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는울릉도

폐가 들여다보기 -여기는 울릉도·17

이청산 2007. 7. 21. 11:19

폐가 들여다보기
-여기는 울릉도·17



섬 길을 걷는다. 내수전에서 출발하여 정매화골을 거쳐 북쪽으로 가는 산길을 잡아 죽암으로 간다. 나뭇가지 사이에 걸린 바다를 보며 죽도를 옆에 끼고 절벽 길을 탄다. 한 폭으로 펼쳐지는 산과 바다의 풍정이 아름답고도 정겹다. 정들포[石圃]와 대바우[竹岩]가 갈라지는 정들포 삼거리에 백운동 원경선다. 안개 속으로 백운동이 어렴풋하다. 산기슭에 앉아 있는 빨간 지붕의 인가가 수풀 속에 피어난 한 떨기 꽃과 같다. 지난번 섬 살이 때 저 집을 가보았더니 부부 함께 밭을 갈며 오순도순 살고 있었다. 그 부부 지금도 정답게 살고 있을까. 혹 집을 두고 섬을 떠나지는 않았을까.

섬 길을, 특히 산중 길을 걷다 보면 우거진 잡초에 묻혀 있는 빈집을 흔히 만나게 된다. 고단한 섬 살이를 접고 뭍을 향해 떠나거나, 힘겨운 산중 생활을 떠나 해안 마을로 간 사람들의 집이다. 죽암으로 내려가는 길을 잡는다. 지난번 섬 살이 때는 오붓한 숲 속 길이었는데, 널따란 포장도로로 변했다. 편리해졌다 싶으면서도 정감 하나를 잃은 것 같아 아쉽기도 하다. 포장 도로는 이어지고 있는데, 그 길 옆 풀숲에 파묻혀 있는 빨갛게 녹슨죽암의 어느 폐가 양철 지붕 하나-. 집을 비워 둔 지가 꽤 오랜 듯, 멀쑥이 자란 쑥대며 섬바디, 칡넝쿨 들이 얽혀 마당이며 집 주위에 자욱하게 우거져 있다. 집 주인은 어떤 사람이었을까. 어떤 모습으로 섬을 살다 갔을까. 어떤 생각을 하며 섬을 떠나갔을까.

폐가가 된 섬의 빈집을 들여다보면, 무엇이 남아 있어도 있다. 섬사람들이 섬을 떠날 때는 이사를 오고 가는 것이 아니라 집은 두고 사람만 떠난다. 살림살이를 고스란히 두고 몸만 빠져나간 집도 더러는 있고, 입던 옷이며 덮던 이불을 그대로 두고 가기도 하고, 손때 묻은 세간일수록 그대로 두고 떠나기도 한다. 떠나도 아주 가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뭍으로 옮기기가 번다하여 두고 가기도 하겠지만, 언젠가는 다시 돌아올 집이라 생각하여 두고 가기도 했을 것이다. 이래저래 섬사람들은 섬 집에 대한 미련을 남겨 둔 채 뭍을 향한 아쉬운 걸음을 옮겼을 것이다.

우거진 풀숲을 헤치고 폐가를 들어가 본다. 우데기 안을 들어서니 나타나는 살림방에는  떨어져 나앉은 문짝과 함께 즐겨 듣던 라디오며 자잘한 가재도구들이 어지럽게 흩어져 있다. 모든 살림 단정하게 두고 간 것을 지나는 길손들이 한번씩 들여다보면서 흩트린 것인지도 모르겠다. 지나는 길손들이 들여다보고 임자 없는 것이라고 더러는 쓸만한 것을 가져갔을지도 모르겠다. 큰방 옆에 작은방이 하나 딸려 있는데, 벽에 한 장 짜리 폐가의 방 안. 1993년도 달력이 보인다.1993년 농사 월력이 붙어 있다. 집을 비운 지 십수 년이 지났다는 말이다. 선반 위에는 책들이 가지런히 꽂혀있다. 월간잡지도 보이고, 장편소설도 보인다. 월간지에도 거죽을 따로 입혀서 읽은 걸 보니 이 방의 주인은 책을 무척 아끼면서 읽기를 즐겨했던 사람일 것 같다. 책의 종류도 다양했다. 한국문학전집, 한국대표단편선, 장편소설선집 들이 있는가 하면, 펄벅전집, 야마오카소하치(山岡莊八)의 '대망(大望)', 시바료타로(司馬遼太郞)의 대하실록 '발군(拔群)'도 전질로 있다. 그 뿐 아니다. 전자 관련 책자와 함께 각종 기술 서적도 많이 보인다. '새농민'이라는 잡지는 몇 해를 두고 계속 구독한 한 듯 선반 위에 가지런히 꽂혀 있고, 읽던 신문들도 방 한쪽에 차곡차곡 쌓여 있었다. 이 방의 주인은 전자(電子)에 관련된 월간지에도 거죽을 입혀 책을 읽었다.공부를 하면서 문학 서적 읽기에도 깊이 빠졌던 꿈 많은 청년이었던 것 같다. 이 방에서 젊의 시절의 싱싱한 꿈을 키우다가, 그 꿈의 실현을 위해 뭍으로 떠난 것 같다. 꿈을 이루면, 혹은 꿈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다시 섬 고향집으로 돌아오리라 생각하고 즐겨 읽던 책들이며 아끼던 생활 용품들을 그대로 두고 떠났으리라. 그 꿈을 이루기 위해 열심히 살다 보니 고향에 돌아올 날을 아직 얻지를 못한 지도 모르겠다. 고향의 방에 남아 있는 그의 손때 묻은 책과 생활 용품들을 보면, 책을 그토록 아껴 읽었던 정성을 보면, 그는 틀림없이 성공한 삶을 성실하게 살고 있으리란 생각이 든다.

폐가를 나서 죽암 해변 길을 걷는다. 딴바위는 변함 없는 위용으로 섬의 북쪽 바다를 지키고 있는데, 동네 모습은 전 같지가 않다. '맛 좋은 막걸문을 닫은 죽암의 '맛 좋은 막걸리집'리'로 섬 길 나그네의 사랑을 받던 '죽암식당'도 문을 닫은 지 오래란다. 고부간에 의좋게 살고 있었는데, 모두들 저마다의 살길을 찾아 뭍으로 떠나버렸단다. 임자 잃은 집 마당에는 떨어진 석류꽃이 어지럽게 날리고 있다. 섬의 푸근한 인심 하나를 잃은 듯해 공허한 마음속으로 아쉬움이 파고든다.

웃대바우로 올라간다. 죽암 위의 마을이라 하여 웃대바우라는 곳이다. 비탈길을 따라 오르면 마치 천진한 어린 아이가 괴발개발 환칠이라도 해 놓은 듯한 무늬가 진 기암을 만나게 된다. 지난날 길동무와 함께 그 바위를 보면서 '신의 낙서장'이라 이름을 붙이기도 했다. 그 바위와 더불어 바다 절경이 오롯이 내려다보이는 언덕에 자리잡고 있는 집, 주위로 복사꽃 갯메꽃 넝쿨이 처마까지 올라가 있는 웃대바우 폐가살구꽃이 만발했었다. 그러나 지금 이 집엔 마당의 자욱한 잡초와 함께 칡이며 갯멧꽃 넝쿨만 집을 온통 감싸고 있다. 이 집엔 또 무엇을 남겨두고 떠났을까. 집 안을 들여다본다. 독실한 불교 신자였던가 보다. 고승의 설법 테이프며 불법을 담은 책들이 여러 가지 가재 도구들과 함께 흩어져 있다. 그리고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라'는 성철 스님의 말씀을 새긴 액자도 보인다. 역시 몸은 떠나도 마음까지 다 가져가지는 못한 모양이다. 그러나 돈독한 불심은 두고 가지 않았을 것 같다. 이 집 주인 또한 뭍의 그 어느 곳에서 늘 공덕을 비는 마음으로 열심히 잘 살고 있으리란 생각이 든다.

웃대바우에서 자욱한 풀숲을 헤치며 옛길을 더듬어 본천부를 지나 나리분지로 간다. 섬에서 제일 광활한 평원 나리분지에 자욱한 안개가 내려앉아 있다. 지친 다리도 쉴 겸 어느 주막에 앉아 막걸리를 한 잔 청하는데, 안개 속에서 밭을 갈고 있는 나리분지 노부부먼 풍경 속에서 노부부가 안개를 헤치며 밭을 갈고 있다. 부인은 소처럼 앞에서 끌고 남편은 뒤에서 쟁기질을 한다. 정겨운 전원 풍경으로도 보이지만, 고단한 섬 살이의 한 모습으로도 보인다. 필시 자식들을 모두 뭍의 대처로 보낸 노부모들일 것이다. 언젠가는 저 노부부도 손때 묻은 세간을 고스란히 남겨 둔 채 섬을 떠날지도 모른다. 젊은 사람들은 꿈을 찾아 섬을 떠나고, 노부모는 자식을 찾아 혹은 유명을 달리하여 섬을 떠나고-. 그리하여 이 섬엔 빈집과 오래 된 세간만 남겨지게 될 것이다. 빈집은 고향으로 다시 돌아오리라는 미련과 향수로 가득 차게 될 것이다.

섬의 폐가 들여다보기, 그것은 곧 섬에 서린 미련과 향수를 들여다보기다. 고적한 섬 살이를 돌아보기다. 섬 살기다.♣(2007.7.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