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둑의 상사화 그리고 그리움
강둑에 웬 상사화 꽃대가 솟아오르더니 꽃대 끝에 분홍 꽃 두어 송이를 피워냈다. 꽃대 주위에는 가로수로 서 있는 벚나무에서 떨어지거나 베어낸 마른 가지가 널브러져 있고, 주변에는 뻗어 나가고 있는 칡넝쿨과 함께 온갖 풀들이 무리 지어 나고 있다.
저 꽃은 어디서 왔을까. 상사화는 뿌리 번식을 하는 꽃이다. 열매를 맺기는 하지만 여물지는 못해 씨앗 노릇은 할 수 없다. 종족을 퍼뜨리자면 오직 뿌리가 갈라져서 꽃을 피우게 할 수밖에 없는데, 뿌리가 어디서 날아와 꽃을 피울 수는 없는 일이다.
꽃대가 나고 꽃을 피우자면 무슨 힘이든 다른 힘에 의지해서 뿌리가 옮겨져 오는 수밖에 없는데 이 강둑에 무엇이, 누가 옮겨 놓았단 말인가. 모든 일은 인연에 의해 일어난다는 불가佛家의 연기법緣起法을 빌리지 않더라도 누가, 무엇이 옮겨 놓았을 것은 틀림없다.
상상의 힘을 빌려 보는 수밖에 없다. 어느 해 큰비가 내려 이 강에 홍수 져 흐를 때 어디서 떠내려오던 뿌리 하나가 강물 가장자리 어디에 걸린 것이 마침 이 자리이던가. 그렇지만 내가 이 마을에서 살아오는 동안 강물이 이 자리까지 차오른 적은 본 일이 없다.
아니면, 누가 집에 있는 흙을 치울 일이 있어서 퍼다가 이 강둑에 버릴 때 집 어디에 있던 뿌리 하나가 묻어왔을까? 그때 이 강둑에 버려진 것이 싹 틔우고 꽃대 솟구쳐 꽃을 피워낸 것일까? 그렇지만 이 강둑을 거닐며 쏟아부은 흙을 본 적은 없다.
그러고 보니, 몇 년 전 풀숲 길이던 이 강둑 수풀을 걷어내고 회반죽으로 포장할 때, 굴착기가 와서 강둑을 다듬은 일이 있다. 그때 굴착기 삽 어디에 뿌리 하나가 붙어 있다가 이 자리에 떨어진 것일까. 그 둔중한 쇳덩이에 붙어서도 살아남을 수 있었을까.
그것도 아니면 마을 어느 호사가가 집 화단이나 어디서 나던 상사화에서 뿌리 하나 캐어, 장난 삼아 몰래 갖다 심었는데, 거기서 꽃대가 솟고 꽃이 핀 것일까. 마침 멀지 않은 마을 숲에 상사화 꽃이 자라고 있어서, 그 뿌리 하나 떼어다 심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다른 어느 곳에 사는 사람이 산책을 왔다가 마을 숲 상사화 뿌리 한 조각 뜯어다가 심었을 가능성도 없지 않다. 누구거나 그렇게 했다면 그 호기심에 호기심이 느껴진다. 짓궂은 장난이었을까. 이 꽃에 대한 애착을 그렇게 표현이었을까.
내 상상은 여기까지다. 더는 어떤 경우의 수도 생각해 낼 수가 없다. 내 상상의 현실성을 가만히 돌이켜 짚어보면 마지막 상상이 가장 가능성이 있을 것 같다. 그 사람이 누구일까. 누가 그렇게 예사롭지 않은 일을 했을까.
어찌하였든 이 한 뿌리 상사화의 운명은 이렇게 결정되었다. 사람의 운명도 그렇다. 인과응보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이 상사常事라 하지만, 이렇듯 장난일 수도 있는 우연으로 결정될 수가 있다. ‘인생무상’이란 말 속에는 이런 뜻도 없지 않을 것 같다.
어떤 까닭으로 이곳에 왔든, 이제 이 상사화는 이곳에서 싹을 틔워 잎을 내밀어야 한다. 잎이 말라가다가 잦아들면 그 자리에 꽃대를 솟구치고 꽃을 피워내야 한다. 그리하여 잎은 꽃을 그리다가 말라가고, 꽃은 잎을 그리다가 져 가는 상사想思의 전설 속을 살아가야 한다.
내가 강둑에 우연히 핀 이 꽃을 두고 왜 이리 부질없는 상상과 상념에 빠져드는 걸까. 이 꽃에 내 모습의 한 편린이 보이기도 하고, 동병상련의 정까지 느껴지기 때문이다. 지금 이 꽃은 외딴곳에 홀로 솟구쳐 살고 있다. 나도 아무런 연고 없는 이곳에 발을 얹어 살고 있다.
물론 이곳에 살게 된 연유는 다르다. 상사화는 제 뜻과는 상관없이 이곳에 뿌리를 내렸겠지만, 나는 산수가 좋다는 이곳을 찾아 내 발로 걸어와 살고 있다. 어떻게 터를 잡았든 살고 보니 외롭기는 마찬가지다. 그 외로움을 안고 강둑을 거닐다 이 상사화를 만났다.
상사화를 그리움의 꽃이라 했던가. 나도 그립다. 지금 상사화는 가버린 잎을 그리워하고 있는가. 나에겐들 그런 그리움이 왜 없을까. 상사화가 꽃이 잎을, 잎이 꽃을 아무리 그려도 그리움 속에만 있을 것들이 아닌가. 내 그리움도 다르지 않았다.
그래도 상사화와 나는 다르다. 저 꽃은 그리움과 그리움이 엉겨 갈 뿐이지만, 내 그리던 이는 어느 날 문득 그리움 뒤쪽의 커튼을 살포시 열고 내게로 왔다. 피그말리온의 소원이 이루어진 건가. 저 꽃도 소원이 간절하다 보면 잎과 꽃이 서로 부여안는 날이 올 수 있을까.
나는 지금 내게로 온 그리움과 더불어 꿈속의 시간을 살고 있다. 그립기는 마찬가지다. 어느 시인이 ‘그대가 곁에 있어도 나는 그대가 그립다’고 하지 않던가. 나도 그렇다. 그리운 이가 곁에 있어도 그립다. 저 상사화에 늘 그리워하며 사는 내 모습이 겹쳐 보인다.
홀로 피어 그리움이 더욱 깊을 강둑 상사화는 내 그리움을 더욱 그립게 한다. 상사화의 생애가 그러하듯, 나 역시 그리움으로 한생을 살아야 할까 보다. 산다는 것이 그리움을 새겨가는 일이기라도 한 듯 그렇게 살아가야 할까 보다. ♣(2026. 9.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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