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는울릉도

향목령 김두경 할아버지 -여기는 울릉도.11

이청산 2007. 6. 11. 15:24

향목령 김두경 할아버지
여기는 울릉도·11



우리가 김 할아버지를 찾아갔을 때, 할아버지는 할머니와 함께 나물을 손질하고 있었다. 부지깽이를 삶아 말린 것이라 했다. 우리는 태하 등대에서 향목령을 넘어 현포로 가려던 참이었다. 그 길 어귀에 김 할아버지의 집이 있다는 것을 듣고서, 마침 잘되었다고 생각했다.

지난 겨울 어느 텔레비전의 한 프로그램에서 <겨울, 울릉도 이야기>라는 코너를 몇 회에 걸쳐 방송하면서 '향목봉 행복 1번지, 김두경 할아버지'를 방송한 적이 있었다. 그 겨울, 산꼭대기 외딴집에서 부부 단 둘이서만 지내면서도 아궁이에 지피던 군불처럼 따스하게 살아가던 그 모습이 깊은 인상으로 새겨졌었다. 그리고 '허허'와 '하하'를 함께   섞은 듯한 소리로 천진하면서도 인자하게 웃던 모습이 가끔씩 떠오르곤 했다. 그 방송을 볼 때는 내가 섬에 오기 전이었다. 다시 섬 살이를 시작하게 되면서 언젠가는 그 할아버지를 찾아보리라고 생각하고 있던 차에 오늘 할아버지의 집을 지나가게 된 것이다. 길은 그 집 마당으로 나 있었다.

"텔레비전에 나오셨던 할아버지시죠?"

"몰래(몰라), 허허허"

 얼굴에 세월의 풍상은 서려 있지만, 그늘이라곤 보이지 않는 맑고 밝은 모습이었다. 할아버지만이 아니었다. 할아버지보다 더 복스러운 인상의 할머니 얼굴도 맑고 환했다. 부부 모두 티 없이 자라 있는 섬의 나무와 풀과도 같고, 집 앞에 서 있는 커다란 향나무의 모습과도 같았다.

"한번 뵙고 싶었습니다."

"뭘, 내가 대단한 사람이라고."

찾아 온 손님을 이대로 맞을 수 있느냐며 나물을 다듬던 손을 털고 일어나 살림방으로 가자고 한다. 괜찮다고 사양을 해도 한사코 차라도 한 잔 마시고 가야 된다고 손을 잡아끈다. 인정의 따스하기가 발갛게 피어오르는 잉걸불 같다. 우데기를 들어서니 장판 깔린 마루에 자잘한 세간들이 놓여 있었다. 주전자를 들어 찻물을 끓이려 했다. 주전자 옆에 더덕 술이 보였다.

"차 끓이지 마시고요, 저 술이나 한 잔 주십시오."

"그 좋지, 허허허"

맑은 얼굴 위로 다시 웃음꽃이 피어났다. 찻잔에 술을 한 잔 가득 따른다. 올해 연세가 어떻게 되시냐고 물었더니 열다섯이라고 한다. 칠, 팔은 열다섯이 아니냐며 또 허허허 웃는다. 일흔 여덟이라는 말씀이다. 정정한 모습으로 봐서는 그 연세로 보이지 않았다.

조상 대대로 이곳에서 살아왔다면서 이곳에서 태어나 이곳에서 죽어 갈 거라고, 어딜 가봐도 이곳보다 더 편한 곳이 없더라고 했다. 딸 셋을 낳고 아들 셋을 내리 낳아 슬하에 모두 육 남매를 두었는데, 다들 성가하여 육지로 나가 잘 살고 있다고 한다. 옛날에는 이곳에 십여 가구가 살았었지만 지금은 모두 떠나고 할아버지네 한 집만 남아 있다고 했다. 향나무가 많아 '향나무재[香木嶺]'라 했는데, 지금은 향나무도 많이 없어지고, 찾아오는 사람도 드물어 그 이름마저 잊혀지지나 않을지 걱정이라며, 표지석이라도 세워야겠다고 했다.

산마루 외딴 곳에서 두 분만 사시기가 외롭지 않느냐고 물으니 "외로운 게 뭐여! 식구가 얼만데."라고 한다. 웬 식구가 그리 많으냐 했더니 먹이고 있는 염소들이 모두 식구라며 허허허 웃는다. 마당가의 섬바디 하얀 꽃이 웃음 따라 하늘거렸다.

식구가 또 있다고 한다. 밭에 물을 대기 위해 웅덩이를 하나 팠는데, 그냥 물만 가두어 두기가 아까워 육지에서 붕어를 들여와 기르고 있다는 것이다. 놀라운 일이었다. 울릉도에는 민물고기가 없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렇다면 할아버지가 울릉도에 관한 상식 하나를 뒤엎은 게 된다. 그 웅덩이가 보고 싶다고 했더니 따라오라며 앞장을 선다.

뒤란을 돌아 취나물 밭을 지나 둔덕에 오르니 자그마한 연못이 보인다. 늦은 오후의 햇살이 고요한 물 위에 내려앉아 반짝이고 있었다. 물은 초봉에서 끌어온다고 했다.

"저것 좀 보래!" 새끼 붕어들이 재롱을 부리듯 꼬리를 흔들며 물을 헤치고 있었다.

"내가 저것들 보는 재미로 안 사나. 허허허"

 연못의 물빛처럼 맑은 웃음소리가 숲 속으로 퍼져 나갔다.

"현포로 간다 캤제? 사람이 하도 안 댕겨 길이 있을라나. 이리 와 봐."

새파란 풀이 돋아있는 무덤을 지나간다.

"여게 우리 아부지 어메가 계시는 기라, 나도 이 옆에 무치야겠제. 허허허"

숲 속을 조금 더 걸어 나가니 할아버지가 가리키는 손끝에 희미한 길이 걸린다.

풀이 우거졌더라도 헤쳐가면서 이 길을 곧장 따라 가다가 오른쪽으로 등성이를 돌아 오르면 레이더 기지가 나오는데, 그 앞에서 잘 닦인 길로 가지말고 잡풀 우거진 길로 곧장 가면 현포가 나온다고 일러주었다. 말씀 속에 길 떠나는 자식을 걱정하는 듯한 마음이 묻어났다.

편히 계시라 인사하고 한참을 걸어가다가 뒤를 돌아보니 할아버지는 손을 흔들고 있었다. 향나무 가지가 바람에 흔들렸다. 할아버지가 바로 향나무였다. 향기도 짙은 오래된 향나무였다. 향나무재를 지키고 있는 향나무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