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는울릉도

물양장의 가을 -여기는 울릉도·23

이청산 2007. 10. 15. 15:30

물양장의 가을

-여기는 울릉도·23



새벽이면 학교 운동장에 공을 차러 오던 김 씨가 요즈음 통 보이지 않는다. 밤바다에 어화가 많이 뜨고부터다. 그는 오징어 중도매업과 가공업을 하고 있다. 새벽에 학교로 오는 대신에 부두로 나간다. 배에서 오징어를 내리면 경매 판에서 오징어를 사기 위해 바쁘게 뛴다.

밤새 바다를 밝히던 배들이 항구로 들어온다. 물양장*엔 오징어를 내리오징어를 배에서 물양장으로 내리고 있다.려는 사람들과 사려는 사람들 그리고 할복 아낙네들의 발길이 바빠진다. 부두 곳곳에 배가 메어지고, 배와 물양장을 연결하는 하역대가 걸쳐진다. 오징어 상자가 하역대를 타고 물양장으로 미끄러진다. 수협 조합장도, 해경 파출소장도 상자 내리기에 일손을 모은다. 배에서 밀어내는 오징어 상자는 물양장에 차곡차곡 쌓여지고, 경매로 오징어를 사려는 사람들이 몰려든다. 직접 가공하려는 사람도 있지만, 다시 팔기 위하여 사려는 중도매인들도 있다. 그들은 모두 분필과 후다**를 들고 있다. 경매사가 딸랑딸랑물양장으로 내린 오징어는 바로 경매에 들어간다. 손종을 흔들면, 원매인들은 물건도 보고 사람들의 눈치도 봐 가며 후다에 보일 듯 말 듯 원매가를 적어 경매사에게 넘긴다. 경매사는 재빠른 동작으로 후다를 받고 살짝 펼쳐 보기를 거듭한다. '더 없느냐'고 확인한 다음에 원매인들을 향해 외친다.

"1만2천3백원 17번! 5천백3십원 25번!"

씨알이 큰 것과 작은 것의 크기는 별 차이가 나지 않지만, 매매가에는 커다란 차이가 난다. 경매사는 번호를 불러 후다를 나누어주고는 다른 오징어 상자 더미를 향하여 자리를 옮긴다. 모두 경매사를 따라 우르르 몰려간다.

임자가 결정된 오징어는 몰려온 아낙네들에 의해 물양장 바닥에 널브러진다. 아낙네들도 손이 빨라야 한 꽂이(20마리)라도 더 맡을 수가 있다. 상자를 확보하지 못한 아낙네들은 다른 곳으로 빠르게 달려가야 한다. 한 물양장에 높이 쌓인 오징어 상자꽂이를 손질해 봤자 300원밖에 받지 못하지만, 그래도 많이만 잡으면 몇 만 원은 건질 수 있다. 날렵한 할복 칼질이 시작된다. 아낙네들의 칼질은 점점 속도를 더해 가고, 손질한 오징어는 이까대***에 꿰어져 차에 실려 나간다. 어느 새 물양장은 배에서 오징어를 내리고 받으려는 사람들, 팔고 사려는 사람들, 지천으로 널린 오징어, 할복하는 아낙네, 이까대에 꿴 오징어를 갈무리하려는 남정네들로 북새통을 이룬다. 참 오랜만에 보는 '북새통'이다.

 

배는 항구에 묶여 어한(漁閑)의 봄을 하릴없이 보내야 했다. 여름이 왔다. 그러나 오징어 떼는 쉽사리 섬을 찾아오지 않았다. 6월이 가고 7월의 들머리부터 바다에 간간이 어화가 피어나기 시작했지만, 헤아릴 수 있는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아침에 부두에 나가보면 배에서 내려지는 오징어도 그리 많지 않았다. 뱃사람들은 연료비도 충당이 안 된다고 푸념을 했다. 할복하러 나왔던 아낙네들은 뒷짐만 지고 섰다가 돌아서기 일쑤다.

그러던 7월 어느 날, 물양장에 정부의 잘못된 수산 정책을 질타하는 플래카드가 빼곡이 내 걸리고, 성난 어민들이 부두로 몰려들었다. 외산 오징어의 수입이며, 총허용어획량(TAC) 정책에 항의하며 조업 포기를 선언했다. 어업허가증을 해양수산부에 반납하고, 선박의 조타실 키마저 해양수산사무소에 주어버리고, 모든 배를 묶고 항구를 봉쇄해버렸다. 그 후로 바다에는 한 동안 어화가 피어나지 않았다.

7월의 캄캄한 밤바다에는 등대불만 무료히 비치고, 파도만 공허한 몸짓8월 초의 한가한 물양장으로 각돌****을 때리고 있었다. 7월이 다 갈 무렵 해양수산부 장관이 채낚기 어업인 대표와 면담했다는 보도가 나왔다. 원양 오징어의 국내 반입을 제한하고, 어선 감축 사업을 추진하겠다고 했다는 것이다.  8월이 들면서 밤바다에 어화가 한둘씩 피어나기 시작했다. 그러나 아침에 부두로 들어온 배에서는 몇 상자의 오징어와 활어 몇 마리가 떨채에 담겨 물양장으로 나올 뿐이었다. 8월 하순 오징어 축제가 열렸다. 오징어요리 경진대회며 오징어잡기 체험행사가 열렸지만, 부두에는 풍악 소리만 요란할 뿐 오징어가 축제장을 흐드러지게 장식하지는 못했다. 이 한 철을 공염불로 보내면 한 해를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이냐는 어민들의 한숨 속에 8월이 묻히고 9월이 왔다.

모든 배들이 오징어 잡이에 나가고 텅 빈 항구9월 초순은 8월같이 흘러갔다. 9월 하순, 추석이 다가 올 무렵부터 바다에 어화의 수가 조금씩 늘어나기 시작했다. 오징어도 섬사람들 추석을 잘 쇠라고 축복하는가, 추석이 임박할 무렵부터는 제법 많은 어화들이 밤바다를 수놓으며 수평선을 밝혔다. 아침에 부두에 나가면 물양장에 파란 오징어 상자가 군데군데 쌓여지고 경매사의 손종 소리가 경쾌한 연주 소리처럼 울려 퍼졌다.

저녁 답의 항구에 배가 점점 보이지 않더니, 추석을 쇤 어느 날엔 항구가수평선을 밝히고 있는 수많은 어화 텅 비어버렸다. 모두 바다로 나간 것이다. 몇 척의 배라도 늘 메어져 있던 항구가 텅 빈 것을 보기도 참 오랜만이다. 그 날 밤 올해 들어 제일 많은 어화가 떴다. 달도 둥실하게 하늘 가운데 떠서 바다를 환하게 비추었다. 먼 배의 작은 불덩이와 가까운 배의 큰 불덩이가 섞여 조화를 이루며 바다는 찬란 불의 화원을 이루었다.

이튿날 아침, 바다로 나갔던 배가 분주히 들어오고, 배에 걸쳐진 하역대에서는 파란 오징어 상자가 쉴새 없이 미끄러졌다. 물양장 곳곳에 채곡채곡 쌓였다. 경매사는 손종을 연방 울려댄다. 경매인들은 경매사를 따라 분주히 움직인다. 후다에 원매가를 적어 경매사에게 넘기기 바쁘다. 한 상자 값이 1만5천 원, 1만6천 원으로 올라간다.

학교에 새벽 운동하러 오지 않는 김 씨의 발길이 물양장에서 바쁘다. 물양장 바닥에 널브러진 오징어와 할복 칼질에 바쁜 아낙네들오늘은 비교적 많은 물량을 확보했다며 씩 웃는다. 김 씨가 사들인 오징어에 아낙네들이 벌떼처럼 달려든다. 오징어는 순식간에 물양장 바닥에 널브러진다. 질러 놓은 이까대가 아니면 내 것, 네 것 분간도 안 될 지경이다. 배를 따서 내장을 들어내는 아낙네들의 칼질이 하도 재빨라 손길이 눈에 잘 보이지도 않는다.

 

깊어 가는 물양장의 가을이 경매사의 종소리를 타고 한 가득 널브러진 오징어 위로, 아낙네들의 날렵한 칼질 속으로 내려앉고 있었다.

김 씨는 힘들게 찾아온 이 가을이 좀 길었으면 좋겠다고 했다.♣(2007.10.12)

 

<주>

*물양장 : 배에 실려 있는 물건을 육지에 쉽게 내리기 위한 부두 시설

**후다 : 원매인이 원매가를 적어 경매사에게 넘겨주는, 번호가 적힌 작은 수첩

           같은 물건을 이르는 속어

***이까대 : 이까(いか)는 일본어로 오징어, 대[竹]는 오징어를 꿰는 대나무를

        말하며 대 하나에 20마리씩을 꿴다

****각돌 : 테트라포트(tetrapod). 파도의 힘을 소멸시키거나 감소시키기 위해

         방파제에 설치하는 콘크리트 구조물. 소파(消波)블럭 또는 삼바리라고 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