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는울릉도

섬에 비바람이 몰아치던 날 -여기는 울릉도·26

이청산 2007. 12. 10. 11:19

섬에 비바람이 몰아치던 날

-여기는 울릉도·26



바다는 숨을 죽인 듯 고요하고 잔잔했다. 하늘에 듬성듬성 떠 있는 구름도 발길을 멈춘 듯 꼼짝 않고 떠 있었다.

사동 바닷가 언덕에 자리잡은 울릉청소년문화예술체험장, 최철호 경장의 영결식이 열리고 있었다. 하얀 천을 덮은 제단 위에 국화꽃으로 둘러싼 영정이 처연히 놓여 있다. 뚜벅뚜벅 걸어나올 것 만 같은 훤칠한 청년의 모습이다. 대통령이 조화를 보내고, 도지사, 경찰청장이 바다를 건너 달려 왔다. 경찰서장이 부하의 생전 모습을 그리며 침통한 조사를 낭독하고, 동기 경찰관이 "차디찬 겨울바람이 불어오는 국토의 최동단 동해의 작은 섬에서 오늘 우리는 사랑하는 당신과 통한의 이별을 하려고 합니다."라며 고별사를 읽어 나갔다. 다정했던 친구를 먼 세상으로 보내는 동기의 손이 파르르 떨렸다. 목이 메어 차마 쉬이 읽어 내리지를 못했다. 식장을 메운 사람들 모두 눈시울을 적셨다. 경찰청장이 특진 증서와 훈장을 영전에 바칠 때 유족들은 다시 오열을 토했다. 죽어서 받는 훈장이 무슨 소용이 있냐며 절규하듯-. 서른두 살 미혼의 장남을 가슴에 묻어야 하는 부모들의 억장 무너지는 피울음이었다.

 

그가 이 세상에 마지막 남긴 말은 "선배님, 금방 갔다오겠습니다. 갔다와서 식사 마저 하지요."였다. 그러나 그는 갔다가 오지도 못했고, 남은 저녁밥을 마저 먹지도 못했다.

2007년12월3일 이미 짙은 어둠이 내린 저녁 무렵. 낮부터 휘몰아치던 비바람이 그칠 줄을 몰랐다. 그는 선배 한 사람과 함께 저녁을 먹고 있었다. 전화벨이 울렸다. 전화기를 들자 한 주민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 왔다. 산에서 큼지막한 돌들이 마구 떨어져 차량 통행도 어렵고, 정전으로 터널 교통신호기가 작동되지 않아 상황이 매우 위급하다는 것이다. 한 차로뿐인 터널을 신호에 의해 왕복 통행하기 때문에 신호기가 작동하지 않으면 큰 사고가 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는 급히 순찰차를 몰고 파출소에서 수백 미터 거리에 있는 현장을 향해 달렸다. 산에는 강풍이, 바다에는 거센 파도가 몰아쳤다. 낙석을 치우고 있는 면사무소 직원들에게 안전하게 처리해 줄 것을 당부하고 차량 통제를 위해 정전이 된 터널을 향하여 달려가려는데-, 순간 모든 것이 끝나버렸다.

해안 비탈면 절벽에서 수많은 바윗덩어리들이 다시 와르르 쏟아져 내렸다. 400여 톤 정도나 되는 돌들이 순찰차를 덮쳐버린 것이다. 비명을 지를 겨를도 없었다. 차는 돌무더기에 완전히 묻혀 버렸다. 출동한 소방대원과 경찰들이 장비를 동원하여 한 시간 여에 걸쳐 돌을 들어내자 휴지처럼 구겨져 버린 차체가 드러났다. 차와 함께 짓이겨진 그의 몸에서는 이미 체온이 다 빠져나가 버렸다. 그리하여 우리는 사명감에 불타 있던 청년 경찰 한 사람을 이 세상에서 영원히 볼 수 없게 되었다.

 

섬이 개척(1882)된 지 팔십 년이 되도록 섬에는 차도 찻길도 없었다. 섬사람들의 어려운 삶에 각별한 관심을 가지고 있던 박정희 대통령의 지시에 따라 길을 닦기 위한 첫 삽을 뜬 것은 1963년이었다. 섬사람들은 '파도를 막자, 길을 뚫자'는 구호 아래 산을 자르고 바위를 깨며 한 삽 한 삽 길을 닦아 나갔다. 그로부터 38년이 흐른 뒤인 2001년에야 섬을 한 바퀴 돌 수 있는 길 44.2㎞ 중에서 39.8㎞를 겨우 닦아냈다. 아직도 내수전에서 섬목에 이르는 4.4㎞는 숲 속 오솔길로 남아있다. 지형이 너무 험하여 찻길을 내기가 여간 어렵지 않기 때문이다. 그랬다. 망망대해 한가운데 하나의 산으로 떠 있는 화산섬 울릉도는 모든 지형이 가파르고도 험악했다. 그 '가파름'과 '험악함'이 빼어난 절경을 이루어 울릉도를 '신비의 섬'이 되게도 했지만, 길을 닦는데는 너무나 큰 희생이 필요했다. 갖은 공력을 다 바쳐 바다로 뻗어 내린 산허리를 잘라 내거나 굴을 뚫어야 했다. 가파른 산허리를 잘라내면 깎아지른 절벽이 생겨날 수밖에 없었다. 파도가 몰아치고 해일이 덮치면 절벽이 무너지고 바윗덩어리가 흘러내려 애써 닦은 길이 흔적도 없이 매몰되기 일쑤였다. 때로는 거센 파도가 길을 쓸어가기도 했다. 무너지면 다시 쌓고 매몰되면 다시 닦았다. 사십 년 넘는 세월이 그렇게 흘렀다. 섬 길의 대부분이 그러했지만, 그의 목숨까지 앗아간 섬의 서쪽 길은 더욱 험했다. 비바람이 휘몰아치면 어김없이 크고 작은 돌들이 떨어지고, 떨어진 돌은 섬사람들의 발길을 막아버리거나 위태롭게 했다. 그래도 요행이었을까, 섬사람들의 목숨을 앗아가지는 않았다.

섬사람들의 그 간난을 그가 모두 십자가로 짊어졌던 것일까. 섬에 거센 비바람이 휘몰아치는 날, 그는 숙명처럼 섬사람들의 곁을 훌쩍 따나고 말았다. 섬 길에 떨어진 돌에 의한 최초의 희생자가 되어-.

 

그는 꿈도 많은 다정다감한 청년이었다. 좀 늦은 나이이긴 했지만 경찰관이 된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며 지난해 9월 섬으로 왔다. 파출소 이층의 조그만 방에 기거하며 근무와 생활을 함께 했다. 그의 근무가 곧 생활이었고, 생활이 곧 근무였다. 한 삼 년 울릉도에서 근무한 뒤 고향으로 돌아가 결혼을 해서 부모님께 효도하리라는 꿈을 가지고 있었다. 어느 날 동료들과 아침 산행을 함께 한 뒤 서장님이 베푸는 모처럼의 푸짐한 식사에 감격도 했지만, 제일 좋은 것은 식후에 주는 '누룽지탕'이었다는 질박한 청년 최철호-. 간혹 글을 써서 경찰청 홈페이지에 즐겨 올리는 문학 청년이기도 했다.

"행복해지고 싶다면 노력해야 합니다./ 집을 깔끔하게 정리하듯 마음에서 버릴 것은 버리고/ 간수해야 할 건 간수해야 합니다." 행복을 꿈꾸는 청년의 달관이라 할까.

"마치 삶의 전부 다 아는 사람처럼/ 슬픈 만용을 부릴 필요는 없지 않습니까?/ 아프면 아픈 대로/ 슬프면 슬픈 대로/ 외로우면 외로운 대로/ 그리우면 그리운 대로 살면 됩니다." 때로는 아프기도 한 섬 살이의 외로움을, 때로는 슬프기도 한 뭍을 향한 그리움을 솔직하게 받아 들였다. 모든 것을 삭히며 살려 했다. 그리고 마음을 다스렸다.

"행복과 불행은 크기가/ 미리부터 정해져 있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것을 받아들이는 사람의/ 마음에 따라서 작은 것도 커지고/ 큰 것도 작아질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절해고도의 외로운 섬 살이도 행복으로 받아들이고자 했다.

"……시간과 존재가 서로에게 그렇게 빠듯하게 굴지 않아도 좋다는 건/ 나이든 뒤의 유쾌한 깨달음이다."라고 하면서 "느림은 삶의 매 순간을/ 구석구석 느끼기 위해/ 속도를 늦추는 '적극적 선택'이다."라고도 했다. 그는 고단한 섬 살이를 느긋하게 즐기기 위해 애쓰기도 한 것이다.

평소 시 읽기를 좋아하고 글 쓰기를 즐겼던 감성 경찰 최철호, 그래서 그는 자기의 할 일을 결코 회피하려 하지 않았다. 저녁 술을 들다 말고 가야 할 길을 기꺼이 갔다. "사람들과 조화를 이루며, 이웃에게 사랑을 베풀"기 위해 악천후를 가리지 않고 달려나갔다.

"밤은 반드시 새로운 아침을 데려온다."라고 쓴 것이 마지막 남긴 글이었다. 그의 글처럼 어쩌면 그는 새로운 아침을 향해 떠난 것인지도 모르겠다. 이 섬에 그러한 불행이 다시는 없을 새로운 아침을 위하여, 새로운 세상을 향하여 그는 우리의 곁을 홀연히 떠난 것인지도 모르겠다.

섬에 모진 비바람이 휘몰아치던 날-.♣(2007.1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