다. 뱃길이 끊어지면 그리움을 실어보낼 길도 끊어진 듯하다. 그 단절감이 섬사람의 마음을 황량하게 하는 것이다.

내일은 배가 뜰까.

내일 뭍으로 나갈 일이 없는 사람도, 내일 뭍으로 나가려는 사람도 배 뜨기를 기다리는 간절함은 다 같다. 나갈 일이 없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배가 떠야 가슴이 열리는 것 같아 답답하지 않고, 나가려는 사람에게는 물론 배가 떠야 뭍으로 가서 해야 할 일을 할 수가 있다.

뭍으로 가서 해야 할 일이 아무리 긴급, 긴요한 것일지라도 배가 뜨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 누가 몹시 아프다고 해도, 숨이 곧장 넘어간다고 해도 애만 태울 뿐 어찌해 볼 도리가 없다. 그리움이 아무리 겹겹이 쌓여도, 눈물이 아무리 가슴속을 적셔도 물보라 하얗게 갈라지는 바다만 하릴없이 바라볼 뿐 어떻게 다스릴 도리가 없다. 뭍으로의 출장 일이 아무리 크고 중해도, 시각을 다투어 해결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일이라 할지라도 발만 동동거릴 뿐 달리 손쓸 재간이 없다.

기상대에서는 친절하게도 기상특보 상황을 문자 메시지로 알려 준다. 휴대 전화에서 메시지 도착을 알리는 소리가 울리면 가슴이 내려앉는다. 뭍으로 갈 일을 앞두고 있는 날의 그 소리는 심장을 더욱 깊게 내려앉게 한다. 그것은 예외 없이 해상에 내려지는 강풍, 풍랑의 경보나 주의보이기 때문이다. 배가 뜰 수 없다는 말이다. 모든 것과의 단절을 통고하는 메시지다.

뭍으로의 출장 길을 나서야 하는 오늘도 울릉도, 독도엔 강풍주의보가 내리고, 동해 중부 먼 바다엔 풍랑주의보가 내렸다는 메시지가 왔다. 출장 길을 접었다. 그러나 뭍으로 향하는 상념은 접을 수가 없다. 계획이 어긋나거나 수포로 돌아가는 일에 대한 생각이 복잡하게 얽힌다. 그 얽힌 생각의 끝자리쯤에는 외로움이라는 것이 살며시 고개를 든다. 아무리 섬을 살아도 결코 단련될 수 없는 그것이다.

그러나 섬을 사는 사람들은 결코 가녀리지 않다. 가녀려서는 섬을 살 수가 없다. 산을 몰아치는 강풍에도 날아가지 않아야 하고, 바다를 뒤집는 풍랑에도 쓸려가지 않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날아가지 않고 씻겨가지 않기 위하여 섬사람들은 체념을 익혔다. 막힌 가슴도 열려있듯 여기는 법을 배웠고, 외로움도 툴툴 털어 버리는 법을 배웠다.

바다에 강풍주의보가 내려 배가 뜨지 못하던 십이월의 어느 날, 군민회관에서는 합창단 연주회가 열렸다. 섬사람들로만 구성된 합창단이다. 여러 성부의 소리들이 화음을 이루면서 고운 선율이 되어 울려 퍼지는 중간에 초청 순서로 색소폰 연주가 있었다. 레퍼토리는 '홀로 아리랑'과 '사랑이란 두 글자'였다. 독도야 간밤에 잘 잤느냐∼. 섬사람들에겐 '독도'만 생각하면 눈물이 난다. 객지에 내어다 놓은 막내 마냥 안쓰럽기만 한 것이다. 팔을 들어 함께 흔들며 색소폰 소리에 맞추어 합창을 했다. 목놓아 부르던 '독도'가 끝나고, 이제 감미로운 사랑을 노래하려는가 했더니 곡은 갑자기 흥겨운 가락으로 바뀌어 갔다. 어라, '사랑이란 두 글자'가 아니잖아. 관객들은 일제히 소리에 맞추어 손뼉을 치기 시작했다. 어떤 이는 노래로 따라 부르면서 힘차게 손뼉을 쳤다.

 

내 미래를 말하지 마라 웃으면서 살 거다

언젠가는 맘먹은 대로 달려 갈 때가 있을 거다

산다는 것이 그런 거라고 울다가도 웃는 거라고

돌고돌고 도는 인생 비바람이 불어와도

내일은 해가 뜬다

 

연주곡은 '내일은 해가 뜬다'라는 가요였다. 관객들은 신명이 났다. 왜 그리 신이 났을까. '내일은 해가 뜬다'는 그 희망의 메시지가 신명을 만들어낸 것일까. 섬 살이가 아무리 고단해도 출렁이는 수평선 위로 아침이면 늘 새로운 해가 떠오르는 섬에 대한 사랑이 신명을 솟게 한 것일까. 오늘은 바람 불어 뜨지 못한 배일지라도 내일은, 내일은 뜰 것이라는 서럽고도 간절한 소망을 담아 손바닥을 두드려댄 것일까.

내일은 해가 뜬다-.

내일은 배가 뜬다-.♣(2007.1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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