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는울릉도

아버님의 제삿날 -여기는 울릉도·24

이청산 2007. 10. 24. 17:13

아버님의 제삿날

-여기는 울릉도·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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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님의 제삿날이 다가왔다. 전날에 뭍으로 나가 다음 날 큰집으로 가서 형님네와 함께 제수를 장만하여 제사를 모시면 되리라 하고 배표를 예약해 두었다. 뭍으로 나가야 할 날 아침에도 배는 정상으로 뜰 것이라 했다. 오후 3시에 뜰 배를 기다리면서 뭍으로 갈 채비를 하는데, 바람이 불고 북저바위에 파도가 하얗게 부서졌다. 불안감이 엄습해 왔다. 아니나 다를까, 항로상의 기상 악화로 운항이 통제되었다는 메시지가 왔다. 섬에서 뭍으로 나가려다 보면 항다반사로 있는 일이긴 하지만, 아내는 난감해했다. 형님네만으로 제수 장만을 어떻게 할지 참으로 죄송스러운 일이라 했다. 하늘이 하는 일을 어찌 할 수 있으랴, 형님네도 이해할 것이라며 애써 태연하려 하지만 마음이 편할 수는 없었다.

호우주의보가 내리고 비가 붓듯이 쏟아졌다. 밤이 되면서 비가 잦아지는 듯했지만, 바람이 불고 간혹 비가 뿌리기는 제삿날인 다음 날 새벽까지도 계속되었다. 아버님의 제사를 모시러 갈 수가 없다는 말인가. 섬 살이의 고단이 새삼스레 어깨를 눌러왔다. 돌아가실 무렵까지도 아버님은 내 삶에 대한 걱정을 접지 못하셨다. 어렵게 학교를 다니다가 직장을 가진 지 몇 년 되기는 했지만, 겨우 신접살림을 차리고 사는 모습이 안쓰럽기만 보이셨다. 제대로 한번 모셔 보지 못한 채 아버님은 세상을 떠나시고 풍수의 탄식만 남았다. 여태도 아버님을 잘 모시지 못하는 것 같아 회한이 늑골 깊숙이 스며들었다.

지난 섬 살이 때 파도를 이길 수 없어 어머님 제사에 참사를 못한 아픔이 아린 상처로 살아났다. 참 다행이었다. 아침이 들면서 하늘이 개이고 해가 얼굴을 내밀었다. 햇빛이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었다. 배가 뜰 거라는 예보도 왔다. 배는 예정 시간보다 늦어진 3시 반에 출항했다. 제사를 지낼 시각까지 큰집에 도착할 수 있을지가 걱정이었다. 항로가 순탄하지 못하여 7시경에야 포항에 닿을 수 있었다. 대구로 가는 택시를 탔다. 다른 교통 수단은 제사 모시는 시각을 지켜주지 못할 것 같아서다. 한 시간 남짓 달려 큰집에 닿았을 때는 남매들이며, 제관으로 참사하는 종형제들이 모여 있었다.

사람들은 우리 내외가 섬에서 먼길을 마다 않고 왔다고 치하해 주었지만, 우리는 죄를 지은 듯 송구스러울 뿐이었다. 아내는 팔을 걷어붙이고 부엌으로 먼저 들었다. 진설을 마치고 제상 앞에 엎드렸다. 이 나이까지도 아버지, 어머니의 마음을 편하게 해드리지 못하는 불효를 빌었다. 아버지, 어머니는 바다를 넘나들어야 하는 나의 섬 살이를 얼마나 안쓰러워 하실까. 파도가 높을수록 그 걱정 또 얼마나 크실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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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사의 변혁이라면 일대 변혁이다. 올해 아버님 제사 때부터 축문을 한글로 바꾸기로 했다. 집안의 역사가 시작된 이래로 유가의 가풍을 따라 조상의 제사 때마다 한문으로 된 축문을 써 읽어 왔다. 윗대의 어른들이 다 살아 계실 때에는 제사의 절차를 챙기는 일이며, 축문과 지방을 쓰는 일, 축문을 읽는 일은 모두 어른들의 몫이었다. 어른들이 시키는 대로만 하면 제사의 모든 절차가 잘 치러졌다. 제주가 잔을 올리고 나면 축관은 엄숙한 목청으로 가락을 곁들여 축문을 낭독했다. 무슨 뜻인지는 몰라도 고인을 추모하는 내용이라고 생각하며 꿇어앉아 귀를 기울였다.

"유-세차∼ ……(維歲次 <太歲> ㅇㅇ月 <月建>庚申 朔 ㅇㅇ <日辰> 孝子ㅇㅇ /敢昭告于 /顯考學生府君 歲序遷易 /諱日復臨 追遠感時 昊天罔極 /謹以 淸酌庶羞 恭伸奠獻 尙/饗)∼"

축문을 쓰시던 어른이 돌아가시자 종가의 큰형님이 맡아 쓰게 되었다. 서식이며 쓰는 법은 물론 어른들께 물려받은 것이다. 그 형님이 유고할 때는 내가 쓰기도 했다.

세월이 흘러 윗대 어른들이 다 돌아가시게 되었다. 세대 교체가 이루어진 것이다. 교체된 세대가 다시 윗대가 되는 세월이 또 흘러갔다. 종가의 큰형님이 팔순이 되고 내가 어느 새 할아버지 소리를 듣게 되었다. 올해 어느 어른의 제사 때 형님들이 둘러앉았다. 우리 세대가 윗대가 되어 있는 지금, 고쳐야 할 가풍은 없겠는지를 생각해 보자고 했다. 전통과 관습을 도외시할 수는 없지만, 고쳐야 할 것을 고치지 않으면 또 한 세대를 물려야 하니, 고칠 것은 지금 고쳐 주자 하였다. 당장 오늘의 제사 의례부터 돌아보자 했다. 진설법이 까다롭다는 말이 나왔지만, 의례란 정성과 격식이 함께 있어야 하는 법인데 격식을 너무 무너뜨리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했다. 축문과 지방 쓰는 일에 의논이 이르렀다. 한문으로 쓰는 축문은 뜻을 아는 사람도 드물 뿐 아니라, 앞으로는 쓸 줄 아는 사람도 별로 없게 될 것이라 걱정했다. 한글로 바꾸면 이해하기도 쉽고 쓰기도 쉬워 고인을 추모하는 정성이 더욱 돈독해질 수 있을 것이라 했다. 모두들 고개를 끄덕이었다. 한글 축문 작성은 '문학자인 네가 해 보아라'며 나에게 미루었다. 세종대왕께서 한글을 창제하신 지 실로 몇 년만의 일이던가, 감개 무량한 일이라 할 만하다. 그러나 쉬운 일이 아니었다.

새롭게 작성하기도 어려운 일이지만, 누백 년의 전통을 일거에 바꾼다는 것에 대한 두려움 또한 적지 않았다. 그러나 언젠가 해야 할 일이라면 지금 하자며 용기를 내었다. 어떻게 바꿀까를 궁리하던 끝에, 한글로 바꾸되 한문이 지닌 문맥적 의미를 크게 벗어나지 않도록 하기로 했다. 선조들이 지켜온 조상에 대한 정성이 그 말들 속에 무르녹아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전통과 변화를 함께 조화시키기로 한 것이다. 축문 중에 나오는 '효자'라는 말은 그대로 살리기로 했다. 그 말은 제주가 부모의 혼백에게 자기를 이르는 일인칭 대명사의 뜻을 지니기 때문이다.

그 축문을 오늘 아버님 제사에서 처음으로 독축하게 되었다.

"때는 바야흐로 정해년 구월 팔일 효자   는 /감히 돌아가신 아버님, 어머님께 밝게 사뢰나이다. /세월은 흘러 돌아가신 아버님의 제삿날이 돌아왔습니다. /추모의 정이 오늘 더욱 간절하여 저 하늘도 다함이 없나이다. /삼가 맑은 술과 갖은 음식으로 정성을 드리오니 두루 흠향하시옵소서."

처음의 일이라 다소 생경한 느낌이 들기도 했지만, 축문의 전통적인 뜻도 살리면서 한글로 잘 풀어 썼다며 제관인 형님들이 만족해했다. 앞으로 집안 제사 때에는 모두 그렇게 쓰기로 했다. 저승에 계시는 아버님께서도 이 변화를 나무라지는 않으실 것 같다. 아버님도 생전에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는 삶을 살아오셨기 때문이다.

아버님은 경술국치 이듬해에 태어나셔서 대통령이 시해되던 이틀 뒤의 새벽에 운명하셨다.  우리나라의 현대사가 지닌 모든 격변은 다 겪으신 셈이다. 집안에서 혹은 사회적으로 어려움 당하실 때면 새로운 삶을 찾아 집을 떠나시기도 하고, 이국도 유전하시면서 개척의 투혼을 불태우기도 하셨다. 성취와 고행이 거듭되는 파란과 풍운의 한 생애를 사시다가 예순 아홉을 일기로 서세하셨다. 일생을 투지로 살아오신 아버님이라 오래 사실 줄 알았는데, 길지 않은 향년으로 세상을 떠나신 것이 너무나 애통할 뿐이었다.

변화를 피하려하지 않으시던 아버님의 피가 내 혈관 속에도 조금은 흐르고 있음인지, 나는 지금 뭍의 사람들이 별반 달가워하지 않는 이 절해고도를 스스로 찾아와 살고 있다. 내 생애의 아름다운 변화라 믿고 있기 때문이다.

아버님의 제사를 모시고 난 새벽, 길을 서둘렀다.

그리고 섬으로 향하는 배를 탔다. 파도를 넘어-. ♣(2007.1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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