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우헌수필

유홍초 사랑

이청산 2026. 10. 1. 11:08

유홍초 사랑

 

  오늘도 강둑길을 걷는다. 어디 원행이라도 할 때면 이 강둑길을 걷고 싶어 한시라도 빨리 돌아오고 싶을 만큼 그리운 내 산책길이다. 운동 삼아 즐겨 걷기도 하지만, 흐르는 물이며 그 물에 유유한 구름을 보며 걷는 운치도 상쾌하고, 길섶에서 피고 지는 들꽃과 만나는 정취도 그윽하기 그지없다.

  철을 바꾸어 가며 피는 들꽃들은 크지도 화려하지도 않지만, 보는 이의 마음속을 은근히 파고든다. 그 꽃들을 혼자서만 보기가 아까워 영상으로 담아, 생각나는 이에게 보내며 꽃말에 실어 마음을 전하기도 한다. 근래에는 한련초, 비단풀, 유홍초, 쑥부쟁이, 벌개미취, 물봉선 들을 보내주었는데, 모두 정감 어린 꽃말을 가지고 있다.

  어느 날 그를 만났을 때 들고 있는 핸드폰을 언뜻 보노라니, 둥근잎유홍초가 첫 배경화면으로 올라와 있었다. 그 꽃이 유달리 눈길을 잡더라 했다. 하트 모양으로 둥글게 생긴 푸른 잎 위에 솟아나 있는, 마치 조그만 나팔꽃 같기도 한 붉은 꽃이다. 꽃 속에는 노란색 심지가 콕 찍혀 있어서 앙증한 소녀 같은 느낌을 주기도 한다.

  그런 빛깔과 모양이 그의 눈길을 잡았을까. 유홍초留紅草라는 이름도 범상치 않다. 붉은빛이 머물고 있는 풀, 붉은빛을 머금고 있는 꽃이라는 뜻이겠다. 붉은빛의 꽃은 많이 있지만, 유독 이 꽃만은 ‘유留’라는 말을 써서 ‘붉은빛’을 강조했을까. 그렇게 도드라지게 드러낸 ‘붉은빛’ 이 여러 가지 정서며 심상을 떠올리게 한다.

  먼저 떠오르는 것은 뜨거운 마음, 식지 않은 열정이다. 그 누구를 향해 타오르는 마음이라 할까, 시간이 흘러가도 식지 않을 사랑이라 할까. 꽃은 작아도 그 마음마저 작은 것은 아니다. 사랑의 마음은 그리움을 동반하지 않을 수 없다. 설령 사랑하는 사람이 멀리 떠나있을지라도 저 빛은 가슴속에 녹아 있는 그리움의 빛일 수도 있다.

  붉은빛은 생명의 상징이기도 하다. 핏빛과도 같은 붉은빛은 생명력, 맥박, 살아 있음의 표상이다. 특히 초록 위에 피어난 붉은빛은 넘치는 생명감을 느끼게 한다. 그 작은 몸으로도 무성한 초록 잎 사이에 숨지 않고, 자신을 당당히 드러내고 있는 모습에서는 붉게 살아가기로 마음먹은 듯한 용기마저 느껴진다. 

또한, 붉은빛은 젊은 한때의 뜨거웠던 시간일 수 있다. 세월이 흐른 뒤 돌아보면, 한창때의 그 젊음이란 저 빛깔같이 뜨거워 무엇이든지 태울 수 있는 열정을 가지고 있었다. 젊음은 세월 저 멀리 흘러가 버릴지라도, 그 시절 열정은 완전히 꺼지지는 않아 저 빛 불씨로 살아남아 삶에 대한 애정을 이어나가게 해주기도 한다.

  이런 모습과 빛깔을 지닌 꽃이라면 뜨거운 사연을 지닌 곡진한 서사敍事 같은 게 있을 법도 한데, 어딜 보아도 그런 사연이 보이지 않는다. 둥글고 푸른 잎새 위로 한창 흐드러지고 있는 유홍초, 마치 어디선가 불씨들이 날아와 풀잎 사이에 내려앉은 듯한 그 꽃들을 보노라면, 한 자락 서사를 만들어 보고도 싶어진다.

  사람이 살다 보면 누구를 만나 열정을 사르며 사랑을 나누기도 하고, 그러다가 눈물을 뿌리거나 손을 흔들며 헤어지기도 한다. 어떤 이들이 만나서 서로 소중히 여기며 사랑을 나누고 있었는데, 세상일이란 뜻대로만 되는 게 아니어서 어느 날 문득 헤어져야 했던 사람이 있었다고 치자.

  그는 떠나는 사람의 뒷모습을 오래 바라보다가 풀숲에 들썩 주저앉았다. 서러운 눈물이 몇 방울 떨어졌다. 그 자리에 싹이 하나 솟고 있었다. 그 싹이 어찌 되었을까, 며칠 뒤에 가보니 풀은 둥근 잎을 단 덩굴이 되어 사방으로 번져 나는데, 잎새 위로 붉은 꽃 하나가 조그만 얼굴을 내밀었다. 마치 그의 가슴속에 간직하고 있는 그리움의 불씨 같기도 했다.

  “아, 내 그리움이 저 꽃이 되어 다시 피어나고 있구나.”

  꽃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조그만 얼굴을 봉곳이 열면서 살포시 미소를 짓고 있을 뿐이었다. 가슴속의 그리움이 새로운 그리움이 되어 자라나고 있는 것 같았다.

  종이부시終而復始라더니 사람은 떠나가도 그리움은 꽃이 되어 저렇게 다시 피어나는가. 다른 꽃처럼 꼿꼿하게 서 있지 않고, 나뭇가지를 타고 다른 풀을 잡으면서 올라가는 것은 마치 누군가의 손이라도 잡고 싶은 듯한 그리움의 몸짓일지도 모르겠다. 많은 꽃이 피어 있는데도 어느 것 하나 같은 모습이 없는 것 또한, 그리움의 여러 가지 얼굴들일 것 같다.

  유홍초가 이리 우리에게 들려주는 이야기는 지난 사랑에 관해서만은 아닌 것 같다. 떠난 것을 너무 슬퍼하지 말라는 위안을 주는 것도 같고. 지나간 계절을 그리 아쉬워하지 말라는 설유를 담고도 있는 것 같다. 그 꽃말도 ‘영원한 사랑’이 아니던가. 그리움은 또 새로운 그리움으로 이어져 영원한 사랑의 마음을 이루어갈 수 있다는 걸 말해주고 있는 것도 같다.

  오늘 아침 강둑을 오르니 유홍초가 화원을 이루듯 무리 지어 활짝 피어 있다. 내 그리움도 이 꽃을 따라 아지랑이처럼 피어나고 있는 것 같다.

  그의 핸드폰 속에 들어있는 유홍초는 지금 무슨 상념에 잠겨 있을까. ♣(2026. 9. 27)

'청우헌수필' 카테고리의 다른 글

댑싸리 전설(7)  (0) 2026.10.09
강둑의 상사화 그리고 그리움  (0) 2026.09.13
집착에 대하여 -상사화를 보며  (0) 2026.08.31
해어지다 헤어지다  (0) 2026.08.17
내가 일기를 쓰는 까닭  (0) 2026.07.19