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는울릉도

서달 마을 정인덕 씨 -여기는 울릉도·15

이청산 2007. 7. 11. 11:12

서달 마을 정인덕 씨
-여기는 울릉도·15



고개도/ 이쯤은 되어야/ 령(嶺)이라 하겠구나/ 태하령(嶺)/ 그것도 차로 넘으려면/ 흉장 깊숙한 간담/ 굽이마다 내주어야/ 저편 출렁이는 바다/ 펼쳐 보이는구나/ 늙은 구렁이 한 마리/ 산등 구불텅 걸쳐둔 섬/ 우리 생(生) 넘어야 할/ 마지막 고갯길 같구나

                                  - 최동룡 : 바다·40 -태하령을 넘으며

그랬다. 태하령을 넘을 때는 '인명이 재천'임을 굳게 믿으며 달관과 체념을 동시에 습득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차로 넘다보면 양 쪽 바퀴 겨우 걸릴만한 노폭에 좌로 봐도 절벽, 우로 봐도 절벽. 그 절벽 아래로 펼쳐지는 계곡이며 바다의 절묘한 풍경에 찬탄을 모을 겨를도 없이, 생사의 분별에 초연해져야 했다. 흉장 깊숙한 간담을 굽이마다 내주어야 저편 출렁이는 바다를 볼 수 있었다. 태하령 고갯길은 세파를 헤쳐 나가야 하는 인생 길 험로보다 더 거칠고 가파른 길이었다.

사람의 길이 된 태하령 고갯마루그러나 이제는 아니다. 가파르긴 하지만, 목숨에 대한 달관이나 체념을 하지 않아도 되고, 굽이마다 간담을 내어주지 않아도 된다. 차로 넘을 일이 없어졌기 때문이다. 찻길은 수층터널과 산막터널에 주어버린 지 벌써 수년이 지났다. 차가 넘던 가풀막을 이제는 오직 걸어 넘기만 하면 된다. 콘크리트 포장 갈라진 사이로 풀잎이 피어나고 있다. 타박타박 걸어 넘을 수 있는 오솔길이 되어가고 있다. 넘다보면 등판에 땀이 좀 차오르긴 해도 지난날의 험로를 추억하며 넘을 수 있는 정다운 섬 길로 이어지고 있었다.

길동무들과 함께 그 태하령을 넘어 서달 마을로 들었다. 섬 개척 당시에 서달래(徐達來)라는 사람이 맨 처음 와서 살았던 곳이라 해서 '서달'이라 부른다는 동네다. 동네 안쪽에 보이는 산마루가 서달령이고 저 먼 등성이는 미륵봉이다. 포장도로를 따라 어귀를 들어서면 띄엄띄엄 몇 집이 보하늘에 닿을 듯한 언덕 위의 서달교회이는데, 북쪽 언덕배기 높다란 곳에 아담한 붉은 벽돌집의 서달교회가 서있다. 하얀 십자가가 하늘에 닿을 듯 걸려 있다. 지난 섬 살이 때 언덕 위의 평원 가장자리에 서 있는 교회는 가 보았지만 동네 깊숙이로는 들어가 보지 못해 언덕 아래 길을 따라 계속 올라갔다.

인가가 한 채 나타났다. 그리고 사람이 보였다. 산중 마을에 흔치 않는 인가가 있다는 것이 반갑기도 했지만, 사람이 보인다는 것이 더욱 반가웠다. 섬의 산중에는 빈집이 많기 때문이다. 집 모퉁이 마당에서 땔감 나무를 장만하고 있는 사람에게로 다가갔다. 대화를 나누는 사이에 알았지만, 그는 서달 태생의 정인덕(鄭仁德, 67) 씨였다.

이 길을 내쳐 가면 어디로 갈 수 있느냐고, 먼저 길을 물었다. 옛날엔 계곡을 따라 올라가면 성인봉도 가고, 계곡을 건너 길을 잡으면 남서리 쪽으로도 다녔지만, 지금은 길이 다 없어졌을 거라고 한다. 저 위에 올라가서 마을 전경이나 구경하고 돌아가는 것이 좋을 듯하다며 동쪽 언덕을 가리켰다. 저 위에 집 하나가 더 있다고 했다. 길을 물은 것이 대화의 물꼬가 되어 이런저런 이야기로 이어져 나갔다.

땔감을 장만하고 있는 정인덕 씨서달교회 뒷마을에서 4남6녀의 셋째 아들로 태어나 농사일, 뱃일로 전전하며 살아오다가 45세 때인 1975년에 섬을 떠나 부산으로 갔다고 한다. 섬을 떠날 당시에 이 서달 마을은 300호 정도가 살았을 정도로 꽤 흥성했다고 한다. 십여 호가 될까말까한 지금에 비하면 격세지감이 크다. 그 때의 배는 커봤자 5톤 정도였는데, 그 작은 배에 8,9명이 매달려 모든 어로 작업을 손으로만 했다고 한다. 지금 15톤, 20톤 되는 배도 단 두 사람이 기계를 조종하여 고기를 잡는 것에 비하면 그 때는 참으로 무지막지했다는 생각이 든다고 했다. 농사일도 그 때는 기계란 없을 뿐만 아니라, 모두가 가풀막진 비탈 밭이라 가축의 힘도 빌 수 없이 오직 사람 힘으로만 갈고 매고 해야 하니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다고 한다.

섬을 떠날 때만 해도 혈기 방장할 무렵이라 힘든 섬 살이를 과감하게 접고 둘뿐인 어린 아들과 아내를 데리고 무작정 부산을 향해 떠났다고 한다. 도심지 어느 곳에 정착하여 장사를 하면서 그럭저럭 생활을 꾸려 나갔다고 했다. 아들 둘을 다 공부시켜 큰아들은 성취도 하게 하여 지금은 손녀 셋을 두고 있는데, 맏손녀는 고등학생이라 한다. 그런데 둘째 아들은 마흔이 된 지금까지 혼인을 못 시켰는데, 도무지 결혼할 생각을 하지 않아 걱정이라고 했다.

그런 세월이 흐르는 사이에 몸이 늙어가고 병도 얻게 되자, 문득 고향 생각이 나더라고 했다. 그래서 환갑도 지난 2002년에 혼자 사는 둘째 아들을 부산에 버려 둔 채 내외 간에 봇짐을 싸들고 고향을 찾아 왔다고 한다. 항구가 있는 저동에 방 하나를 얻어 오징어 철에는 오징어 건조며 할복 작업으로, 나물 철에는 서달 마을에서 나물을 채취도 하고 재배도 하며 살아가고 있다고 한다. 얼굴에 세월의 풍상이 역력히 드러나 보였다. 부산 살이 삼십여 년에 숱한 고단을 겪었던 것 같다. 이도 많이 빠지고, 당뇨도 조금 앓고 있다고 한다. 그래도 이 공기 좋은 곳에서 하늘 보고 땅 보고 사니 참 좋다고 했다. 부산보다 울릉도가 낫고, 저동보다는 서달 마을 훨씬 살기 좋다고 했다. '하늘 보고 사니 참 좋다'고 할 때는 얼굴빛도 말간 하늘빛을 닮는 듯했다. 길동무들의 배낭 속에 있는 오이며, 귤을 꺼내어 함께 나누어 먹자고 하니 오이는 이가 시원찮아 깨물 수 없다면서 듬성하게 박힌 이를 드러내며 천진하게 웃는다.

정 씨의 부산 살이, 문득 태하령 그 험로에 겹쳐져 떠올랐다. 간담을 다 빼놓듯 하며 올라야 했던 태하령 굽이길, 그러나 차들을 터널에 주어버린 태하령은 섬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정다운 섬 길이 되어 가고 있다. 좀 가파르면 가파른 대로, 좀 거칠면 거친 대로 솔송이며 너도밤나무며 섬노루귀며 명이의 싱그럽고 향기로운 자태를 즐기며 걸을 수 있는 섬 길이 되어 가고 있는 것이다. 태하령이 사람의 간담을 서늘케 하던 차들을 버릴 무렵, 정 씨는 세파 몰아치던 부산을 버리고 고향 서달 마을로 돌아왔다. 사람의 길이 된 태하령에 세월이 쌓이면서 정 씨의 고향 살이 세월도 함께서달 언덕에서 내려다 본 서달 평원 쌓여 갔다. 태하령 험로가 싱그럽고 정답게 변해 가듯, 정 씨의 삶도 그렇게 변해 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잠시 보이던 그 천진한 얼굴이 다시 온 섬에서 얻은 삶의 모습은 아닐까.

정 씨와 헤어지고 정 씨 집이 내려다보이는 언덕에 올랐다. 언덕에서 바라보는 서달 마을에는 고즈넉한 평화가 내려앉아 있었다. 교회 십자가 위에 걸린 해가 서달 평원에 맑고 푸른빛을 뿌리고 있다. ♣(2007.7.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