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우헌일기

난병 일기(10)-잘 껴안고 있다 보면

이청산 2026. 8. 22. 21:11

난병 일기(10)

-잘 껴안고 있다 보면

 

  양성자 치료도 고비를 넘겨 막바지로 가고 있다. 치료 한 시간여 전쯤에 치료 대기실에 여유 있게 도착했다. 늘 하는 대로 소변을 보고 물 300cc를 마셨다. 1시간 뒤 치료할 때 필요한 적정 소변량을 유지하기 위해서다. 환자복으로 갈아입고 간호사의 호명을 기다렸다.

  드디어 간호사가 이름을 부르며 데리러 왔다. 외부인은 출입이 엄격히 통제되는 양성자 치료실로 들어가며 간호사가 관장은 잘하셨느냐고 물었다. 최선을 다했다고 했다. “표정이 아주 밝아 보이시네요.” 관장이 잘 이루어져 보인다는 말일 것이다.

  관장이 그런대로 이루어지기도 했지만, 나의 지극한 보호자 노릇을 하고 있는 아이들이며, 쾌유를 간곡히 빌어주는 사람들 생각이며, 그 응원의 힘으로 치료를 잘 받을 수 있을 것 같은 예감에 표정이 밝아지기도 했을 것 같다.

  문을 열고 들어가서도 미로 같은 통로를 지나 원형의 방 안에 놓인 치료대에 누웠다. 몇 번 치료를 받는 동안 그랬듯이 잡아주는 자세대로 꼼짝 않고 누운 상태에서 천장은 돌고 나를 지켜보는 렌즈 같은 기계는 몸에서 두어 번 가깝고 멀어지고 했다.

  기계 소리가 멈추면서 치료사가 다가왔다. 치료가 잘되었으니 일어나라는 말을 기다리며 몸을 일으킬 마음의 준비를 했다.

  “치료는 아직 못했습니다. 가스가 문젭니다.” 일어나서 방귀 한 번 뀌고 오라 했다. 호사다마好事多魔란 이때 쓰라고 있는 말 같았다. 양성자 치료의 성공 조건이 또 하나 복병처럼 몰래 숨어 있었다. 안 나오는 방귀를 어떻게 뀌란 말인가. 난감했다. 나가서 좀 걸어보라 했다.

  해보자. 내 쾌유를 빌어주는 사람을 위해서라도 열심히 해보자. 치료실을 나와 대기실을 왔다 갔다 하다가 화장실에 들었다. 앉아 힘을 썼다. 지성이면 감천인가, 숨어 있던 방귀가 못 이긴 듯 살며시 터져 나왔다.

  다시 치료대에 누웠다. 방 안의 방이 돌아가고 다시 나를 노려보는 커다란 렌즈는 가까워졌다가 멀어지곤 했다. 잔잔한 음악 소리를 배경으로 천장 돌아가는 소리가 태풍처럼 몰아치다가 잠시 침묵의 시간이 흐르더니 치료사가 일어나라 했다.

  “잘 되었습니다. 가스도 다 빠지고 소변량도 잘 맞았습니다.” 살며시 터져 나온 그것이 날 살렸다. 몸과 마음이 한결 가벼워지는 것 같았다.

  치료대를 내려오니 간호사가 대기실까지 데려다주며, 내일모레도 잘 준비하고 오시라 했다. 그 ‘내일모레’는 양성자 치료 마지막 날이다. 아이들의 곡진한 배웅을 받으며 가벼운 마음으로 귀갓길에 올랐다. 그 가벼움 속으로 난병 세포가 녹아들기를 바라며.

  드디어 마지막 양성자 치료 날이 밝았다. 어느 날보다도 관장에 간절한 공을 쏟았다. 일신의 평안을 위해서만 아니라, 바쁜 일들을 무릅쓰고 내 보호자 노릇을 해야 하는 아이들, 내 병을 염려하고 치료를 응원하는 정다운 이들을 위해서라도 소홀히 할 수 없다.

  그 공덕이 복덕이 되기를 바라며 병원 길에 올랐다. 세 시간여를 달려 병원에 이르렀다. 대기실로 드니, 몇 번 치료를 받았다고 간호사와 치료사가 반갑게 맞아 준다. 준비를 잘했느냐 물었다. 최선을 다했다고 했다.

  오늘도 치료 한 시간 전에 소변을 보고 300cc의 물을 마셨다. 양성자 치료를 받는 동안 늘 해오던 일이다. 최상의 관장 상태 유지는 물론 또 ‘가스가 문젭니다.’라는 말을 듣지 않게 해야 한다. 적잖게 드는 비급여 치료비가 머릿속을 맴도는 것도 하릴 없는 일이다.

  간호사의 친절한 안내를 받아 양성자 치료대에 누웠다. 잡아주는 자세를 굳세게 유지하며 눈을 감았다. 음악이 흘러나오고 기계 돌아가는 소리가 들리고, 나는 평소 애송하는 시들을 떠올렸다. 기계 소리가 잦아들었다. 운명의 시간이 다가오는 것 같았다.

“아무것도 걸리는 게 없이 말끔히 잘 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치료사뿐 아니라 나의 쾌유를 빌어주는 모든 사람에게 하고 싶은 말이었다. “모두 수고하셨습니다.” 살가운 친절로 약한 몸과 마음을 보듬어주던 치료실 사람들에게도 한 번 더 인사했다.

대기실까지 바래다주는 간호사에게 “모두 얼마나 친절하신지, 계속 아프고 싶네요. 흐흐” “그러시면 안 되죠. 다시 오시지 마세요. 호호” 다시 볼 수 없을지도 모르는 간호사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간호사도 해맑게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치료가 끝난 것은 아니다. 의사의 진료 계획에 의하면, 앞으로 이태쯤은 석 달에 한 번씩 와서 주사도 맞고 약도 받고, 검사도 해야 한다 했다. 그래도 이제는 “관장이 덜 되었군요.”, “가스가 문젭니다.”라는 말을 안 들 수 있는 것만 해도 무슨 굴레를 시원히 벗은 것 같다.

  다음 병원 길을 예약하고 병원을 나섰다. 한고비는 넘겼다. 이제부터는 남은 병인과 잘 친할 일만 남은 것 같다. 잘 껴안고 있다 보면, 내 품에 젖어 스르르 잠드는 날이 올 것이다. 다독다독 잘 재워야겠다. 내 새로운 세상을 위해서, 내 병을 아려해주는 이들을 위해서라도-. ♣(2026. 8. 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